소설리스트

110장. 다시 다가오는 그림자 (111/126)

110장. 다시 다가오는 그림자

“에취!”

교문 앞에서 서성이던 우선이 요란하게 재채기를 했다. 어제 밤늦게까지 강이며 산이며 뛰어다닌 덕에 감기에 된통 걸려버렸다. 마스크를 했지만 열이 올라 붉어져 있는 뺨이 다 보일 정도였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문자 내역을 다시금 확인했다.

「데이트」

문자 보내는 법은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용케 해낸 태인이 대견하고 귀엽기도 했다. 웃는 얼굴로 코를 훌쩍이던 그는 마침 뒤쪽에서 느껴지는 바다의 기운에 반가운 몸짓으로 돌아섰다.

“…어?”

그런데 눈앞에 서 있는 건 자그마한 여성이 아닌 커다란 몸집의 사내였다. 그것도 키가 그보다 주먹 두 개는 더 큰. 예상치 못한 실루엣에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우선을 보고 태용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지?”

우선은 마스크를 급히 턱으로 당겨 내렸다.

“태용 님이 어쩐 일로….”

“태인이에게 재미있는 육지의 물건을 주었더군.”

“아, 핸드폰 말씀하시는-”

언뜻 떠오른 가능성에 우선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설마 이 문자 태용 님이 보내신 건….”

“내가 보냈다.”

사색으로 질리는 우선의 얼굴을 보고 태용은 피식 웃었다.

“태인이를 도와서 보냈다는 얘기다.”

“…아. 그러시군요.”

“신호가 잘 터지지 않아서 문자를 한 번 보낼 때마다 바다 전체를 갈라야 하더군.”

“……”

우선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갑자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제 연락할 방법이 없을 때 너무 답답해서 그만.”

“문제 될 건 없다만, 웬만하면 육지에 나왔을 때만 쓰게 하도록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태용은 옷소매를 뒤져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내 누이를 실망시키지 않은 것에 대한 보답이다.”

“이게 뭐죠?”

“열어봐.”

우선은 건네받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봤다. 그 안에 익숙한 기운을 가진 구슬이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것은 어젯밤 산퇴에게 건넸던, 그의 오른쪽 눈의 시력이었다.

“태, 태용 님. 이걸 어떻게….”

“산퇴에게서 다시 빼앗아 왔다. 그 녀석은 워낙 바다에서 훔쳐 간 게 많아서 흥정할 필요도 없었지.”

“…그래도 일부러 직접 산퇴의 소굴로 찾아가셔서 가지고 와주신 거네요. 감사드립니다.”

우선은 상자 안에 든 것을 공중으로 띄워 천천히 오른쪽 눈에 스며들게 만들었다. 그러자 암전되었던 반쪽 시야가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고작 객기 어린 도발에 네 눈까지 버리려 했던 것이냐?”

태용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아니요. 모두 태인을 위한 거였습니다. 그 구슬이 사라지면 다시는 바다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바보 같군.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 걸 고려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울리고 싶지 않았거든요.”

“왜 울리고 싶지 않았지?”

“그야….”

우선이 대답하기 직전, 작은 미풍이 일면서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한 태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태용이 있을 것을 예상치 못했는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우선의 뒤로 달려가 숨었다. 그 모습을 보고 태용의 눈썹이 살짝 비틀어졌다.

“오라비를 귀신 보듯이 하느냐?”

“왜, 왜 오라버니가 먼저 여기에 와 있는 겁니까? 데이트 방해하려고 온 건 아니겠죠!”

“그 반대다. 난 이만 가보마. 통금은 똑같이 자정 12시니까 잘 지키도록.”

“피.”

태용은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반듯이 섰다. 그와 눈이 마주친 우선은 아까 못다 한 대답을 입 모양으로 얘기했다.

‘많이 좋아하니까요.’

그것을 보고 한쪽 입가를 당겨 웃은 태용은 옷깃을 허공에 펄럭이며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응? 방금 입 모양으로 뭐라고 한 거야?”

태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우선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새삼 느낀 거지만 너희 오라버니는 보기와는 다르게 자상한 분이구나.”

“응! 권위 있고 무서울 때는 늙은 장로들도 벌벌 떨 정도지만,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에게는 한없이 자상해지는 게 태용 오라버니야. 그래서 아버지도 오라버니가 다음 왕의 재목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으셔.”

“그런 분한테 여동생과의 데이트를 허락받았으니, 난 엄청 운 좋은 사람이구나.”

