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장. 이브의 데이트_中 (109/126)

108장. 이브의 데이트_中

우선에게서 보통 이상의 귀력을 감지한 서해 용왕의 장자 에우스(EAUS)는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말했다.

“‘고작’ 인간 남자인 주제에 제법 강한 기운을 풍겨내는데.”

“내 사람을 지켜내야 할 때는 전력을 다하니까.”

가까이로 좀 더 끌어당기며 말하는 우선에, 태인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것을 지켜본 에우스의 표정이 더욱 사나워졌다.

“어디 힘자랑을 할 정도로 능력이 있는지 시험해볼까?”

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작고 반짝거리는 것이 그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잡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태인이 깜짝 놀라서 서둘러 짐을 뒤졌다.

“서, 설마 저거!”

“뭐가 없어졌어?”

우선의 물음에 태인이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저건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야….”

“뭐?”

“육지로 나와서 인간의 몸으로 변하려면 바다의 기운을 형상화해서 작은 구슬로 뱉어내야 해. 저걸 다시 먹어야만 바다 안에서도 살 수 있는 몸으로 돌아갈 수 있어. 가방에 넣어놨었는데 어느새 훔쳐 갔나 봐….”

우선의 눈빛이 변한 것을 확인한 에우스는 보란 듯이 웃더니 곧 손에 든 태인의 구슬을 하늘 높이 던졌다. 그러자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가 그것을 입에 물고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태인이 발을 구르며 울먹거렸다.

“어떡해…. 오늘 자정을 넘겨서 돌아오면 다시는 육지로 나가지 못 하게 할 거라고 태용 오라버니가 엄포를 놓았는데….”

이를 빠득 깨문 우선이 에우스를 노려봤다.

“이렇게 괴롭혀서 당신이 얻는 게 뭐지?”

“글쎄. 모든 행동에 의미가 있어야 하나? 가끔은 감정에만 따라서 일을 벌일 때도 있는 거야.”

“……”

“날 노려볼 시간에 어서 저 까마귀나 따라가 보시지. 까마귀는 영험한 존재니까 저걸 숨기기 위해 어디로 갈지 나조차 모른다고.”

태인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결국 뺨을 타고 흘렀다. 그걸 보고 조금 당황한 에우스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숨을 내쉰 우선은 태인의 어깨를 돌려세워 마주 보게 했다.

“자정이랬지? 꼭 되찾아 올 테니까 걱정 말고 동주랑 서영이 쫓아다니고 있어.”

“호, 혼자 가려고?”

“저자가 널 해칠 위험은 없는 거지?”

“그랬다간 동해와 서해 전쟁이 나버릴걸….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저 녀석은 그냥 날 골려주고 싶은 거야. 태용 오라버니한테도 열등감을 가지고 늘 말로만 시비를 걸었거든.”

“알았어. 그럼 저녁도 잘 챙겨 먹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하지만….”

태인은 그를 쉽게 보내지 못하고 미련이 뚝뚝 흐르는 손길로 그의 옷깃을 붙잡아 당겼다. 그걸 보고 작게 웃은 우선이 그녀의 손을 떼어내 그 손등에 짧게 입 맞췄다. 놀란 태인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덕분에 커다란 눈에서 겨우 눈물이 멎었다.

“울지 마세요, 공주님. 반드시 바다로 돌려보내 드릴 테니까요.”

“…으, 응.”

“착하다.”

태인의 머리를 쓰다듬은 우선은 동주에게 눈빛으로 당부의 뜻을 전했다. 동주는 걱정 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우선은 까마귀가 사라진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태인의 기운이 담긴 구슬을 가져갔으니 추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에우스의 말대로, 귀한 물건을 손에 넣은 까마귀가 어디로 숨었을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태인의 시선이 멀어져 가는 우선의 뒷모습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 * *

레스토랑 건물 주차장으로 내려온 신후와 신라는 잠시 차 안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꽤 오래 감고 있던 눈을 살포시 뜨는 신라를 보고 신후가 나지막이 물었다.

“좀 진정됐어?”

“…네. 죄송해요, 걱정 끼쳐서.”

“네 탓이 아닌 걸로 사과하지 마.”

