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01장. 천생연분
102장. 이뤄지다
103장. 데이트
104장. Temperature
105장. Forget Me Not
106장. 닮은 기운
107장. 이브의 데이트_上
108장. 이브의 데이트_中
109장. 이브의 데이트_下
110장. 다시 다가오는 그림자
111장. 조우
112장. 신과의 거래
113장. A caged bird
114장. ESCAPE GAME
115장. Like a Doll
116장. 전해지기를
117장. 다가오는 전쟁의 끝
118장. 약속
119장. 따뜻한 겨울
120장. Happy Birthday To You
121장. 안녕
122장. 그 후
123장. 다시, 한국
124장. 거짓말 같은 일상
125장. 다녀왔어
101장. 천생연분
- 광철… 너에게 속죄를 마무리할 기회를 주러 왔다….
굵고 음산한 목소리가 숲길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기분 나쁜 귀기(鬼氣)가 온 사방에 진동했다. 웬만한 잡귀는 그 자리에서 먼지처럼 사라질 만한 수준이었다.
“그슨대….”
우선은 태인을 지키기 위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요기의 칼바람에 베인 등의 상처에서 피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육체의 고통쯤은 그에게 충분히 버틸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슨대의 강점은 유감스럽게도 다른 분야에 있었다. 그것은 우선과는 아주 상극인 것이었다.
“일어나면 더 힘들어질 텐데.”
중절모를 고쳐 쓴 그슨대가 웃는 얼굴로 우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갑작스레 시야가 현실이 아닌 풍경으로 가득 차, 우선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새까만 공간 속에 뜨거운 불씨가 여기저기서 피어났다.
환각이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을 정도로 선명하고 소름 끼치는 감각이 그의 오감을 지배했다. 화르륵, 불이 옮겨붙는 순서대로 그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곳은 바로 그가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단독 주택이었다.
“이…곳은…”
그때 검은 재가 가득 묻은 손이 그의 발목을 덥석 붙들었다. 깜짝 놀란 우선이 아래를 쳐다봤다.
- 우…선…아…. 엄마… 좀… 살려…줘….
“엄, 엄마.”
여인의 몸은 이미 다 타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선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살리기엔 늦은 그녀를 애가 타는 몸짓으로 붙들었다.
하지만 그가 붙잡는 부위마다 바스러져 버렸다. 손을 붙잡으면 손이 바스러져 사라지고, 얼굴을 붙잡으면 뺨의 일부가 바스러져 떨어져 내렸다. 더이상 어디에도 손을 대지 못한 그는 안타까움에 머리칼만 쥐어뜯었다.
“아… 안 돼….”
- 네가 그런 거야.
재로 뒤덮인 여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 네가 그런 거야. 우선이 네가 우리를 죽였어.
“엄…마….”
그의 아버지도 새까맣게 타들어 간 몸으로 비틀대며 다가왔다.
- 민우선… 네가 우리를 태워 죽였어. 바로 네가!
“아버지….”
- 너도 같이 죽자. 우리가 아니면 널 데려갈 사람이 없잖니? 신께서 죄를 외면한다 해서 너 자신도 너의 죄를 외면할 셈이냐?
그 말에 뒷걸음질 치던 우선의 발이 멈추고 말았다.
두 명이 동시에 우선의 발목을 붙들었다. 바닥이 끈적이는 검은 늪으로 변하고, 우선도 함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우선에게 더는 저항의 몸짓이 없었다.
“이걸로… 된 걸지도 몰라.”
가슴팍까지 차오른 검은 늪에, 그는 빠져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를 끝끝내 붙들고 늘어지는 부모님의 원혼의 환상을 차마 떼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이질적인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눈 떠.
- 눈 뜨라고!
‘누구지….’
- 내 말 안 들려? 이 바보야!
‘넌 누구야?’
우선은 시끄럽게 귓가를 어지럽히는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멀리서 들리는 환청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점차 뚜렷하게 존재감을 잡아갔다. 그리고 이윽고 어떤 소리보다도 가장 지척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되었다.
“…떠. 눈 떠.”
이제는 정말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는 감았던 눈을 조용히 떴다. 태인이 그의 뺨을 감싸 쥔 채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태인 님…?”
“정신이 들어?”
