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장. 고백, 그 후
한신후가 잃어버린 애(愛)의 감정을 되찾길 바라 함께 전전긍긍하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비어 있는 가슴에서 검붉은 고통의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는 그를 동정했고, 어느새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기다리던 묘령의 여인이 끝내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가 감정을 되찾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다.
- 연애할까? 우리.
그런 상황에서 듣게 된 고백은 다소 실감 나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히 온 마음으로 바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부턴가 체념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현실감이 없었던 것이다.
신라는 그날 그에게 확답을 내려주지 못했다.
그 감정을 이미 되찾았음에도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었던 그가 원망스럽거나 미운 것은 아니었다. 서로의 얽혔던 전생의 비밀이 드러나고, 원망하고, 죄책감을 갖고, 그러는 사이에 강 현에게 납치되어 가고….
섣불리 얘기를 꺼내기에는 시기가 애매했을 것이다. 또한 그의 말로는 본인 감정으로 또 한 번 억지로 묶어두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아….”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말고 답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는 신라를 보고 서영이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입 주위를 손으로 가리며 속삭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신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 이상한 낌새를 눈치 못 챌 서영이 아니었다. 그녀는 신라의 손목을 붙잡고 독서실 바깥 복도로 끌고 나왔다.
그녀들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시며 복도에 있는 원형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눴다.
“푸웁-!”
음료수를 마시던 서영이 입안에 든 것을 모조리 뱉어냈다. 그 정도로 신라의 말은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지, 지, 진짜, 그, 그, 그 한 교수님이…?”
본인이 더 설레는 감정에 사로잡힌 서영이 한껏 새빨개진 얼굴을 감쌌다.
한신후가 누구인가. 여교수들은 물론 의뢰인이었던 여자 연예인들까지 그에게 구애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사회적 지위, 명예, 돈, 젠틀한 성격, 모두 가진 남자. 게다가 미남 강사로 방송까지 출연했을 정도로 조각 같은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완벽하다 못해 어딘가 초월적이어서 사람 같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런 남자가 신라에게 고백을 했다고 한다. 신라와 함께 있을 때면 확실히 다른 사람처럼 분위기가 바뀌고 눈빛이 달라졌던 모습들이 이제 와 서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떡해, 너무 낭만적이잖아….”
서영은 콧소리 가득 섞어 중얼거리다가, 불현듯 불길한 느낌이 들어 신라를 휙 돌아봤다.
“너 설마, 그 고백을 듣고 망설이고 있는 건 아니지?”
“그렇지? 보통은 망설이지 않겠지?”
신라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서영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왜 망설여? 교수님이랑 사이좋았잖아. 나이 차 때문에? 여덟 살 차이는 흠도 아니야!”
“나이로 판단하기에는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기니까 빼 두자….”
“뭐야. 서른셋이 진짜 나이가 아니란 말이야?”
신라는 작게 웃어버렸다. 무려 네 번의 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니 나이를 갖다 붙여 판단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대상이었다. 그것 말고도 그에 대해서는 고민할 것들이 워낙 많았다.
‘한신후가 날 죄책감 없이 마주할 수 있을까.’
‘한신후가 날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맞을까.’
‘나를 향한 미안한 감정을 사랑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만일 진짜 그의 천생연분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마지막 생을 사는 그에게서 그녀를 만날 기회를 빼앗는 것은 아닐까.’
“네 마음은 어떤데?”
서영의 목소리가 복잡한 생각을 비집고 들어왔다. 신라가 뒤늦게 말뜻을 이해하고 되물었다.
“어?”
“유신라 네 감정은 어떠냐고. 지금 고민하는 네 표정이 딱 네 생각보다는 남 생각하는 미련퉁이처럼 보여서 묻는 거야.”
“……”
“겁이 나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 이 세상 것이 아닌 힘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 분이고, 하는 일도 위험하기 그지없지. 그런 남자랑 연애를 하면 아무래도 보통 남자와 사귀는 것보다는 다사다난할지도 몰라. 또 내가 모르는 복잡한 일들이 둘 사이에 많이 있었을 거야. 하지만 생각해봐. 그 사람 곁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원래는 불안함 투성이던 네 삶이 조금은 안정되지 않았어?”
