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장. 데이트
올해의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찾아왔다.
늘 그렇듯이 대학원 연구실에 방학이란 것은 없었다. 대학원생들은 논문 게재와 졸업을 향해 끊임없이 달리는 외로운 경주를 하는 이들이었으니.
하지만 자주 사무실을 비우는 한신후 교수 덕에 고고학 연구실 조교들은 뜻하지 않은 방학 기분을 맛보게 됐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의자를 한껏 뒤로 젖혀 눕다시피 한 건우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심각하게 고민하던 우선이 책상을 내리쳤다.
“그렇게 가볍게 말할 문제가 아닌 거 알잖아요.”
“넌 선생님 안 되고 연구실에 처박혀서 뭐 하냐? 그렇게 지켜야 할 거 따박따박 지키면서 살기에는 선생이란 직업이 최고인데.”
“안 그래도 졸업하면 그럴까도 생각 중이긴 한데… 이게 문제가 아니고. 다름 아닌 신이 내린 벌이라고요. 저렇게 멋대로 숨겼다 되찾았다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그때 연구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큰 목소리가 울렸다.
“뭘 들켜-!”
그는 다름 아닌 지국천왕의 사자 최준성이었다. 화비도 폴짝 뛰어 연구실 안으로 뒤따라 들어와 동주의 무릎 위에 안착했다. 얼굴이 사색으로 질린 우선이 자리에서 솟구쳐 일어나며 고개를 냉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 뭘 멋대로 숨겼다 되찾았다 했다는 거지?”
“그, 그건… 그게 아니고….”
점점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는 준성 때문에 우선은 벽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한신후에 대한 얘기 같은데? 맞지?”
“아, 아닌…데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얘기해야지, 민우선 씨.”
등은 벽에 닿고, 고개는 돌아가지 못하게 턱이 붙들리자 우선의 눈동자가 바쁘게 위아래로 굴러갔다.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신후가 무언가 감췄다…. 신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게…!”
“신들에게 숨길만 한 것이라….”
“오늘은 촬영 스케줄… 없으신가 봅니다.”
우선이 애써 다른 화제로 말을 돌리려 해봤지만 준성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한신후가 숨길만 한 게 뭘까.”
“드라마가 잘 나가던데, 이 시간에 대본을 몇 자 더 들여다보시는 게 앞으로도 인기가 상승하는 데 도움이…”
“설마 사랑의 감정?”
우선의 입이 뚝 멈췄다. 다시 한번 얼굴이 사색으로 변하는 것이 완전히 거짓말탐지기 수준이었다. 그 안쓰러운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던 준성은 이내 참았던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풉…! 큭큭…큽….”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우선의 눈에 대뜸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 자가 갑자기 미쳤나, 원래 신의 사자들은 다 사이코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왜… 웃는….”
“아니, 한두 세월 산 게 아닐 텐데 순진한 게 귀여워서.”
“예?”
“내가 상대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는 거 몰라? 숨겨도 어차피 들통 날 일이었어.”
“…그, 그럼….”
“이미 알고 있어. 한신후가 모든 감정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그 말에 다른 조교들의 눈빛도 심각해져 버렸다. 그들의 반응을 둘러본 준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오해는 마. 한신후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국천왕께서 눈감기로 하신 일이기 때문에 가만히 입 다물고 있었던 거야.”
“그게 무슨…. 지국천왕께서요?”
우선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준성은 우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후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대본 더 안 봐도 되겠지? 고대의 기억을 갖고 있는 자들을 속일 정도로 내 연기 실력은 이미 출중하니까.”
“그럼 교수님의 속죄는…”
“아, 물론 지국천왕을 제외한 나머지 신들께서는 모르는 일이야. 그분들은 아직 한신후가 사랑을 되찾지 못한 채 반 인간으로서 아등바등 살기를 바라고 있지.”
우선의 표정이 다시 가라앉았다.
“역시 그렇군요….”
“그런데 한신후가 이상한 소리를 했어.”
“무슨 소리요?”
“신과 얘기를 하고 싶다는 둥, 개인사니까 알면 안 좋을 거라는 둥…. 궁금해서 생각을 엿보려고 했더니 그사이에 교묘하게 다른 생각으로 갈아타더군. 눈치는 빨라.”