태인이 민망한 듯이 입술을 내밀었다.

“따, 딱히 오라버니 허락이 없어도 널… 아니, 우선 오빠를 만나러 올 수는 있다고.”

아직 오빠라는 호칭이 어색해 더듬거리는 태인이 귀여워 작게 웃은 우선은,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와 마스크를 썼다. 태인의 얼굴이 금세 걱정으로 물들었다.

“역시 어제 무리해서 아프구나. 데이트는 미루도록 할까?”

“아니. 1년에 한 번 있는 큰 축제니까 어서 나가보자. 아직 보여주고 싶은 볼거리들이 많아.”

“저, 정말? 아직도 많아?”

“그럼. 많지.”

우선은 태인의 손을 꼭 잡고 교문 밖으로 나갔다.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이 데이트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다.

신후와 함께 밤을 새우다시피 한 신라는 정오가 되어서야 침대에서 뒤척이며 깨어났다.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 쪽으로 누운 채로 턱을 괴고 있는 신후가 보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잘 잤어요?”

“응. 목소리가 많이 갈라졌네.”

“엄청 흉하네요….”

“아니. 네가 얼마나 날 안달 나게 했는지 떠올라서 지금도 곤란할 정도야.”

신후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꽉 끌어안았다. 깨우고 싶지 않아서 아침 내내 참았던 포옹이다. 살 내음이 너무도 달콤해 아침부터 정신이 혼미해졌다.

“으… 숨 막혀요….”

“아침부터 또 괴롭히고 싶지 않으니까 어서 씻고 나가자. 먼저 씻어. 아침 차리고 있을 테니까.”

“응….”

신후는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식탁에 올려놨다. 그러고 보니 그가 하는 요리는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틀어 올린 신라는 식탁에 앉자마자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안 가득히 퍼지는 달콤하고 짭짤한 맛의 조합에 눈이 저절로 커졌다.

“맛있어….”

“입맛에 맞아?”

신후는 다행이라는 듯이 입가를 당겨 웃었다. 그리고 신라의 맞은편에서 함께 샌드위치를 먹었다. 커피는 신라가 내렸다. 커튼 바깥으로 보이는 크리스마스의 도시를 배경 삼아 브런치를 먹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진 신라가 말갛게 웃었다.

“유신라.”

갑자기 심각하게 불리는 이름에 깜짝 놀란 신라가 신후를 돌아봤다.

“네?”

“원래 그렇게 예뻤어?”

“…네?”

“이런 걸 콩깍지라고 그러나? 원래 예뻤던 것 같긴 한데, 이 정도로 눈이 부시게 아름답지는 않았던 것 같거든. 그럼 내가 이상해진 거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한신후 씨, 아직 꿈꿔요?”

신라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진지한 표정이던 신후도 그녀에게 옮아 작게 웃어버렸다.

“내 고민이 우스워?”

“전 바뀐 거 하나도 없어요. 원래 이랬다고요.”

“그래, 맞아. 유신라는 원래 유신라였지. 당돌하지만 성실하고, 똑똑하지만 겸손하고.”

“……”

“특별히 눈에 띄지는 않지만 한 번 시야에 들어오면 나도 모르는 새에 빠져들고 있지. 넌 그런 여자야. 그래서 바깥에 내놓는 게 늘 불안해. 원석을 발견한 줄 알고 벌떼처럼 달려들 음흉한 남자 놈들 때문에.”

신라는 식탁에 턱을 괴고 물끄러미 신후를 바라봤다.

“그럼 난 얼마나 불안해야 돼요? 잘 다듬어진 보석이 나 좀 보세요, 하면서 여기저기 활보하는데?”

“불안하면 혼자 두지 마. 얼마든지 데리고 다닐 테니까. 그리고 주인 있는 보석이니까 이제 누구도 섣불리 접근 안 할걸.”

신후는 약지의 반지를 들어 보였다. 누가 보면 반지 브랜드의 지면 광고라도 찍나 싶을 정도의 비주얼로 의기양양한 표정이나 짓고 있는 남자가 귀여워 신라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왜 웃어? 세대 차이야?”

“그냥 귀여워서요. 한신후 씨.”

“다행히 아닌가 보네.”

“다 먹었으면 이제 씻고 나와요. 크리스마스마저 즐겨야죠.”

“그래.”

