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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장. 이상 징후 (100/126)

99장. 이상 징후

- 도령은 왜 혼인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옛날이야기를 한창 재미있게 듣던 재희가 물었다.

어둑시니의 환생은 무덤덤하게 사실을 말했다.

- 혼인을 하려면 은애의 감정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 감정이 송두리째 사라졌어.

- 어째서요?

- 신이 그 감정 없이 살라 하기에.

- 그건 너무합니다. 은애의 감정 없이 사람이 어떻게 산다는 말입니까?

재희의 말을 듣고 그는 무덤덤하게 물었다.

- 사람이면 은애의 감정 없이 살 수 없느냐?

- 당연하죠. 사람이 짐승과 다른 이유가 달리 뭐가 있답니까? 나보다 남을 우선시 여길 수 있는 고결한 희생정신! 그 희생은 은애의 감정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 그럼 그 감정이 없는 한은 진정한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 없겠구나.

- 그럼요.

그녀의 말주변은 그야말로 나날이 늘었다. 어둑시니의 환생은 작게 입가를 당길 수밖에 없었다.

- 만일 우리가 후생에 만난다면, 꼭 되찾은 감정을 보여주마.

- 정말이요? 꼭입니다, 도령.

- 그렇다고 내가 널 은애하겠다는 건 아니다.

- 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궁금해서요. 누군가를 은애하는 당신의 모습은 과연 어떨지…. 모르긴 몰라도, 참 보기 좋으실 것 같습니다.

그것은 신후의 기억 속에서도 많이 바래져 버린, 한 세기 전 어느 한적한 날의 이야기였다.

* * *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혜령은 왠지 초조한 모습으로 방을 서성이며 손톱을 뜯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자취하는 집이 아닌 본가의 방 안이었다. 혹시 몰라 다시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돌려봤지만, 바깥에서 아주 단단히 잠가놓았는지 철컥대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창문에는 단단해 보이는 쇠창살까지 박혀 있었다.

분명히 어젯밤 눈이 감기기 직전까지 자취방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이곳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나 설마 감금당한 거야?”

혜령은 한껏 자존심 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혜령에, 신라를 비롯한 고고학 방 사람들은 슬슬 걱정이 돼서 각자 연락을 넣어봤다. 한참이 지나도 문자나 메신저의 답장이 없어 건우가 전화를 걸어보니,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뭔가 불길한데….”

건우의 중얼거림에 우선이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냥 핸드폰이 꺼져서 알람을 못 들은 걸 수도 있잖아요.”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박혜령은 알람 없이도 잘 일어나는 체질이야.”

“와~ 형이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어?”

우선의 날카로운 물음에 건우가 잠시 당황해서 귓불을 붉게 물들였다.

“아, 알면 안 되냐? 친구 사이에?”

“평소에는 그렇게 앙숙 같으면서 별걸 다 아네?”

“엠티도 몇 번 갔잖아! 본인이 그렇게 말했었다고. 우씨.”

건우를 놀리는 데 동주도 빠질 리가 없었다.

“역시 이런 영혼의 단짝이 없다니까.”

“영혼의 단짝은 무슨! 맨날 나만 귀찮지!”

민망함을 떨쳐내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건우는 홀로 연구실 바깥으로 나갔다. 혼자 걷다 보니 혜령이 아무 말 없이 지각을 한 상황이 다시금 이상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곁에서 지낸 동료이기 때문에 겨우 알아챌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나주연이 자꾸 신경에 거슬리는데….”

혜령의 말에 따르면 나주연은 장정들을 불러 그를 몰래 데려가려고 했다고 했다. 아마도 자판기에서 뽑아온 음료수에 강력한 수면제를 탔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수면제라고 해도 보통 인간보다 체력이 월등히 높은 자신에게 단번에 들었다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그렇다고 요괴로 취급하기에는 느껴지는 요기가 전혀 없었다.

‘납치를 할 정도로 내가 매력적이라거나…?’