“그러고 보니…”
우선은 수개월 전 신후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널 불안하게 만들 생각은 없으니 한 가지만 말해줄게. 내가 죄를 지은 것은 맞아. 인정했기 때문에 환생하는 것에 동의했지. 하지만 그들의 뜻에 완전히 따른 것은 아니었어.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들이 당신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요?
- 신도 내게 죄를 지었거든.
‘개인사라는 게 그 얘기인가?’
우선의 생각을 읽어낸 준성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다른 조교들은 각자의 생각에 빠진 두 사람을 보고 어색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 * *
“근무 시간에 백화점은 왜 오신 거예요?”
신라가 신후와 보조를 맞춰 걸으며 물었다. 방학이 되자마자 외근을 핑계로 공원이며 한강이며 차를 끌고 나와 잡귀나 없애고 다니던 그가, 이번에는 서울 도심에 있는 커다란 백화점으로 신라를 데리고 온 것이다.
“외근 나온 거야.”
“…거짓말. 저번에도 산책하고 주전부리로 배 채운 시간이 더 많았거든요?”
“너한테는 거짓말 안 한다고 했잖아.”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데요?”
“넌 손님인 척 매장 안을 돌아다니면 돼. 나는 그 틈에 멀찍이서 숨어 있는 요괴들을 파악하는 거지.”
“백화점에도 그런 게 있어요?”
“사람의 탐욕(貪慾)은 좋은 요깃거리거든. 검소한 너한테 애초에 그런 탐욕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그것들을 불러낼 수 있도록 노력해 보라고.”
왠지 자존심이 상한 신라는 그를 앞서 걸으며 말했다.
“저도 소유욕 정도는 있는 사람이거든요?”
먼저 명품 매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신라를 바라보며 신후는 즐겁게 웃었다.
백화점 내 모든 매장을 둘러보느라 진이 다 빠진 신라는 쉴 새도 없이 다시 신후의 손에 이끌려 차를 타고 근처의 호텔 레스토랑에 다다랐다. 메뉴판의 가격대를 보고 그녀가 경악하기 전에 신후는 빠르게 주문을 마쳤다.
“왜?”
굳어 있는 신라의 얼굴을 보고 신후가 눈가를 접어 웃으며 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물어보면 넘어갈 줄 아세요?”
“뭐가? 배고플 것 같아서 식당에 데려온 것뿐이야.”
“엄청 비싼 데 맞죠?”
“내 입맛에 맞는 몇 안 되는 식당이라서 그래. 맛있는 게 먹고 싶었거든.”
“입맛 한번 고급지네요….”
“나랑 함께 다니다 보면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맛없는 건 입에도 못 대게 할 거거든.”
“치….”
깔끔하게 플레이팅된 샐러드부터 시작해서 파스타, 스테이크 등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음식들만 코스로 서빙되어 나왔다.
부담스러워서 포크를 들기를 망설일 때마다 ‘안 먹으면 버리지 뭐.’하고 가볍게 얘기하는 신후 때문에 신라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음식들을 입에 넣어야 했다. 그런데 막상 먹어보니 그가 말한 대로 다른 곳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맛이라서 입안 가득히 퍼지는 황홀함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또 뭐 시켜줄까?”
“배불러요….”
“그럼 디저트는 아이스크림 어때?”
“좋아요.”
아이처럼 눈이 빛나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작게 웃었다. 그의 손짓에 종업원이 예쁜 컵에 담긴 아이스크림 두 개를 내왔다.
꽂혀 있는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떠 야무지게 입에 넣는 신라를 지켜보며 신후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신라는, 이내 입안에서 씹히는 단단한 것에 깜짝 놀라 그것을 손에 뱉어냈다.
“어?”
그것은 반지였다. 그것도 아까 액세서리 매장에서 가장 오래 들여다봤던. 그녀는 눈썹을 비틀며 신후를 쳐다봤다. 신후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내지으며 똑같은 반지가 끼워진 그의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해보고 싶었거든. 이런 이벤트.”
“…유치해요.”
“큭큭…. 그런 네 반응도 보고 싶었고.”
“반지가 엄청 비쌌던 것…”
“신라.”
신후는 신라의 손에서 반지를 가져가 휴지로 아이스크림을 닦아내 주며 말했다.
“말했잖아. 공수래공수거. 아낀다고 다음 생에 부가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난 이번 생이 마지막이야. 내가 일해서 번 것 정도는 내가 원하는 데 쓰게 해달라고.”
