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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장. Forget Me Not (106/126)

105장. Forget Me Not

오랜만에 여유롭게 출근 준비를 하는 아침이었다. 매일 신후의 출근 시간에 맞추느라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재촉했던 모양이다.

신라는 집에 놓인 화분에 물을 주고 보조배터리까지 챙기고서야 현관으로 나갔다. 신후는 오전에 들를 곳이 있어 먼저 집에서 나간다고 했다.

딩동-

혼자서 출근하는 줄만 알았는데, 신후 대신에 누군가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쿵쿵!

투박한 노크 소리까지. 어리둥절한 그녀는 인터폰을 통해 바깥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화면 안에는 다름 아닌 건우가 서 있었다.

“선배! 선배가 왜…”

황망히 문을 열며 소리치던 신라의 입이 천천히 멈췄다. 건우의 손에 꽤 커다란 꽃다발이 들려 있었던 것이다.

‘와….’

신라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은 건우가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 내가 준비한 거 아니야.”

“그럼… 교수님이요?”

“뭐, 그랬겠지. 문밖에 놓여있더라고.”

“진짜, 못 말려….”

신라는 붉어진 얼굴로 건우의 손에서 꽃다발을 가져왔다. 집에 대충 놓고 나오려는 그녀의 동태를 보고 피식 웃은 건우가 말했다.

“금방 시들 테니까 그냥 들고나와. 연구실에 빈 병 많으니까 꽂아두면 더 오래 살 거야.”

“네….”

신후의 부탁으로 신라를 데리러 온 건우는 그녀를 연구실 차에 태우고 학교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아 무릎에 꽃다발을 올려둔 신라는 민망함에 입술만 꾹 깨물고 있었다. 선배를 운전사로 쓰는 것도 모자라 이런 낯간지러운 현장마저 들켜버렸으니,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 숨고만 싶었다.

“물망초네. 예쁘다.”

건우가 꽃다발을 슬쩍 보며 말했다.

“물망초요?”

“겨울에 물망초를, 그것도 꽃다발로 주다니. 취향 참 특이하시다니까.”

“그러게요….”

신라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꽃을 매만지며 작게 미소 지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웃어라.”

건우의 말을 듣고 신라의 고개가 그의 쪽으로 틀어졌다.

“네?”

“죽상인 것보다는 훨씬 낫다.”

“…제가 그렇게 죽상이었어요?”

“누가 보면 교도소 끌려가나 싶었을 거야. 박혜령이 봤으면 내 멱살부터 잡았을걸.”

“윽….”

“교수님이 부탁 안 하셨으면 내가 자청해서 데리러 왔을 테니까 너무 부담스럽다고 느끼지 마.”

“감사합니다.”

운전에 집중하던 건우는 꽃다발을 한 번 더 쳐다봤다. 이제 막 정식으로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의 모습은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다만 걱정인 건 서로에게 집중하다가 다가오는 위협에 대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적이 한 걸음 물러섰지만 분명히 우리가 방심한 틈을 노리고 있을 거야.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네가 맡았다는 걸 명심해. 교수님은 최대한 네가 마음 졸이지 않도록 많이 신경 써 주고 계시지만, 정말 그때가 닥쳤을 때 적어도 겁을 집어먹고 우왕좌왕하면 안 되잖아.”

건우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아는 신라는 수긍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잠깐의 행복에 취해 경계심이 흐려지면 안 됐다. 더이상 적에게 몸도 정신도 제멋대로 휘둘리는 것은 사양이었다.

“비형랑은….”

건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자는 집요해. 한번 갖고 싶은 게 생기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본인 것으로 만들지. 시간이 얼마가 들든 상관없어. 오히려 서서히 옥죄어 와서 어느 순간 자신의 손아귀에 있도록 교묘하게 상황을 조작해. 도깨비의 우두머리인 날 얻기 위해서 오랜 시간 성군인 척을 했어. 그 연극에 속아 넘어가 잠깐이나마 충성했을 정도로.