홀로 넘겨짚어 본 건우는 금세 본인의 생각에 소름이 돋아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어쨌든! 아무리 부잣집에서 철없이 자란 여인이라지만 범죄까지 저지르는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 같고, 한순간 돌변해서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르려 했다는 것은…. 역시 요괴가 개입했을 수 있다고 봐야겠지.’

“뭔가 냄새가 나. 일단 박혜령부터 찾아봐야겠어.”

건우는 혼잣말을 하고는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갔다.

한편, 아직도 방에 갇힌 상태인 혜령은 참다못해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거기 아무도 없어요-!”

쾅, 쾅!

“당장 이 문 열어요!”

쾅! 쾅!

그때 바깥에서 기척이 느껴진 혜령은 손을 멈추고 그 발소리에 집중했다.

‘이건 엄마 발소리야.’

그녀는 문고리 근처로 허리를 숙이고 다가가 말했다.

“엄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제가 왜 여기에 있어요?”

혜령의 모친이 잠시 후 대답했다.

“사업이 요새 잘 안 풀려서 왜 그런가 했는데, 네 탓 같더구나.”

“제 탓이라니요?”

“업계 내에 소문이 퍼졌어. 네가 특이한 취향을 가졌다고 말이야.”

혜령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도대체 사업과 무슨 상관인데요?”

“아무튼 네가 정상적인 취향을 갖고 그 이상한 연구실에서도 나오면 우리 사업이 다시 번창할 수 있을 거다.”

원래 고지식한 부모의 축에 속하긴 했어도 이렇게 비논리적으로 밀어붙이는 이들은 아니었다. 혜령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초조하게 손톱을 뜯었다.

‘핸드폰은 당연히 빼앗아갔을 테고….’

창가로 걸어가 보니 어느새 없던 쇠창살까지 박아둔 상태였다. 그녀는 기가 찬 숨을 뱉어냈다.

한편, 나주연은 혜령의 본가 근처 골목에 서서 그 안의 동태를 살폈다. 아직까지 집안이 조용한 걸 보면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어 가는 것 같았다.

혜령의 양친을 물욕(物慾)으로 가득 채우고 그 장애물이 그들의 딸이라고 여기게 세뇌시킨 것은 바로 그녀였다. 어중간하게 영력을 가진 그들을 그런 식으로 꾀어내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이제 저대로 굶겨 죽이는 것도 괜찮은 결말인데 말이지. 쿡쿡….”

그때 그녀의 뒤로 다른 그림자가 나타났다. 미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그녀는 그 그림자가 지척으로 다가와서야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누굴 굶겨 죽여? 원래 그렇게 입이 험했나 보지?”

건우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주연은 뒤늦게 입꼬리를 올리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언제요?”

“말장난 그만하지? 당신이 혜령이한테 무슨 짓을 한 게 맞지?”

“우연히 마주친 것뿐인데 왜 그렇게 냉담하게 구는 거예요? 이해가 안 되네요, 조건우 씨. 그럼 전 이만.”

나주연은 반대로 돌아서 은근슬쩍 도망치려 했다. 그런 그녀를 가로막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라였다.

“제대로 대답하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못 움직여요.”

건우는 혹시 나주연이 혼의주를 삼켰을 경우를 대비해 신라와 함께 왔다. 그녀에게는 가히 절대적인 무기가 있었으니까.

스릉 …

신라가 그녀의 키만 한 일용도를 순식간에 소환해내는 것을 보고 나주연의 낯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더이상 연극을 그만하기로 했다. 허공에 손짓하자 멀찍이 숨어 있던 그녀의 본체, 재물귀의 형상이 세 사람 가운데로 날아와 나타났다.

“역시….”

건우는 짓씹듯이 단어를 내뱉었다. 여태 그녀가 요괴인 것을 몰랐던 이유는 본체를 저렇게 따로 빼놓았기 때문이었다.

“신라, 저 시꺼먼 놈부터 베어버려야 돼!”

건우가 소리침과 동시에 재물귀의 본체는 나주연의 몸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나주연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건우는 방망이를 소환해내 지면을 두드렸다. 그러자 귀기(鬼氣)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돌벽이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사방에서 하늘 높이 솟구쳤다.