우선은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깨운 다음 태인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눈에 담았다. 어느새 나타난 준성과 화비가 그슨대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평소 그슨대를 추적하던 그들이 다행히 늦지 않게 당도했던 모양이었다.
“어이, 괜찮아?”
흘끔 뒤를 돌아봐 우선의 상태를 확인한 준성이 물었다. 우선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준성은 다시 그슨대에게로 신경을 집중하며 말했다.
“그 여인과 함께 있었던 걸 다행으로 알라고.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그슨대를 상대해준 덕분에 그쪽이 목숨을 건진 거니까.”
“태인 님이요…?”
우선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태인을 쳐다봤다. 태인이 볼을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뭐야. 내가 꽤 강하다는 말을 믿지 않았던 거야?”
“…이제 믿을게요.”
“흥!”
준성은 무감정한 얼굴로 그슨대와 대치했다. 이미 준성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그슨대가 살기를 숨기지 않으며 미소 지었다.
“잘 숨어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아무래도 꼬리가 길었나 봅니다.”
예의를 차리는 듯해도 그슨대의 말에는 상대를 깔보는 듯한 느낌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준성이 짧게 조소했다.
“이 시대가 보통 발전한 시대라고 생각하는가? 생각보다 족적을 파악해내기 쉬워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어리석은 짓 그만하고 이제 그만 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자.”
“유희는 이제 시작되었는데 섭섭한 말씀을.”
‘유희’라는 단어에 표정을 굳힌 준성은 그슨대에게 빠르게 달려들며 일용도를 소환했다. 신라에게 소유권을 넘겼지만, 신의 사자의 이름으로 급할 때는 본인이 소환해내 사용할 수 있었다.
쉬익-
일용도가 바람을 가르며 그슨대의 몸을 덮쳤다. 그런데 살갗에 닿기 전 검이 세게 튕겨 나와 멀찍이 날아가 버렸다.
“무슨…!”
준성이 당황해서 외쳤다.
‘방어의 주술이 이토록 강했던가. 이대로라면 신라의 몸에 신들이 찾아오신다 해도 비형랑을 없앨 가능성이….’
태인은 이미 많이 공격해보았기 때문에 물리적인 공격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가만히 서서 우선을 부축하고 있었다.
준성이 혀를 차며 곤란해하고 있을 때, 기회를 보던 화비도 인간의 모습으로 그슨대에게 달려들었다. 그슨대는 코웃음도 아깝다는 듯이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펑-
그슨대의 지척에서 여우귀의 모습으로 돌아온 화비가 그의 팔 한쪽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파란 여우 불이 그가 깨문 자리에 피어올라 공격을 용이하게 했다.
“큭…!”
그런데 그슨대의 입에서 뜻밖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공격한 화비도 당황해서 몇 걸음 가다가 멈추어 섰다. 그슨대의 왼쪽 팔이 통째로 뜯겨져 나와 화비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귀혼만이 공격을 받은 터라 겉으로 보기에는 팔이 멀쩡하게 붙어 있었지만, 이제 왼쪽 팔은 두 번 다시 움직일 수 없을 것이었다.
“쯧….”
낮게 혀를 찬 그슨대는 오른팔을 휘저어 검은 요기의 바람을 만들었다. 잠시 후 검은 바람이 걷히고, 그 안에 서 있던 그슨대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깝게 놓쳐버렸군.”
준성이 탄식하며 외쳤다.
그들은 일단 장소를 옮겨 연구실에 모였다. 주말임에도 소식을 들은 나머지 일원들은 한달음에 연구실로 달려왔다. 신라는 귀력을 이용해 우선의 등에 생긴 큰 자상(刺傷)을 치료해주었다.
“모두의 공격이 듣지를 않았는데, 왜 화비의 공격만 그슨대에게 먹혔던 거지?”
건우가 턱을 짚으며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했다. 그것은 화비 본인으로서도 알 길이 없는 문제였다. 우선과 신라의 곁에 서 있던 동주가 문득 화비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물었다.
“너, 어디 다쳤어?”
“아니요, 스승님. 딱히 다치지는 않았는데… 저의 왼쪽 팔이….”
화비는 오른팔과 달리 축 늘어진 왼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까부터 움직이지를 않아요.”