신라는 말없이 동의했다. 한신후뿐만 아니라 연구실의 모든 조교들과 착한 여우귀인 화비, 그리고 준호의 심부름꾼인 최준성까지. 소중한 인연들이 그를 중심으로 새롭게 생겨났다. 물론 더 위험한 고비가 찾아왔었지만 결국에는 그가 지켜줬다.
“교수님도 결국에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야. 아니, 네가 그분을 보통의 사람이라고 느낀다면 어렵게 깊은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서영의 그 말이 머릿속에 날카롭게 박혀 반복해서 맴돌았다.
‘내가 보통의 사람이라고 느낀다면….’
서영은 신라의 손을 붙잡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확신해. 그 사람은 무슨 일이 생겨도 널 목숨 걸고 지켜줄 거야.”
사실은 그게 제일 두려운 건지도 몰랐다. 서영의 말대로,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 것이니까. 차라리 좀 더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면 받아들이는 게 쉬웠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에 얘기를 꺼낸 것도, 위태로운 날 쉽게 곁에 두고 지키기 위해서겠지.’
만일 신후가 잘못돼서 그로 인해 상처받게 될 그녀의 마음과 그녀가 다치는 것을 보고 아파할 그의 마음, 어떤 결과를 선택하든 차악일 뿐인 상황 속에서 신라는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 * *
12월로 넘어가 겨울의 기운이 짙어진 날씨에, 우선은 조금 두께가 있는 코트를 걸치고 진해 대사에게 안부 인사를 하러 갔다.
“표정이 많이 좋아졌구나.”
진해 대사가 오래 달여 놓은 차를 방 안에 들여오며 말했다. 우선이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차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광철로 살았던 전생에도 좋아했다. 어린아이가 어른도 잘 못 마시는 쓴 차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을 보고 진해는 그것을 쉽게 짐작했었다.
“그래 보이나요?”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워져서 말이야.”
“제가 언제는 딱딱했답니까?”
“물론 늘 순하게 웃고 있지만, 그 미소가 진심일 때는 드물었지. 그래서 스님들 사이에서는 무려 애늙은이로 불렸었다고.”
“애늙은이라니…. 너무들 하시네요.”
“어린 학생이 세상 다 산 것처럼 늘 생글생글 웃고만 있으니 오히려 그 이면의 모습이 두드러져 보였던 거지. 사람 감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한 번은 속여도 두 번은 힘든 거란다.”
우선은 쓰게 웃었다.
차를 입에 머금고 그 쓴맛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진해가 갑자기 작게 웃었다.
“드디어 민우선 인생에도 봄이 오는 건가? 학생 시절부터 다가오는 여인네들은 다 걷어내더니 말이야.”
“예?”
“저기.”
진해가 가리킨 문밖에는 파란 원피스를 입은 한 여인이 뒷짐을 진 채 발장난을 치고 있었다. 우선이 곤란하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누구시냐?”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진해가 물었다. 말을 꺼낼지 말지 망설이던 우선은 결국 털어놓고 말았다.
“동해 용왕의 따님이십니다.”
“…잉?”
사방팔방으로 구겨지는 진해의 표정이 꽤 볼만했다. 우선은 눈썹을 들썩하며 그 이상의 설명을 생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진해는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결혼식은… 바다에서 해야 하나….”
우선이 방에서 나와 계단을 걸어 내려오자, 태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하지만 냉큼 뒤돌아서 그 표정을 숨겼다. 여인은 자고로 도도하고 마음을 숨겨 남자를 안달 나게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시종들에게 일일 강습을 받았기 때문이다.
“태인 님.”
그녀의 귀가 쫑긋 섰다. 사뭇 새침한 얼굴로 돌아선 태인이 우선을 힐끔 올려다봤다.
“무엇이냐.”
“그 질문은 제 쪽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응?”
“제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신 건 태인 님 아닙니까? 그럼 왜 오셨냐고 제 쪽에서 물어야 맞죠.”
당황한 태인이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우선은 웃음이 삐져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아냈다.
“오늘도 위험하게 혼자 오신 겁니까?”
“아랫것들은 거치적거리기만 해. 난 태용 오라버니만큼은 아니지만, 지상에 혼자 다닐 만큼은 강하다고.”
“하아…. 그렇다고 치죠.”
“무시하는 거냐?”
우선은 그녀를 지나쳐 먼저 절에서 빠져나갔다. 울창한 숲에서 찬 바람이 불자 제법 겨울처럼 추웠다. 우선은 바들바들 떨며 따라오는 태인에게 돌아서 그의 코트를 벗어주었다.
