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장. 이브의 데이트_上 (108/126)

107장. 이브의 데이트_上

“아아~ 올해도 결국 솔로로 끝나는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건우가 연구실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서류 작업을 하던 혜령도 한숨을 푹 내쉬며 건우의 맞은편 소파로 걸어와 털썩 앉았다.

“지금쯤 신라랑 교수님은 아주 꿀 같은 데이트를 하고 있겠지? 배 아파!”

이브에 딱히 할 일도, 약속도 없는 두 사람은 연구실에 출근해서 잔업을 보기로 약속했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기수이기도 했고 말이다.

건우가 팔베개를 하며 심드렁하게 혜령을 쳐다봤다.

“넌 왜 연애 안 하냐?”

“그 말 고대로 돌려줄까?”

“나야 노력은 했잖아. 웬 정신 나간 된장녀 요괴가 들러붙긴 했지만.”

“풉! 나도 노력 중이야~ 마음속에서 그 애 모습이 자연스럽게 희미해지길 기다리고 있는 거지. 사실 이렇게 마음으로 그리는 것도 연애의 한 종류가 아닐까 싶어. 그런 면에서 난 아직 연애 중~”

혜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건우는 애꿎은 소파 등받이를 주먹으로 때렸다.

“에이씨…. 결국 또 나만 솔로라는 소리잖아.”

“왜 너만 솔로야? 우선이는?”

“걔는 요새 잘 돼 가고 있잖냐! 그래서 이브에 동주 서영이 커플이랑 더블데이트하러 간 거 아니야?”

“하긴….”

대화가 끝나자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우와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서울 도심의 풍경에 넋을 놓은 태인을 보고 우선과 동주, 서영은 작게 웃었다. 처음 번화가에 나와 본 태인의 눈에는 무엇이든 신기하게 보일 터였다.

“뭐부터 할까?”

동주의 물음에 서영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더블데이트하기로 결정한 날 재빨리 영화 예매부터 했지요~ 크리스마스 때 좋은 자리로 영화표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죠?”

“오, 잘했어! 우리 용궁 아가씨께서 제일 좋아하는 게 TV니까 영화관도 분명 재미있어할 거야.”

“바로 그게 제 생각이었거든요~”

동주는 씨익 웃으며 서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에 얼굴을 붉힌 서영이 쑥스럽게 웃었다.

그리하여 네 사람은 먼저 영화관부터 가게 됐다. 자리는 둘 둘로 떨어져 앉았지만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우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태인을 살폈다.

“답답하거나 하진 않아?”

“응? 뭐가?”

“어둡고 좁잖아.”

“바닷속은 더 어두운걸. 그리고 이렇게 갇혀 있으니까 경호원들도 안 따라붙고 좋아.”

“풋, 그렇긴 하네.”

영화는 조선 시대의 해적 이야기를 픽션으로 그려낸 액션물이었다. 그 시대의 복장을 하고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본 태인이 반가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우선은 소리 없이 웃었다.

격투 신에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들썩여 손을 붙잡아 진정시켜야 했다. 어느 쪽도 먼저 손을 풀지 않아 얼떨결에 계속 붙잡은 상태로 있게 된 두 사람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어둠 속에서 얼굴이 달아오른 태인은 팝콘을 집으려는 척 손을 꼼지락거리며 빼내려 했다. 하지만 우선의 손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

깜짝 놀란 태인이 우선을 돌아봤다.

“불편해?”

우선이 작게 묻자, 눈만 깜빡거리던 태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의연하게 영화에 집중하는 듯 보이던 우선은 그녀가 눈치채지 않게 떨리는 숨으로 심호흡을 했다.

뒤쪽 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동주와 서영은 서로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신후와 신라는 크리스마스이브치고 사람이 몰리지 않는 서울 모처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여유롭게 점심식사를 했다. 신후가 미리 예약해놓은 창가 자리에서는 도시의 설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어요?”

신라가 수상하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신후는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교수라는 직업을 가지면 이런 정보만 잔뜩 얻게 돼. 내가 아니어도 다른 교수들이 맛집 찾아다니는 낙에 살거든.”

“하긴, 그렇죠.”

“내가 입맛이 까다롭기도 하고.”

“그럼 이런 데를 혼자 다녔어요?”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신후였기에 주변 테이블의 시선들이 한 번씩은 닿아갔다. 그가 혼자 다녔더라도 아마 주위에서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왜? 질투나?”