그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화비가 그슨대를 공격했던 부위도 왼쪽 팔이었다.
그 말은 즉-.
“그슨대가 방어의 주술을 완성하기 위해 가져다 쓴 영혼의 파편이 여우귀의 것이었다는 소리지.”
신후가 간략하게 정리했다.
화비를 비롯한 모두가 숙연해진 낯빛으로 각자 다른 허공을 응시했다. 그슨대는 없어져야 할 악한 존재라는 사실에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 자가 없겠지만, 그 일에 누군가가 필히 희생되어야 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동주의 표정이 유독 어두워져 있었다.
고민에 잠겨있던 화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 악한 놈을 처단하는 데 내 희생으로 족하다면 난 딱히 상관없어…. 그러니까 그렇게 우중충한 얼굴들 하지 말라고.”
“바로 그게 문제라고. 이 바보야.”
동주는 화비의 머리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먹이고는 의견을 묻듯이 신후를 쳐다봤다. 신후는 짧게 한숨을 쉰 후 말했다.
“아직 속단하지는 마. 아무리 오랜 주술이라도 반드시 약점은 있을 테니까.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사실 우리에겐 이미 이득이야.”
혜령이 신라에게 다가가 손을 꼭 쥐었다. 화비와 비슷한 처지에 처해 있는 그녀에게 온기를 전해준 것이었다.
바다의 사자가 태인을 데리러 왔다. 그녀는 끝끝내 우선의 상태를 신경 쓰는 눈치였다.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우선은 그녀를 불러 연구실 바깥 공터로 데리고 갔다.
“왜… 불러낸 거야?”
태인이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우선은 뺨을 긁적이며 아껴뒀던 말을 꺼냈다.
“일단, 감사해요. 태인 님 덕분에 제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까요.”
“바다에서 도망친 놈을 상대하는 것 정도야 별거 아닌 일이야. 그리고 정신적인 공격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던 건 나보다는 너의 굳건함 덕분이었어.”
우선은 작게 웃고 말았다.
“이번 기회에 당신을 다시 보게 됐어요. 무의식중에 그저 귀한 집안의 막내딸이라고만 생각했었거든요.”
“치…. 귀한 집안 막내딸이라서 어두운 과거 없이 그슨대를 쉽게 상대할 수 있었던 거라고 해보지, 그래!”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간 우선은 작은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머리칼을 살짝 흐트러뜨렸다. 당황한 태인의 뺨이 금세 붉어졌다.
“왜, 왜 이래!”
태인이 자기도 모르게 반걸음 물러서며 외치자, 어딘가에서 어김없이 날카로운 침이 우선을 향해 쏘아졌다. 그것을 보지도 않고 잡아챈 우선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침을 보란 듯이 가볍게 던져버렸다.
“일단은 말부터 놓는 걸로 할까?”
“어…어?”
“싫으시면 다시 존대로 하고요.”
멍하니 있던 태인이 곧바로 열심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 말을 놓도록 해! 나도 사실… 바라던 바니까.”
“그래? 다행이다. 그리고 외양으로 보나 태어난 연도로 보나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남들 보기 이상하지 않게 오빠라고 부르는 건 어때?”
낯간지러운 단어에 태인의 뺨이 또 한 번 달아올랐다.
“오, 오빠라니, 오라버니로 안 돼?”
“오.빠.여야 돼. 싫어?”
싫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도망갈 것 같은 우선의 분위기에 태인은 금세 초조해져 버렸다.
“아, 아니! 그렇게 할게! 오, 오, 오…빠.”
겨우 입 밖으로 내뱉으며 수줍게 고개를 숙이는 태인의 모습은 누가 봐도 귀여워서 반할 만했다. 우선은 싱긋 웃은 뒤, 아까부터 기척이 느껴지는 위쪽을 올려다봤다. 바로 위층 창틀에 머리만 내놓고 기대 서 있는 연구실 조교 세 명이 보였다.
“좋~을 때다.”
“고백은? 언제 해?”
“이제 보니까 민우선 연애할 때는 상남자네~”
우선은 태인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였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태인이 세 사람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놈들, 무엄하다!”
그 말이 신호라도 된 양 곧바로 쏘아져 날아드는 독침 세 개에 조교들은 화들짝 놀라 줄행랑을 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