“지상은 곧 눈 내리는 겨울입니다. 그렇게 얇게 입고 나오시면 춥습니다.”
“그러네…. 에취!”
가까이에 걸어와 한 칸 아래에서 직접 어깨에 코트를 걸쳐 주는 우선을 보고, 태인은 뺨을 붉게 물들였다.
“추, 추운데, 좀 덥기도 하네.”
“풉….”
“왜 웃어?”
“아니요, 아무것도.”
우선은 다시 혼자서 먼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태인이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소리쳤다.
“물어볼 것이 있다!”
우선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태인의 가라앉은 눈빛을 보고 우선은 그녀가 무엇을 물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엇입니까?”
“오래전 바닷가에서 내 목숨을 살려줬던 자…. 혹시 너 아니야?”
우선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태인은 용왕이 아끼는 딸이었다. 그가 딸을 한낱 고대 요괴의 환생과 이어지게 둘 리가 없었다. 게다가 상식적으로 바다에 사는 여인과 뭍에 사는 사내의 만남이라니, 분명 언제고 서로 상처만 받고 끝날 것이 분명했다. 여러 만남과 헤어짐을 간접적으로 겪어본 자신보다, 이 순수한 여인이 받게 될 마음의 상처가 더 걱정스러웠다.
그는 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전 그런 적이 없거든요.”
“……”
“혹시 그 착각 때문에 자꾸 절 찾아오시는 거라면, 이제 그만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우선은 다시금 스스로의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그래. 난 내 업보에도 버거워하고 있는 나약한 남자일 뿐이야.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자조적으로 웃으며 다음 계단에 발을 내딛으려 할 때, 여인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온 숲길에 울렸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두 주먹을 꽉 쥐고 외친 말에는 울음도 조금 담겨 있었다. 놀란 우선이 뒤를 돌아보니, 태인은 무엇이 그렇게 억울한지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내보인 눈물이 너무도 순수해서 그 감정마저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태인 님.”
“내가 생명의 은인도 못 알아볼 정도로 바보처럼 보이느냔 말이다.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천천히 다가가려 했던 것뿐이야. 내 신분이 워낙 높으니까 모두들 처음에는 날 어렵게 대했거든.”
태인은 눈물을 훔치면서도 열심히 말을 이어갔다.
“내가 싫은 게 아니라면 거짓말만은 하지 말아줘. 억지로 바다로 데려가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곁에 머물면서 지켜보고 싶어. 넌 속죄의 업보를 지고 있다고 했잖아. 그 끝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우선은 아직 성장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호되게 꾸짖었다. 아무리 선한 거짓말도 상대에게는 가끔 더 큰 상처가 된다. 심지어 그의 거짓말은 결국 종적에 복잡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이기심도 반영되어 있었다. 어른인 척, 좋은 남자인 척, 그녀의 순수한 선의와 호의를 밀어내려 했다.
“태인 님, 전…”
생각을 바꾼 그가 신중하게 골라낸 말을 꺼내려 할 때, 어딘가에서 불길한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이 기운은….’
우선은 순식간에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주위의 기척을 느꼈다. 태인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심각해진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광철… 너에게 속죄를 마무리할 기회를 주러 왔다….
낮고 굵은 목소리가 숲길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기분 나쁜 귀기(鬼氣)가 온 사방에 진동했다. 웬만한 잡귀는 그 자리에서 먼지처럼 사라질 만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의 요기라면….’
우선은 마른침을 삼켜냈다. 틈을 보이면 안 되기에 핸드폰을 꺼낼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불길함을 느낀 진해가 신후에게 연락을 넣어 주길 바라야 했다.
그때 날카로운 칼바람이 형체를 띠며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계단을 박차고 달려간 우선이 태인을 온몸으로 감쌌다. 칼바람이 꽤 크게 우선의 등을 베고 지나갔다.
“큭….”
태인은 무너져 내리는 우선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에 적지 않은 양의 피가 묻어나는 것을 보고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어, 어떡해….”
“도망…치세요.”
우선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태인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계단 아래에서 중절모를 쓴 중년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 올라왔다. 바다의 냄새가 어렴풋이 나는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두 사람은 동시에 눈치챘다.
“그슨대….”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