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장. 이브의 데이트_下
11시가 다 되도록 우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태인의 바다의 기운이 담긴 구슬을 찾으러 어디까지 간 건지는 몰라도, 도중에 연락마저 두절돼 버린 상태였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새벽까지 영업한다는 카페에 들어온 세 사람은 심각한 모습으로 말을 아꼈다.
태인은 유독 울상이었다. 분위기를 풀 필요성을 느낀 동주가 태인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과 보드게임 같은 것들을 눈앞에 가져다주었지만, 그녀의 주의를 끄는 것조차 실패했다.
서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동주의 옆구리를 찔렀다.
“윽! 왜?”
“그냥 두는 편이 나아요. 지금은 옆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소용없을 테니까.”
“그런가?”
그때 카페의 문이 열리고 에우스가 들어왔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을 확인한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서영이 동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바다에 산다고 해서 다 대인배는 아닌가 보죠? 하는 짓이 너무 찌질하잖아요!”
“그러게.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서해 쪽은 아닌가 봐.”
그 소리를 들은 에우스가 심기 불편한 듯 눈썹을 비틀었다. 테이블을 내리친 태인이 에우스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 사람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간 가만 안 둬.”
“그쪽 걱정보단, 곧 육지는 구경도 못 하게 될 네 처지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눈빛을 진지하게 만든 동주가 에우스를 향해 물었다.
“제대로 시비를 거는 것도 아니고, 굳이 귀찮은 일을 벌여서 우선이를 시험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굳이 시험이랄 것까지…. 하지만 찾아오지 못한다면 결국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별 볼 일 없는 녀석이라는 거겠지. 그리고 동해 용왕의 따님께서 그런 보잘것없는 사내에게 정신이 팔렸다는 소문이 온 바다에 파다하게 퍼질 거야.”
바다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태인의 모습을 보면 서로의 자존심이 걸린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동주는 태인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안심시켰다.
“걱정 마. 내가 아는 우선이는 절대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아. 그러니까 반드시 자정 안에 돌아올 거야.”
“…응. 다치거나 하진 않겠지?”
“매사 신중하고 영리한 녀석이니까,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거야.”
들어와서 세 시간이 넘도록 심각한 분위기로 말없이 앉아 있는 젊은 남녀들을 보고 카페 사장은 진땀을 흘렸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끽하며 시끌벅적하게 놀고 있는 다른 테이블 손님들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그들이었다.
11시 45분쯤 되었을 때, 카페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걸어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모두가 동시에 카페 입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아쉽게도 우선이 아니었다. 하지만 꽤나 의외의 인물이었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나 보군.”
그는 태인의 오라비인 태용이었다. 육지의 계절에 맞게 모피 코트를 걸치고 워머로 목을 감싼 그는 장발을 하나로 묶어 늘어뜨리고 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푸른 눈동자를 가졌기에 외국인으로 보이기도 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를 보고 놀란 태인이 자리에서 솟구쳤다.
“오라버니!”
태용은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시계를 확인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아직인가?”
그 질문에는 다른 테이블 소파 자리에 앉아 있던 에우스가 답했다.
“아직- 이제 카운트다운만 남았지.”
표정을 굳힌 태인이 태용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설마, 이게 모두 오라버니가 벌인 짓이에요?”
“내가 벌였다기보다, 저 녀석이 납득할 수 없다며 그 남자를 시험할 거라고 하더군. 딱히 해칠 기미는 보이지 않길래 그냥 놔뒀다만, 결과가 궁금해져서 와보게 됐어.”
“오라버니! 저자가 뭔데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시험하는데요! 이미 오래전에 약혼은 없던 일이 됐잖아요!”
“몰랐어? 동해와 서해의 분위기가 험악해졌을 때 둘의 약혼은 파기됐지만, 저 녀석은 줄곧 널 마음에 품고 있었다고.”
“…네?”
에우스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 사이 시계가 55분이라는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인은 힘이 빠진 모습으로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제 일이 어떻게 돼도 좋으니, 부디 우선이 무사히만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11시 59분을 넘어섰을 때부터는 모두가 카페의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50초, 51초, 52초…
에우스는 승리의 미소를 내지었다.
시무룩한 서영을 묵묵히 다독이던 동주는, 무언가를 느끼고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카페의 문가를 쳐다봤다.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이내 천천히 풀어졌다.
“늦었잖아, 녀석….”
벌컥- 초침이 12에 다다르기 직전 문이 열리고, 숨을 헐떡이는 남자가 카페로 들어섰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모두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에우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뭐야. 시간에 쫓겨서 그냥 돌아온 건 아니겠지?”
“비켜.”
에우스를 간단히 옆으로 밀쳐낸 우선은 태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태인이 울먹이는 얼굴로 우선을 올려다봤다.
“아, 안 다쳤어…?”