그러니 널 얻기 위해서 그간 어떤 연극을 벌였을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 잠깐 마주친 우리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으니까.”

“……”

신라는 친절한 동네 의사로 다가왔던 지난날의 강 현의 모습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학교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건우는 잠시 신라의 상태를 살핀 후 말을 계속했다.

“물론 인간으로 환생해서 수십 년간 인간을 관찰하고 그들의 내면에 파고드는 삶을 살았으니 옛날과 달라진 점은 있을 거야. 오랜 세월 지하 세계에 붙들려 문초를 당하는 사이 사고관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본질은 같아. 그자는 본인의 욕망을 멈추지 못할 거야. 원하는 자를, 원하는 세상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기 전까지는.”

“네. 명심할게요.”

학교 주차 공간에 차를 세운 뒤, 건우는 쓰게 웃었다.

“미안하다. 그자가 우리 주변에 있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아챘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야. 네 마음이 조금씩 잠식당할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아니에요. 자책하지 마세요.”

신라는 건우의 손등에 손을 얹어 진심을 전했다.

“선배들은 항상 최선을 다하셨어요. 제가 이 정도로 단단해질 수 있었던 건 모두 연구실 분들 덕이었어요. 그러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 거예요.”

“그래.”

“선배한테는 제 목숨도 빚졌었죠. 추병귀에게 끌려가는 절 구해주셨잖아요. 그러다가 납치돼서 험한 일도 당하셨고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어. 붙잡혀 간 건 옛 악연 때문이었고. 빚졌다고 표현하지 마.”

신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하고자 하는 말을 망설였다.

차의 시동을 끈 건우는 먼저 운전석에서 나갔다. 그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신라를 위해 해준 말들이지만 부담을 지운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조수석에서 뒤따라 나온 신라가 평소보다 좀 더 큰 목소리로 얘기했다.

“선배!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요?”

건우는 돌아서서 신라를 가만히 응시했다.

“해.”

“선배라서… 선배만 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아서요.”

신라는 손에 든 꽃다발을 꽉 움켜쥐었다가, 감정을 추스른 뒤 건우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만일 제가 저로 있을 수 없게 된다면, 그래서 우리 중 누군가 죽을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저를….”

그다음 말을 짐작한 건우의 미간이 점차 좁아졌다.

“저를 망설임 없이 죽여주세요.”

건우는 점심을 거르고 홀로 사학과 건물 발코니로 나가 난간에 기대서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담배 한 개비가 끼워져 있었다. 신라의 말이 계속해서 뇌리에 맴돌아 머리를 식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불을 붙였다. 중국으로 출장을 다녀온 이후 처음 피우는 것이었다.

“그래…. 그런 부탁이라면 다른 녀석들이 들어줄 리가 없지. 본인을 희생해서 비형랑이 더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게 만드는 선택지도 이미 만들어 둔 거네. 똑똑해, 우리 학부 연구생….”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불쌍한 건가.”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마땅히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는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떨어뜨려 발로 지르밟은 다음 살기 어린 눈빛으로 뒤쪽을 돌아봤다.

“안 그래?”

아무도 없는 복도 한가운데에 강 현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선 그는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미동도 없이 건우를 응시했다.

“유신라가 그렇게 말했어?”

“그런 애인지 모르고 그딴 저열한 주술을 걸었다고 해보시지.”

“내가 선택한 게 아니야. 그저 다른 이의 영혼이 조금 필요하다고 들었을 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유신라의 혼의 조각이 내 영혼과 합쳐져 있었어.”

“바라던 일이었겠지.”

“글쎄…. 그랬을지도 모르지.”

건우는 금방이라도 강 현을 향해 덤벼들려는 자신의 다리를 애써 억눌렀다. 차라리 그의 혼이 빼앗겼던 거라면 일이 훨씬 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악한 존재를 이 손으로 직접 죽이고 함께 사라지는 깔끔한 결말을 내버렸다면, 지난날의 과오를 모두 잊고 편히 잠들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강 현이 무감정한 얼굴로 말했다.