신후가 욕실로 들어간 뒤 신라는 젖은 머리를 마저 수건으로 털고 입고 나갈 옷부터 찾았다. 옷걸이째로 침대에 올려놓고 화장대에 앉은 그녀는 무심결에 거울을 쳐다봤다가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것을 보고 숨을 멈췄다. 하지만 수 초 후 환영에서 벗어나 제대로 비치는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약해지지 말자…. 약해지면 안 돼.’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꿋꿋하게 머리부터 빗었다.

* * *

강 현이 주로 머무르는 서재 바깥에는 늘 시종들이 대기해 있었다.

“윽… 으아악-!”

이렇게 그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소리가 들려오면 당장 달려 들어가 그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이 나쁠 때 들어가면 그가 뿜어내는 강한 요기에 잡아먹히기 십상이었다.

“비켜라.”

시종들을 물리친 그슨대가 서재의 문에 노크하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노크는 사실 형식에 불과했다. 어차피 강 현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문이 열리자 새어 나오는 요기만으로 목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시종들이 생겨났다.

그슨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벽에 겨우 기대 서 있던 강 현이 손에 잡히는 걸 집어던졌다. 액자 모서리에 맞은 그슨대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불안하십니까?”

“너도 이렇게… 허억… 괴로웠나?”

“저는 주술에 가져다 쓴 여우귀의 영혼 전체를 손에 넣었으니까요. 한시라도 떨어질 일이 없었지요.”

“또 허튼짓을 꾸몄다간… 허억… 용서는 없을 거다.”

“어떤 것이 허튼짓이 아닌지 일러주십시오. 유신라를 산 채로 데려와 바치면 되겠습니까?”

“반드시… 반드시 산 채로…. 으윽!”

가슴을 움켜쥔 강 현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슨대는 바깥의 시종들을 불러 정신을 잃은 강 현을 침실로 옮기도록 했다.

빈 서재에서 천천히 거닐던 그슨대는 책상에 걸터앉아 가사 없는 노래를 흥얼댔다. 입꼬리를 당긴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온전히’ 산 채로 데려온다고는 안 했습니다, 주군….”

* * *

딸랑, 차임벨 소리가 울리고 캐럴이 흘러나오는 카페로 훤칠한 청년이 들어섰다. 마스크를 쓴 채라 사람들의 시선을 적당히 피한 그는 카페의 가장 구석 자리로 걸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미안, 크리스마스인데.”

신후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준성에게 답했다.

“10분 정도면 괜찮아. 옆 가게에서 쇼핑 중이니까.”

“부럽네, 데이트도 하고. 이쪽은 연말이라 한창 바쁜데 말이야.”

“알아낸 건가? 주술을 해결할 방법을.”

준성은 신의 사자라는 직위를 이용해 신라와 화비에게 걸린 주술의 맹점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완전히 무효화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어. 하지만 그 주술을 거행한 제 3자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조금은 효력이 약화되고, 그 틈에 불사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영혼의 조각을 다른 이의 영혼으로 바꿔치기하는 건 가능하다고 하더군.”

“그슨대를 없애면, 비형랑에게 합쳐진 신라의 영혼의 조각을 다른 영혼의 조각으로 바꿔치기할 수 있다는 소리인가?”

“맞아. 비형랑을 불사로 만드는 주술은 당연히 그슨대가 행했겠지만, 그슨대를 불사로 만들었던 주술을 행한 주술사가 누구인지까지는 알 수 없는 게 문제지.”

“주술사가 죽었다고 가정할 수밖에.”

준성은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말썽꾸러기 여우귀는 자기가 그슨대를 해치우면 되는 거 아니냐고 야단인데, 이미 정이 들어버려서 그대로 놔둘 수가 있어야지.”

“보기보다 혈기 왕성한 요괴이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준성은 슬슬 주위의 시선들이 몰리는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볼게. 연말 시상식이다, 예능 촬영이다, 할 게 태산이야.”

“바쁜 와중에 고마워. 사례는 꼭 하지.”

“사례는 무슨. 데이트나 잘하라고. 그럼 이만.”

준성은 카페에서 나가자마자 도로변에 세워져 있던 벤에 올라탔다. 그가 떠난 직후 카페 문이 열리고 신라가 걸어 들어왔다.

“최준성 씨가 다녀간 거예요?”

“응.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

“무슨 얘기요?”

신라가 준성이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데이트나 잘하라는 얘기.”

“풋, 그게 뭐야.”

신후는 말을 아끼기 위해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방금 알게 된 사실을 신라도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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