큰 외상은 없어 보이지만 여기저기 까진 상처와 흠뻑 젖었던 흔적이 있었다. 우선은 빠르게 달려오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미안. 너무 아슬아슬하게 왔지? 이거 개통시키느라.”
우선은 손에 든 상자에서 새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동주를 가리키며 으르렁거렸다.
“너, 전화 안 받을래? 이런 데 숨어 있으면 나더러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그, 그게 전화가 계속 불통이길래….”
“아까 잠깐 그랬던 거야. 그 까마귀 녀석이 산퇴(*산도깨비)의 소굴로 들어가 버려서….”
태용이 우선에게 다가와 물었다.
“산퇴라면 보물에 환장하는 녀석이지. 이미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걸 쉽게 내어주지는 않았을 터. 태인의 구슬을 되찾아오는 건 실패한 건가?”
작게 웃은 우선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태인의 앞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구슬은 분명히 아까 전 까마귀가 물고 갔던 것이 맞았다.
“역시, 민우선!”
동주가 벌떡 일어나 우선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그 우악스런 힘에 억지로 끌려간 우선이 난감하게 웃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태인에게 다시 한번 미소 지어주었다.
아직 우선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태용이 물었다.
“태인이의 구슬을 무엇과 맞바꿨지? 필시 거래를 했을 터인데.”
“그냥, 제가 가지고 있던 것 중 마음에 들어 하는 걸 줬을 뿐입니다.”
“……”
시간이 다 되어 용왕의 자제들은 바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내내 못마땅한 모습이던 에우스는 우선과 함께 있는 태인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는 소리 없이 먼저 바다로 떠나버렸다. 동주와 서영은 콜택시를 부른 다음 도로변 쪽으로 나아가 대기했다.
우선은 그사이 태인에게 핸드폰을 쓰는 방법을 간단히 알려줬다.
“바다에서는 신호가 닿지 않겠지만, 뭍으로 나오자마자 나한테 연락해. 어디 있는지 알려주면 바로 데리러 갈 테니까.”
“응….”
그는 모두의 시선이 다른 곳에 있는 때를 틈타 태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뺨이 확 달아오른 태인이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봤다.
“메리 크리스마스.”
우선이 웃으며 인사했다. 함께 배시시 웃어버린 태인이 그를 따라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들을 지켜보던 태용은 체념의 기운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태인을 먼저 경호원들의 손에 맡겨 보낸 태용은 마지막으로 남아 우선에게 다가왔다.
“아직 할 말이 남으셨습니까?”
우선의 물음에, 태용은 손을 뻗어 그의 오른쪽 눈가에서 손을 튕겼다. 그리고 짐작한 바가 맞았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오른쪽 눈과 맞바꿨군.”
“예리하시네요.”
“무모한 사내 같으니….”
우선의 오른쪽 시야는 완전히 암전된 상태였다. 바다 공주의 기운이 담긴 구슬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으려는 산퇴를 설득하려면 별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의 진심을 확인한 태용은 말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우선아-! 택시 왔어!”
때마침 동주와 서영이 도로변에서 외쳤다. 그들에게 알겠다고 대답한 우선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신후는 잠들어 있는 신라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야경의 불빛이 은은하게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외투를 벗기는 동안에도 그녀의 숨은 고르게 내쉬어졌다. 아마도 처음 겪는 주술의 부작용에 심한 피로를 느꼈을 것이었다. 두려움 등 심적인 원인도 무시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버텨줘. 곧 그 주술을 벗겨줄 테니까.”
그는 다시 신라에게 에너지를 불어넣기 위해 입을 맞췄다. 그때 신라의 손이 움직이더니 신후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그는 눈을 뜨고 신라의 안색을 살폈다.
“깼어?”
“무리하지 말아요. 이제 괜찮으니까.”
“안색은 창백해.”
신라는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으며 상체를 세워 앉았다. 신후가 일어나기 쉽도록 그녀의 등을 받쳐주었다.
“너야말로 무리하지 마.”
“미안해요…. 모처럼의 데이트인데.”
“무슨 소리야. 하고 싶은 데이트는 다 했잖아. 게다가 내일도 있고.”
“메리 크리스마스.”
신라가 어렴풋이 웃었다. 신후도 마주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내일은 뭐 먹고 싶은지 생각해놔. 뭘 하고 싶은지도. 어디든 데려가 줄 테니까.”
“정말 어디든 데려가 줄 거예요?”
“그래.”
신라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있죠…. 오늘 처음으로 하루 종일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보고 깨달았어요. 이런 행복이, 나한테 얼마나 더 남았을까.”
“…신라.”
“심각해지지 말아요. 그만큼 행복했다는 거예요. 정말 즐거웠어.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신후는 그녀를 천천히 품에 넣고 다독였다.
“앞으로 너에게 이런 하루하루가 당연해질 수 있게 만들 거야. 약속할게.”
“고마워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 자연스레 입술을 포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