좌석 시트에 편히 머리를 기댄 신후는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튼 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아? 나와 함께 있을수록 그자가 출현하는 빈도가 낮아지는 것 같으니까, 앞으로 나와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는 건 어때?”

“푸흐…. 그러다가 진짜 신이면 어떡하게요.”

“난 지금 그자를 직접 만나고 싶은 입장이거든.”

신라가 의아스럽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째서요? 지금은 당신 상태를 그들로부터 감춰야 할 때 아닌가요? 속죄의 규율을 어겼잖아요.”

“글쎄…. 감추는 건 피차일반이라.”

“그들이요? 뭐를요?”

“별거 아니야. 결론은 그들의 흘러간 역사도 소설처럼 풀어내면 결국 유치한 삼류 수준이다, 정도…?”

“네…?”

신후는 상체를 기울여 가까이에서 신라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 직접 손을 뻗어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좀 나아진 것 같으니까 다음 데이트 장소로 가볼까. 괜찮지?”

“네. 이다음은 어디 가요?”

“네가 지나가는 말로 가고 싶다고 했던 곳.”

궁금함으로 물드는 신라의 얼굴을 보고 즐겁게 웃은 신후는 차를 출발시켰다.

얼마 뒤 도착한 곳은 커다란 아이스링크였다. 얼마 전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고 ‘재미있겠다…’ 중얼거렸던 그녀의 말을 신후는 기억했던 것이다.

“어때, 괜찮겠어?”

실내로 들어서며 신후가 물었다. 신라는 좋은 듯, 곤란한 듯 애매한 얼굴이었지만 이미 눈은 스케이트를 타는 이들을 바쁘게 쫓고 있었다.

“교수님은 괜찮겠어요?”

“뭐가?”

“스케이트 타 본 적 있어요?”

“학창 시절에. 너는?”

“저도 아주 어렸을 때 한 번….”

“실력은 비슷하겠네. 넘어져도 서로 놀리지 말자고.”

말과는 다르게 첫발을 내딛자마자 능숙하게 스케이트 날을 미끄러뜨려 나가는 신후를 보고 신라는 볼을 부풀렸다. 그녀는 손잡이를 잡은 채 아직 한 발도 내딛지 못하고 서 있었다.

“학창 시절에도 그렇게 잘 탔어요?”

“그때는 한 번 정도 넘어졌던 것 같은데.”

“옛날에 한 번 타봤다고 그렇게 잘 타기 있기예요?”

“이리 와. 붙잡아줄게.”

두 팔을 벌리는 신후를 보고 신라는 용기를 내서 그를 향해 살금살금 발을 내디뎠다. 그녀도 어느 정도 운동신경이 있기에 자세는 꽤 안정적이었다. 무사히 다다른 그녀를 보고 신후는 칭찬하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역시 잘하네.”

“놀리는 거 아니죠?”

“아니야. 특별히 스케이트에 끌린 이유가 있어? 스키 타는 건 별로 싫어한다고 했었잖아.”

“아… 어렸을 때 할머니랑 왔었어요. 쌩쌩 잘 타는 모습을 보고 선수 시켜주고 싶다고 치켜세워 주셨던 게 떠올라서. 꽤 좋은 기억이거든요.”

“그랬군. 널 많이 사랑하셨나 봐.”

“네. 다른 건 몰라도 인복은 타고난 것 같아요.”

“……”

신후는 편히 웃어 주지 못했다. 그 좋은 인연들을 제대로 묶어두지 못하는 부유하는 운명으로 만들어버린 당사자였으니까. 신후의 기색을 눈치챈 신라가 그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쓸데없는 생각하죠?”

“마음까지 읽지 마.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직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풉…. 그게 뭐예요? 신종 고백이에요?”

“들키기 싫대도. 자, 한 바퀴 돌아볼까?”

신후는 웃음이 터져버린 신라를 이끌고 천천히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몇 번 넘어질 뻔한 신라는 신후에게 안겨 겨우 엉덩방아를 찧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주위의 시선이 쏠려 꽤 민망하긴 했지만 말이다.

“한신후 씨.”

신라가 반보 정도 앞서가는 신후를 불렀다.

“응?”

숨이 찬 건지, 들뜬 것인지 뺨이 적당히 상기된 신라가 눈이 마주치자 해사하게 웃었다. 신후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가 그녀를 따라 웃음을 담았다. 그는 혼자만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그만 반하게 해….”