“제법이네….”

중얼거린 재물귀는 건우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할퀴어대니 무거운 방망이로 쳐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일단은 ‘진짜’ 나주연의 몸이나 혼을 상하게 하면 안 되므로 건우로서는 공격할 방도가 딱히 없었다.

‘신라의 육안으로는 이 움직임을 잡아내기 힘들 텐데…. 어쩐다.’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신라가 혈투를 벌이는 그들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어?’

건우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조용히 검을 치켜드는 신라의 눈에 하얀빛이 번뜩이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에게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재물귀가 바로 뒤를 내어주었는데도 전혀 눈치 못 챘을 정도로 말이다.

쉬익 -

소리 없이 지면을 향해 수직으로 내질러진 검이 나주연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베어냈다. 재물귀는 뒤늦게 동작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이미 그의 귀혼은 검에 베어진 부분부터 바스러져 날아가고 있었다.

- 어… 떻게….

재물귀의 혼은 모조리 바스러져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상한 부분 없이 그저 의식이 없는 상태인 나주연의 몸이 바닥으로 힘없이 추락했다.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품에 받아낸 건우는 심각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신라를 쳐다봤다.

잠시 후 신라의 눈에서 하얗고 성스러운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덜컹, 덜컹.

창문의 쇠창살이 거칠게 움직여지는 소리가 들려, 혜령은 재빨리 그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의외의 인물이 쇠창살을 붙들고 있었다.

“신라-!”

혜령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야… 어서 도와봐!”

신라의 아래에서 열심히 버티는 듯한 소리가 들려 더 아래쪽을 쳐다보니, 건우가 신라를 목말 태우고 있었다. 1층과 2층 사이의 벽에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 그곳을 밟고 서 있었던 것이다.

“너희들….”

혜령이 감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쇠창살을 몇 번 더 흔들어본 신라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일용도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보고 놀란 건우가 말리려 했지만, 일용도는 쇠창살의 나사를 간단히 베어버렸을 뿐 더이상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다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세 사람은 벽을 타고 손쉽게 바닥으로 내려왔다. 집에서 탈출하자마자 기분이 좋아진 혜령이 신라를 와락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했다.

“어떻게 알고 왔어?”

“읏, 간지러워요! 건우 선배가 말해줘서요. 혜령 선배가 늦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했거든요.”

건우가 귓구멍을 후비며 심드렁하게 얘기했다.

“그래서 와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저번의 그 소개팅녀가 기웃거리고 있더라. 날 노리고 접근했다가 너로 타깃을 바꿨던 모양이야.”

혜령이 팔꿈치로 건우를 쿡쿡 찔렀다.

“감동인데, 조건우. 나는 어쩔 수 없이 며칠 동안은 갇혀 있어야 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빨리 찾아와줄 줄은 꿈에도 몰랐네? 기분이다, 내가 밥 산다!”

“이게 밥으로 끝날 일이냐? 내가 밥 며칠 분을 벌어줬는데!”

“시끄러워! 한창 감동에 젖어 있는데 초 칠래?”

“그게 누가 준 감동인데! 이씨.”

그들이 투닥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지켜보면서 내내 웃고 있던 신라는, 갑자기 두통이 생기는 것 같아 눈가를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분명히 시야 가득 건우와 혜령의 모습이 들어차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다른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뭐지?’

그것은 분명 커다란 저택 내부의 풍경이었다. 눈앞에 늘어선 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고개 숙여 복종의 표시를 취했다.

‘이건 설마….’

신라의 이상 징후를 동시에 눈치챈 건우와 혜령이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건우가 신라의 눈앞에서 손을 휘저어보았다.

“유신라. 괜찮아?”

혜령은 신라의 어깨를 쥐어 살살 흔들었다.

“신라야. 왜 그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신라가 그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 괜찮아요. 높은 데 올라갔더니 잠깐 현기증이 났나 봐요.”

어색하게 웃는 신라를 보고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아까 전 재물귀를 상대할 때의 일을 떠올린 건우는 심각한 표정을 쉬이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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