“유신라는 나와 함께 있어야 해. 서로 혼을 나눠 가진 채 오래 떨어져 있으면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장담 못 해.”

“웃기는 소리 마. 지금 둘이 같이 있다간 둘 다 죽어.”

“아는 얘기야. 신이 유신라를 도구로 쓰기로 했다지? 그들도 참 잔인해. 겉으로는 자비로운 척 굴어도 결국 본인들의 희생은 눈곱만큼도 허용하지 않지. 그런 면에서 내가 유신라를 원하게 된 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 진심으로 지켜주고 싶거든. 운명의 굴레가 끊겨버린 불행으로부터, 신으로부터, 무엇으로부터든.”

“예나 지금이나 본인 좋을 대로 해석하는 습관은 여전하군.”

강 현은 어렴풋이 웃었다.

“인정해야지. 내가 죽으면 유신라가 죽어. 어느 쪽에 있는 게 그녀한테 좋은 결말일까?”

건우는 주먹 쥔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 애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스스로를 잃는 거야. 나한테 그때가 오면 죽여달라고 했을 만큼. 그러니까 되도록 그 애한테는 접근하지 말란 말이야!”

“걱정하지 마. 나도 유신라가 아닌 다른 존재한테 죽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강 현에 건우는 결국 이를 악물며 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때마침 둘 사이에 있는 계단으로 걸어 올라오는 행인 때문에 두 걸음도 채 못 가 멈춰 섰다. 그 사이 강 현은 조용히 돌아서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크윽…!”

분노를 참아내지 못한 건우는 결국 주먹으로 바닥을 힘껏 내리쳤다. 돌로 내리쳐도 꿈쩍없을 대리석 바닥에 균열이 가고 찢어진 살갗에서 피가 흘렀다. 그는 울분에 찬 숨을 내쉬며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 * *

신후는 점심 직후 사무실에 도착했다. 식사를 마친 조교들과 신라는 바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뒤늦게 연구실로 조용히 들어오는 건우를 훑어본 혜령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밥 안 먹고 뭐 했어?”

“그냥 바람 좀 쐤어.”

“손은 뭔데?”

분명히 오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건우의 모습을 보고 다들 의아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건조하게 답하며 본인 자리에 앉는 건우를 보고 신라는 복잡한 표정을 했다. 그런 신라를 눈치챈 건우가 일부러 피식 웃었다.

“밥이 맛이 없었어? 표정이 왜 그래?”

“…괜찮으세요?”

“다이어트 중이야. 신경 쓰지 마.”

모두가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때 교수실 문이 열리고 신후가 모습을 비췄다.

“분위기가 왜들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건우가 노트북을 열며 짐짓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을 신호로 다른 조교들도 각자 본인 업무에 착수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신후는 습관적으로 신라의 자리부터 쳐다봤다. 그녀와 눈인사를 나눈 후 그의 시선이 바로 위 선반에 고정됐다. 살짝 비틀리는 눈썹에서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저 꽃다발은 뭐지?”

그 소리에 신라와 건우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교수님이 신라한테 준 거 아니셨습니까?”

건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눈가를 찌푸리기는 신후도 마찬가지였다.

“장미도 아니고, 물망초를? 왜 누가 준 지를 모르지?”

“그야….”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신라가 어두운 표정으로 꽃다발을 선반에서 꺼내 들었다.

아까 전 알아본 것이었다. 물망초의 꽃말은,

‘Forget me not(나를 잊지 마세요)’

“현관 앞에… 놓여있었으니까요.”

강 현. 그밖에 없었다.

신후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신라에게 걸어와 꽃다발을 가져갔다.

“잊지 말아 달라….”

그가 세게 움켜쥔 곳으로부터 어둠의 기운이 흘러나와 꽃다발 전체를 집어 삼켜버렸다. 꽃잎 하나조차 흔적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신라의 가라앉은 눈빛이 꽃다발이 있었던 곳에 머물러 있었다.

“저랑 잠깐 얘기 좀 하시죠.”

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신라를 한 번 더 눈에 담은 신후는 건우와 함께 교수실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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