그녀의 웃는 얼굴을 감추고 싶은 것처럼 신후는 그녀를 잡아당겨 벽에 세우고 양팔로 손잡이를 짚어 가두듯이 섰다. 하지만 장난기가 발동한 신라는 재빨리 주저앉아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우리 시합해요! 핸디캡은 5초만 줘요.”

“훗…. 그래.”

평소와 달리 아이처럼 마음 놓고 즐거워하는 신라가 보기 좋았다. 연구실의 동료들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신후는 속으로 5초를 세며 신라가 링크장을 미끄러져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멀어져도, 그렇게 금방 돌아와야 돼. 난 내 전력을 다해서 널 쫓을 테니까.”

반의반 바퀴 정도 돌았을 무렵 신라는 웃으며 신후의 위치를 확인했다. 사람들 틈으로 그가 아직도 5초를 세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신후보다 좀 더 앞쪽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빠르게 지나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실루엣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차갑게 내려앉는 감정에 신라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완전히 멈추니 남자의 모습을 더 선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자는….

“강… 현…?”

순간 다른 풍경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 것 같아 신라는 머리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때마침 한 발 내디뎠던 신후가 코스를 이탈하고 일직선으로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허억… 윽….”

신라는 가슴팍을 움켜쥐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갑자기 폐가 마비된 것처럼 숨이 가빠오고 정신이 몽롱했다. 마치 이 몸이 원래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 나쁜 분리감이었다.

딱, 환영인지 실제인지 모를 강 현이 손가락을 튕기자 스케이트를 타던 이들 모두 동시에 사진이 찍힌 것처럼 멈춰버렸다. 신라는 겨우 숨을 몰아쉬며 그의 쪽을 노려봤다.

“무…슨, 허억….”

좁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경고했는데. 나와 오래 떨어져 있으면 부작용이 올 수도 있다고. 못 들었어요?”

“부작용…? 하…. 윽….”

“괴로울 거예요. 나도 지금 꽤 괴롭거든.”

시야가 두세 개로 나누어지고 어느 쪽이 땅인지 모를 정도로 방향 감각도 사라졌다. 신라는 패닉이 되어 여기저기로 손을 뻗어보았다. 하지만 붙잡히는 것은 없었다.

강 현의 말이 더욱 크게 들려왔다.

“Forget Me Not(나를 잊지 마세요)…. 곧 구하러 갈 테니까.”

어느 순간 강 현의 환영이 사라지고 신후가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신후는 심각한 모습으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갑자기…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어디가.”

“내 몸이… 아니, 혼이 여러 개로 분리되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어요. 이건… 뭐예요? 강 현이… 그 남자가… 환각인데 마치 현실처럼…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

신후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 부작용이라는 것이 단순히 하는 소리이길 바랐건만, 사실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혼을 나눠 가진 상대는 서로 멀리 오래 떨어져 있으면 부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그 부작용이란 결국 이런 정신적인 혼란과 고통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 같지도 않은 주술부터 어서 풀어야겠군….’

신라는 두 눈을 꾹 감고 떨리는 손으로 신후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무, 무서워….”

“진정해. 잠시 내 기운을 나눠줄 테니까.”

“어서….”

신후는 일단 제대로 서지 못하는 신라를 부축해 링크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가까운 의자에 앉히자마자 입을 맞췄다. 키스라기보다 그저 온기를 전하는 입맞춤이었다. 그의 강한 기운이 그녀의 안으로 흘러 들어가 요동치는 혼을 점차 얌전하게 만들었다.

“하아…. 하아….”

“괜찮아?”

“…네. 좀 나아졌어요.”

하지만 그녀의 안색은 너무도 파리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신후는 먼저 스케이트 신을 갈아 신은 다음 신라의 발에서도 스케이트를 벗기고 원래의 신발로 갈아 신겼다. 그동안 신라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안길래, 업힐래?”

“……”

평소라면 ‘걸어가겠다’라고 당당히 대답했을 그녀가 질문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있는 걸 보고, 신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양팔에 안았다.

“어디로 데려가 줄까.”

“…집.”

신라는 작게 대답하며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신후는 더는 말없이 그녀를 안은 채로 주차장에 세워진 차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