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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장. Temperature (105/126)

104장. Temperature

“이, 이게 다 뭐야.”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신라는 거실 한가득 늘어져 있는 쇼핑백들을 보고 경악했다. 핸드백부터 시작해서 드레스, 외투, 화장품 등등 종류 불문하고 모두 선물처럼 포장되어 있는 것이다. 쇼핑백에 있는 백화점 로고와 물건들을 보면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뻔할 뻔 자였다.

- 난 오늘 너한테 해준 것들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되는 남자야.

- 순진해서 귀여웠어. 정말 다 사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아쉬울 정도로.

- 오늘 받은 것들이 혹시 부담스럽거든 얼른 돈 벌어서 다른 선물로 돌려줘. 기대할게.

“어쩐지 몇 번을 강조하더라니…. 이 정도로 사 놓고 뭘 더 사 주겠다고 한 거야!”

그녀는 자신의 물욕(?)을 탓하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한신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게 바보였다. 또다시 신후와 설전을 벌일 생각을 하니 머리가 다 아파 왔다. 쇼핑백들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에 손을 튕겼다.

‘고민할 거 없지. 몰래 반품하면 돼.’

“안 돼.”

타이밍 좋게 들려온 목소리에 신라는 흠칫 놀라서 현관 쪽으로 돌아섰다. 어느새 집으로 들어온 신후가 눈썹을 비튼 채 벽에 기대 서 있었다.

“택 이미 제거된 거야. 포장할 때 떼라고 했거든.”

“네!?”

“다 네 거야. 갖고 싶어 했잖아.”

“그거야, 잡귀들을 유인하려고 이것저것 억지로 눈독 들인 거죠! 가격은 생각도 안 하고 본 거란 말이에요.”

“그래. 순수하게 갖고 싶은 것들만 본 거 알아. 그래서 가격대가 비싼 것부터 싼 것까지 다양하더군. 다 너한테 어울리는 것들이라 내 마음에도 들어.”

“하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신후는 다가와서 파란색 원피스부터 집어 들고 신라의 몸에 대 보았다.

“잘 골랐어. 이건 나랑 모임 같은 거 나갈 때 입어. 코트는 나중에 사 줄게.”

“…이건 얼마짜리예요?”

“저 백팩은 지금 당장 써도 되겠네. 들고 다니는 가방 많이 해졌잖아. 그리고 저 핸드백은 자칫 된장녀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필요할 때만 들어. 예를 들면 괜찮은 모임이라든지, 경조사라든지.”

“도대체 얼마길래요!”

“다 합쳐도 내가 한 달만 일하면 되는 액수야. 너한테 죄지은 게 얼마인데 이 정도도 보상 못 하게 할 거야?”

“…이제 본인 약점까지 일부러 들먹이시겠다? 교수님 거짓말 안 한다면서요. 외근이라는 거 다 뻥이었죠? 실은 그냥 데이트한 거 아니에요?”

갑자기 코앞으로 다가온 신후가 허리에 손을 둘러서, 신라는 뒷걸음질 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열심히 그의 팔을 풀어보려고 애써 봤지만 작정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안아올 뿐이었다. 약이 오른 신라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입김으로 불어 넘기며 그를 흘겨봤다.

신후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맞아, 데이트. 외근 겸 데이트였지.”

“저 놀리는 게 재미있죠?”

“그건 연구실 사람들이 다 알아.”

“후….”

“농담이고, 놀린 거 아니야. 어떻게 하면 네가 거절 안 하는 선에서 해주고 싶은 걸 다 해줄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어. 이건 사실 내 욕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잡귀들은 왜 당신 물욕을 못 보고 지나치는 걸까요? 여기에 이렇게 흘러넘치고 있는데.”

“내 근처에 왔다간 뼈도 못 추리니까. 물론 네 근처에도. 화비를 시켜서 그렇게 소문을 내놨어.”

“못 말려….”

신후는 고개를 살짝 숙여 신라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그래도 다행이야. 늦게나마 데이트라는 걸 알아채서. 둔한 게 귀엽긴 한데 앞으로는 빨리 알아채 줘.”

“약 오르니까 그만 해요.”

“언제 이름으로 부를 거야?”

“그건 무리예요.”