그가 묘하게 입가를 당기는 것을 보고 신라는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대부분 혼자 다녔어. 그편이 식사에 집중하기 좋으니까.”

“흠~”

“그리고 혼자 다니는 게 눈에 잘 띄거든. 튀고 좋잖아.”

안 그런 듯 보여서 가끔 잊어버리지만, 그는 사람의 관심으로 에너지를 얻고 사는 이였다. 신라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이제는 그 관심이 이전만큼 못 돼서 어떡해요?”

“훨씬 좋아.”

“왜요?”

“혼자 있으면 다가와서 귀찮게 구는 이성들이 많았거든. 적당히 떼어내는 것도 일이었는데, 이제는 관심만 주고 귀찮게는 안 하잖아.”

“그 발언, 되게 자기중심적이네요.”

“하나 더 말해도 돼?”

“해보세요.”

신후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사뭇 얄미워 보이는 미소를 내지었다.

“그런 잡다한 관심보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몇 배는 더 즐거워.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넘쳐서 흐르는 기운을 억누르느라 꽤 애먹고 있어.”

“……”

신라가 할 말을 잃은 사이 신후는 레스토랑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이쪽을 향해 있는 시선들 틈에는 남성들의 것도 적잖이 섞여 있었다. 과하게 꾸미지 않아도 본인에게서 우아한 아름다움이 저절로 풍겨 나온다는 걸 신라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신라가 소리 죽여 물었다.

“수상한 게 있는 거예요? 혹시 귀신?”

물을 한 모금 마신 신후가 고개를 저었다.

“귀신이었으면 바로 제령시켜 버렸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니야.”

“그럼 뭔데요?”

“이리 와봐.”

귓속말을 하려는 듯이 테이블 위로 상체를 숙이는 그를 보고 신라는 재빨리 얼굴을 내밀어 그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녀의 귓가에서 잠시 뜸을 들이던 신후는,

쪽-

그녀의 뺨에 입만 맞추고 다시 상체를 세웠다.

“이렇게 해야 떨어져 나가는 것들.”

“……”

신라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작게 웃은 신후는 웨이터를 불렀다. 화를 낼 타이밍을 주지 않는 신후 때문에 신라는 달아오른 뺨만 문지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식사에 집중하던 신후는 문득 떠올랐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꿈에서 봤다는, 나와 닮은 기운을 가진 자는 잠에서 깼을 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야?”

“‘봤다’기 보다는 그냥 ‘목소리만 들린다’라는 수준이지만요…. 귀신들에게 그대로 노출되었던 시기에는 곧잘 목소리로 위기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곤 했었는데, 요새는 아니에요.”

그 말을 듣고 신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근처에 있으면 네가 목숨을 위협당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이상함을 느낀 신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누구인지 짐작되는 자가 있는 거예요?”

“글쎄. 그걸 알아보려고.”

“설마….”

갑자기 포크를 내려놓으며 사색으로 질리는 신라를 보고 신후가 의연하게 물었다.

“설마 뭐?”

“그자가…. 아니…겠죠?”

왠지 모르게 친숙하게 느껴졌던 그 존재가 어쩌면 신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뒤늦게 떠올린 신라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나가던 웨이터가 그녀의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와 괜찮냐고 물을 정도였다.

신후는 그의 호의를 적당히 거절해 돌려보내고 잠시 신라의 옆으로 건너와 앉았다.

“떨고 있어. 괜찮아?”

“…마, 많이… 눈에 띄어요?”

“주위 눈은 신경 쓰지 마. 어차피 한 번 보고 안 볼 인연들이야.”

“강한 존재라는 건 어렴풋이 느껴졌었어요.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니 그자가 신들 중 하나라고 한다면 상황이 맞아떨어져요….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괜히 날 도와줬을 리가 없잖아요.”

“……”

“그런데 그자가 신이라면…. 왜 당신과 그렇게 닮은 기운을 가지고 있을까요….”

힘없이 중얼거린 신라는 떨림을 견디지 못하고 신후의 손을 꽉 잡았다. 더이상 식사가 곤란한 상태라고 판단한 신후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레스토랑에서 빠져나갔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온 동주와 서영, 그리고 우선과 태인은 저녁 식사를 하기 전까지 거리의 오락을 즐기기로 했다.