“……”
“오늘만큼 돈 번 보람이 느껴진 날이 없었어. 난 효도할 부모님도 안 계시잖아?”
누가 인문대 교수 아니랄까 봐, 설득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신라는 곧장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좀 부담스러워요.”
“천천히 할게.”
“꼭 비싼 걸 먹고 사야 하는 건가요? 사실 이 가격표는 보여주기식이잖아요.”
“난 너한테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것들만 해주고 싶어. 그런 것들이 비싼 걸 어떡해. 양질의 물건을 싼값에 구하겠다는 거야말로 그걸 만든 이들에 대한 모욕이지.”
“하지만….”
“가성비를 따지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싼 걸 선물해달라고 하는 건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행동이야. 앞으로 네가 입고, 사용하고, 먹는 모든 것들은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반영된 거니까.”
“그건…”
“내 능력이 모자라면 할 말이 없지만, 난 오늘 너한테 해준 것들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되는 남자야. 그러니까 선물 받는 모든 것들은 내 기준에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경제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면 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거야. 물론 그때 가서도 네가 나보다 더 벌지 않는 이상, 네 지갑이 열리는 일은 없을 테지만.”
싱긋 웃는 신후를 보고 신라는 결국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신후는 신라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첫 커플링이야. 마음에 들어?”
“마음에 당연히 들죠…. 제가 제일 유심히 본 걸 사 오셨잖아요.”
“네 눈빛은 정직하니까. 적당히 도발했더니 있는 힘껏 물욕을 끌어올리던데.”
“놀리지 말아요. 엄청 후회되고 있으니까.”
“순진해서 귀여웠어. 정말 다 사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아쉬울 정도로.”
신라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해주고 싶다는데 식사 한 끼와 반지 선물쯤 받는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예쁘긴 하다.’
약지에 자리 잡은 반지의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아무런 무늬 없이 심플한 은반지라 두 사람 모두에게 어울리는 것 같았다.
신후는 반지를 감상하는 신라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봤다.
“오늘 받은 것들이 혹시 부담스럽거든 얼른 돈 벌어서 다른 선물로 돌려줘. 기대할게.”
“두고 봐요. 교수님보다 성공할 테니까.”
“그러려면 같이 교수해야겠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먼저 조수석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어 주는 신후를 보고 신라가 어색하게 멈춰 섰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가끔 했잖아. 레이디 퍼스트.”
“교수님 매너 있는 거 잘 아니까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창피해요.”
“그만큼 네가 나한테 존중받고 있다는 거야. 익숙해져.”
“진짜 고집불통이야.”
“큭큭. 학교에서는 안 할게.”
“당연하죠!”
신라가 조수석에 앉길 기다린 신후는 안전벨트까지 손수 매주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인 채로 신라와 눈을 마주쳤다. 당황한 신라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갑…자기 또 왜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
“예쁘네. 누구 애인인지는 몰라도.”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하는 신후였다. 하지만 그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 뺨치게 잘생긴 것이 문제였다. 신라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시선만 겨우 피했다.
“얼른… 가요. 연구실로 복귀해야죠.”
“드라이브 더 하면 안 돼?”
“안 돼요. 더 이상은 직무유기예요.”
“내 연구실인데?”
“네. 안 돼요.”
부끄러워서 시선도 못 마주치면서 말투는 단호하기 그지없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작게 웃었다. 귀여워서 당장이라도 덮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보는 시선이 많은 공공장소였다.
“신라.”
“왜요.”
“키스도 안 돼?”
신라의 뺨이 더 달아올랐다.
“안 돼요.”
“뽀뽀는?”
“안 돼요.”
피식 웃은 신후는 신라의 턱을 잡고 기습적으로 프렌치 키스를 했다. 깜짝 놀란 신라가 밀어냈지만, 그 전에 조수석 문을 닫고 나간 신후였다.
“이럴 거면 왜 물어봤어요?”
신라가 운전석에 오른 신후를 째려보며 물었다.
“‘안 돼요’가 귀여워서 더 듣고 싶었어.”
“변태예요?”
“응. 너한테만.”
여유롭게 웃으며 차를 움직이는 신후를 보고 신라는 이마를 짚고 말았다.
신후의 낮은 웃음소리가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