“왜? 애인을 이름으로 안 부르면 뭐라고 부를 거야?”

아무리 사귀게 됐어도 한신후는 교수였다. 그것도 학부 연구생으로 소속되어 있는 연구실의 지도교수. 외국도 아니고, 스승을 이름으로 부르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교수님’이 편해요. 그렇다고 제가 친구처럼 한신후 씨, 한신후, 이렇게 부를 수는 없잖아요. 엄연히 교수님인데.”

“둘만 있을 때도 직분을 따져야 해?”

“어색해요. 조금만 천천히 하면 안 돼요?”

“그럼 오빠는 어때? 아니면 자기?”

“더 싫어요! 저희가 오빠 동생으로 만났어요?”

“너무 질색하지 마. 상처받아. 훗, 알았어. 당분간은 편한 대로 해.”

“감사합니다.”

겨우 진정이 돼서 맥 빠진 숨을 내뱉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뺨에 살짝 입 맞췄다. 멍한 표정이 귀여워 자기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자꾸 기습적으로 스킨십 하실 거예요?” “네가 안 해주잖아.”

“네. 앞으로 제 마음에 안 드는 모습 보이면 절대로 안 해줄 거예요.”

“아. 들었던 것 중에 제일 무섭네.”

신라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킨십을 무기로 쇼핑백들을 반품시키라고 할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 * *

신후가 연구실 사람들에게 연애 사실에 대해 털어놓은 뒤로 신라는 연구실에 있는 것 자체가 왠지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다들 티를 안 내려고 노력은 하지만 분위기 자체에 어색한 기류가 끼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서영이 점심시간 즈음 연구실을 찾아왔다. 동주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수줍게 동주의 곁으로 다가와 인사한 서영은 어쩐지 평소와 다른 연구실 분위기를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했다.

“동주 오빠. 혹시 연구실에 무슨 일 있었어요?”

동주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아니, 별일 없어.”

“그런데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네요.”

마냥 발랄해 보여도 어떨 때는 이렇게 정곡을 찌를 줄 아는 서영이었다. 연구실을 둘러보던 서영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신라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색하며 손뼉을 쳤다.

“어! 알았다. 신라 너 교수님이랑 결국 사귀기로 했구나!”

악의라고는 단 1프로도 들어 있지 않은 외침에 모두들 할 말을 잃고 굳어버렸다. 본의 아니게 정적을 만든 서영이 민망한 얼굴로 입을 가렸다.

“설마 제가 말실수 한 건가요…? 딱 그거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 건우가 의자를 등으로 젖히며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야,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얼어있냐, 우리? 교수님이 신라한테 목매는 건 애초에 다들 알고 있었잖아. 둘이 사귀는 건 사실 시간문제였지.”

동주도 너털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사실 우리끼리는 대놓고 축하해주는 게 맞죠. 교수님은 어렵게 그 감정을 되찾으신 거니까.”

그때 혜령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 난 순수하게 ‘축하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서 가만히 입 다물고 있었던 거니까.”

건우가 대충 손을 까딱이며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예, 예. 그러시겠죠.”

“뭐야, 그 빈정거림은? 네 생각에는 신라가 한신후한테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걸 고민한 네 시간을 아까워해 주마.”

“우씨!”

혜령이 건우에게 달려들어 구레나룻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연구실에 간만에 소란이 일어났다. 곤란한 표정으로 두 사람 근처에서 서성이는 신라에게 다가온 우선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놔둬. 저러고 밥 먹으면 싸운 것도 까먹는 거 잘 알잖아.”

“…그렇긴 하죠.”

“부끄러운 건 이해하는데 기죽어 있을 필요는 없어. 둘이 사귄다고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아. 너도 평소처럼 행동하면 돼.”

“네. 감사합니다.”

“축하한다. 돌아 돌아 결국 만났네, 두 사람.”

신라는 민망함에 입술을 깨물며 다른 곳을 쳐다봤다. 우선도 어딘가 민망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두 사람이 이뤄지길 바라지 않았었어. 정확히 말하면 교수님이 그 감정을 욕심내지 않길 바랐지. 신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

“하지만 이왕 말 안 듣고 저렇게 된 거, 네가 곁에서 잘 단속해줘. 또 섣부른 행동 못 하게.”