처음 찾아 들어간 곳은 여러 가지 놀거리들이 집합해 있는 오락실이었다. 인형 뽑기, 게임기, 다트, 동전 노래방 등 그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좀비들을 쳐부수는 총싸움을 할 때는 리얼한 화면을 보고 태인을 구하러 달려든 그녀의 경호원들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좀 더 넓은 거리로 나아가 거리 음악가들의 버스킹 연주를 듣고 있던 중, 갑자기 표정을 굳힌 우선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동주의 곁으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눈치챘어?”

마찬가지로 표정이 사라져 있던 동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도 방금 느꼈어. 하나, 둘… 적어도 다섯은 되는데.”

“태인이 경호원들이 늘어난 줄 알았는데, 살기가 너무 강해. …경호원들도 나한테 종종 살기를 뿜어내긴 하지만.”

“큭큭. 어쨌든 이쪽에서 먼저 선수 쳐 볼까? 표정이 기대되는데.”

음악에 심취한 듯이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면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움직인 동주는, 바다의 내음을 풍기고 있는 수상한 자의 어깨를 덥석 움켜쥐었다. 그러자 사내가 움찔 놀라며 그를 노려봤다.

“뭐, 뭐냐!”

“저기요. 육지에 처음 나들이 온 게 너무 티 나시는데요.”

“무, 무슨 소리야! 재수가 없으려니까!”

어디론가 도망치려는 남자를 강하게 붙잡아 세운 동주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다시는 바다 공기… 아니지, 바닷물 못 쐬게 될 줄 알아.”

“큭….”

“뭘 노리고 있는 거지? 태인인가? 네놈들 태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지?”

일이 수틀렸다고 판단한 남자는 어디론가 급하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갑자기 거리에 바다 내음을 풍기는 강한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연주를 하던 음악가들과 구경꾼들이 놀라서 혼비백산 달아날 정도였다.

“내 뒤로!”

우선이 태인과 서영을 뒤쪽으로 숨기며 보호했다.

‘이 돌풍은…’

바다의 기운을 눈치챈 태인이 주변의 경호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숨어 있던 경호원들이 달려 나와 적들을 포위했다.

“이건 분명 서해(西海)의 기운이야.”

태인이 우선의 등 뒤에 숨은 채 중얼거렸다. 우선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서해? 서해라면….”

“서역의 바다! 아주 예의 없는 자들이라서 우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게다가 거기에 오만방자한 왕자 녀석이 있는데…”

그때 돌풍의 중심에서 홀로 여유롭게 걸어 나온 남자가 우선과 태인의 앞에 섰다. 그는 기다란 금발을 하나로 묶고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 관광 온 외국인처럼 보였지만, 풍기는 기운은 분명 바다의 것이었다.

“‘오만방자’라니, 너무하십니다. 태인 공주.”

남자는 한쪽 팔을 등 뒤로 감추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짚은 서양식 자세로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당신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니 반가운 일이군요. 그래도 한때는 명색이 ‘약혼자’였던 사이이니까요.”

그 말에 우선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우선과 눈이 마주친 서해의 왕자는 일부러 그를 도발하려는 듯이 조소를 내지었다.

“요즘 하도 지상에 자주 놀러 다닌다길래 뭐가 있나 해서 찾아와봤더니, 고작 인간 남자에게 정신이 팔렸었던 겁니까? 콧대 높은 줄로만 알았더니 별 볼 일 없군요.”

서영이 발끈해서 나서려 하는 것을 동주가 겨우 말려 세웠다. 태인의 상태가 괜찮은지 먼저 확인한 우선은 표정 없는 얼굴로 사내를 바라봤다.

“그러는 그쪽도, 약혼자‘였던’ 여인한테 미련 못 버리고 몰래 뒤나 쫓아다니는 걸 보면 꽤 할 일이 없는 위치인가 봐.”

“…큭.”

남자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우선은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했다.

“내가 태인에 비하면 ‘고작’ 인간 남자인 건 맞지만, 그쪽보다 한심하진 않은 것 같은데. 적어도 붙잡고 싶은 여자를 만나러 갈 때 그렇게 요란하게 몇 명씩 데려가지는 않거든.”

본격적으로 험악하게 변해가는 분위기에 동주는 휘파람을 불었다. 우선은 먼저 싸움을 거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누군가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계속되는 돌풍에 주위에 일반인들은 어느 정도 사라져 있었다. 아는 자들만 느낄 수 있는 육지의 요기와 바다의 요기가 충돌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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