“네. 그럴게요.”

우선은 웃으며 신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얼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일어난 건우가 모두에게 말했다.

“같이 밥이나 먹으러 나가자. 박혜령이 쏜대.”

“조건우가 쏜대.”

동시에 똑같은 소리를 내뱉은 혜령과 건우의 2차전이 벌어졌다. 그걸 보고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소란스러운 와중 교수실 문이 열리고 신후가 걸어 들어왔다.

“밥 먹으러 가자.”

혜령이 반색하며 외쳤다.

“어! 교수님이 쏘시는 건가요?”

“아니.”

“네?”

눈빛을 부드럽게 만든 신후가 신라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나가자. 맛있는 거 먹으러.”

목소리에도 왠지 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조교들은 닭살이 돋고 말았다.

“대박….”

눈앞에서 한신후 교수의 연애 모드를 목격한 서영은 입까지 틀어막으며 동주를 찰싹찰싹 때렸다. 왠지 질투가 난 동주는 서영의 두 손을 수갑 채우듯이 붙잡아버렸다.

손을 붙잡혀 복도로 끌려 나오다시피 나온 신라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억지로 손을 빼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방학인데 누가 있다고 그래.”

“다른 연구실 사람들도 있고, 교수님들도 계시잖아요.”

“혹시 내가 부끄러워?”

“네?”

“박 조교가 하는 말 들리던데. 내가 너한테 한참 모자란다는 식으로 말했잖아. 나이 때문인가? 하긴, 반올림하면 열 살 차이니까 좀 많긴 하지.”

‘저게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신라는 기가 차서 한숨을 내뱉었다.

“그건 전적으로 혜령 선배 입장이고요. 보통은 교수님을 아까워하지 않을까요?”

“보통은 그렇겠지.”

“그럼 저 또 놀리신 거죠?”

“아니. 나도 전적으로 내 입장에서 생각한 거야.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너랑 어울리는 남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거든. 나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어떡한다. 그래도 남들보다 좀 오래 사니까 그걸로 봐줘.”

“……”

넋이 나간 사이 다시 그에게 손이 붙잡혀 이끌려가고 말았다. 신라는 결국 웃어버렸다. 한신후에게 남들의 기준 따위는 결국 중요치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는 두 사람이 가장 중요했다.

‘그에 비해 내 걱정은 우리 둘을 위한 게 아니었네.’

신라는 덤덤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걱정한 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한신후와 사귀게 된 걸 또래 학생들이나 다른 교수들이 알면 분명 학교 전체가 발칵 뒤집어질 것이었으니까.

물론 서로 싱글이니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에 염문설이라니, 입방아에 수도 없이 오르내릴 게 뻔했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쯤, 신경을 끄면 결국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귀신을 볼 줄 알았던 그녀는 이미 주위의 이질적인 시선들을 많이 겪으며 자라기도 했고 말이다.

“수긍한 얼굴인데?”

신후가 신라의 표정을 살피며 넌지시 말했다. 막무가내로 굴긴 했지만, 그녀의 마음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신라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대신 학기 중에는 안 돼요.”

“훗. 그래.”

“그리고 오늘 밥은 제가 사게 해주세요. 염치가 있으니까요.”

“흠….”

“교.수.님.”

“좋아. 허락하지.”

약이 오른 신라는 그의 손등을 꼬집어버렸다. 아픈 척을 해줘야 하냐고 진지하게 묻는 신후 때문에 더 약이 올랐지만 말이다.

한편, 두 사람을 빼고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나간 연구실 사람들은 나름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서영 가까이에 반찬을 놔 주는 동주를 보고 혜령이 부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좋~을 때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아니니?”

그 말을 듣고 서영이 뺨을 붉히며 민망해했다.

“뭘요, 동주 오빠가 훨씬 멋있는걸요….”

“에이. 연애는 마음으로 하는 거야. 그리고 내 눈에는 여자 쪽이 무조건 예뻐 보이니까.”

건우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럼 교수님이랑 신라도, 여자 쪽이 무조건 아까웠던 거냐?”

“그렇기도 하고. 한신후는 좀 능글맞잖아. 순진한 신라가 아까워.”

“참나….”

그녀의 남다른 기준을 듣고 다른 조교들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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