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장. 여기에 있어
지국천왕의 사자, 최준성은 약속한 대로 신라의 오른 눈의 시력을 되돌려줄 공작새의 깃털 하나를 가져왔다. 바쁜 스케줄로 메이크업도 채 지우지 못하고 다음 촬영 장소로 이동하는 짬에 연구실에 들른 것이었다.
“내가 이것 때문에 밤새웠다가 매니저한테 얼마나 혼이 났는지….”
그가 깃털의 눈 모양을 떼어내 신라의 눈에 갖다 대자, 푸른 불꽃이 타오르면서 그녀의 눈으로 스며들어 갔다. 신후를 비롯한 연구실 사람들, 그리고 화비가 그녀를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깜빡거리는 눈으로 시선을 움직이던 신라는 곧 초점이 맞춰지는 감각이 들어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제 잘 보여요.”
그 말에 다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신후만이 남은 문제에 대해 아직 고민하고 있는 눈치였다.
‘강 현과 신라의 혼이 연결돼 있는 이상 섣불리 그쪽을 공격할 수 없어.’
그는 준성을 교수실로 따로 불러 남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주술의 맹점은 알아냈나?”
준성은 난감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안타깝게도 주술 자체에선 맹점을 찾아볼 수가 없어. 애초에 일부러 맹점을 만들기 위해 다른 이의 영혼의 조각을 심어 불사(不死)가 아니게 만든 거니까.”
신후도 그 생각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그럼에도 신의 사자라면 무언가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던 것뿐이다. 준성도 그 마음을 충분히 알았기에 함께 씁쓸한 기분이 되어 침묵을 지켰다.
“만나야겠어.”
신후가 정적을 깼다. 목적어가 빠진 그 단순한 말에서 준성은 왜 이리 불안한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구를?”
“현재는 당신만 만날 수 있는 그 존재들 중 하나를.”
“…그건 무리야.”
준성이 진심으로 만류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신후는 어딘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작게 입꼬리를 당기고 있었다.
“한낱 거렁뱅이가 주머니를 털어 동전 몇 푼을 바쳐도 거기에 감격해서 축복을 내리는 존재들이, 이렇게나 희생해 가며 개 노릇을 해주었는데 그 정도 부탁도 안 들어줄까? 그건 양심이 없는 거지.”
“신에게 양심이라니, 이봐….”
준성이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두었다간 사고라도 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태생이 어둑시니였던 이 남자가 이성으로 똘똘 뭉쳐 정확한 사리 판단을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신들도 그를 어여삐 여기지는 않아도 신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한계까지 몰아붙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는 참았던 만큼 한 번 엇나갈 때 제대로 엇나갈 테니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에게 해. 제대로 전해줄 테니까.”
준성이 타이르듯이 얘기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당신은 끼어들지 않는 게 더 좋을 법한 일이야. 개인사와 관련된 거거든.”
“개인사…?”
준성은 끝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두워진 저녁, 시험공부를 마치고 서영과 교문에서 헤어진 신라는 곧장 귀가하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신후는 개인적으로 처리할 일이 있어 오후 내내 교수실을 비운 상태였다.
오피스텔 방향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는 찰나, 버스 뒤쪽에서 차의 클랙슨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신후의 자가용이었다.
“어….”
마침 하늘에서 한 방울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해서 신후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아까 연구실에서 기다리라는 소리 못 들었군.”
“그러셨어요?”
신후는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버스를 따라 차를 출발시켰다.
“요새 너답지 않게 정신을 빼놓고 있는 게 눈에 보여.”
“…그랬나요.”
“그래서 ‘24시간 유신라 혼자 두지 않기 프로젝트’를 암암리에 진행 중이지.”
뭔가 그럴싸한 작전명에 신라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연구실의 조교들도, 화비도, 서영도, 다들 시간표라도 짠 것처럼 누군가 떠나가면 다른 누군가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찾아와 옆을 지켰다.
“그게 프로젝트였단 말이죠?”
“지휘자는 당연히 나야.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널 지키는 막중한 임무를 지녔지.”
“그만 하세요. 너무 웃으면 힘 빠져요….”
신후는 미소로 답하면서 운전을 계속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조수석에서 창가를 바라보던 신라는, 차가 평소와 다른 길로 빠지는 것을 보고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들르고 싶은 곳이 있어서. 너와 관련된 곳인데, 잠시 시간 좀 내줄 거지?”
“저와 관련된 곳이요?”
잠시 후 차가 도착한 곳은 신라에게 익숙한 동네였다. 신라가 어렸을 때부터 자라온 집, 골목, 놀이터, 학교, 모두 있는 소박한 마을이었다.
신라는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한차례 소낙비가 지나가 공기가 제법 싸늘해져 있었다. 어느새 시동을 끄고 차 밖으로 나온 신후가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옛날 집이 이 근처라고 했지?”
“네…. 형철이네 절과도 가까워서, 요괴가 쫓아오면 늘 그곳으로 도망치곤 했어요.”
“눈에 그려지는군. 잡귀들이 널 가만히 뒀을 리가 없지.”
신라는 정겨운 느낌이 드는 동네를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신후도 그녀의 옆에서 보조를 맞춰 걸었다.
“이건 무슨 프로젝트예요? 유신라의 자아 강화 프로젝트?”
“비슷해.”
“치…. 그래도 옛날 생각나서 좋네요. 늘 쫓기고 조용히 숨어다니기만 해서 다시 오면 싫을 줄 알았는데, 소중한 추억들도 새록새록 떠올라요. 공부하랴 아르바이트하랴, 너무 정신없이 바빠서 지금의 유신라가 어떻게 됐는지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 같아요.”
“넌 그럴 만해.”
신라는 뒷짐을 진 채 짐짓 밝은 표정으로 신후를 돌아봤다.
“교수님은 어렸을 때 어떤 아이였어요? 설마 세상 다 산 캐릭터처럼 굴었던 건 아니죠?”
“나이에 맞게 행동했어. 어른의 기억은 있지만 뇌는 나이에 맞게 성장하기 때문에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는 건 어려웠지. 물론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지만.”
“진짜 궁금하다. 학생 때는 어땠어요? 분명히 제일 인기 있었겠죠?”
그들은 아무도 없는 놀이터로 들어가 놀이기구 근처도 느리게 배회했다. 잠시 학생 시절을 떠올리던 신후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주목을 받는 거야 당연했지만, 선생이고 교장이고 학생회장 같은 걸 시키려고 안달이었지. 나이에 맞게 허세에 들어차 있던 시절이라 그런 건 안 한다고 칼같이 거절했어.”
“풉! 허세에 들어찬 고딩 한신후라니, 상상도 안 돼.”
“상상하지 마. 나도 지금 생각하면 오그라드니까.”
“연애는요? 여자들이 고백하는 걸 거절만 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 같은데.”
그네의 지지대를 잡고 원심력으로 빙글 한 바퀴 돈 신라는, 미처 적응되지 못했던 오른 눈 때문에 조금 중심을 잃고 말았다. 신후가 바로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아 지탱했다. 그 덕에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신후는 시선을 피할 타이밍을 놓친 신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사귀긴 사귀었지. 대부분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여자들이었는데, 결국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나에게만 쏠리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떨어져 나가더군.”
“…왠지 알 것 같네요.”
“넌 어때?”
“뭐가 말이에요?”
신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의도한 것 같은 정적은 신라로 하여금 한껏 어색함을 느끼게 했다. 괜히 심장이 빨리 뛰고 뺨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의 팔이 허리에 단단히 감겨 있었다.
“저… 이 팔 좀….”
“우리 연애할래?”
그의 팔을 풀기 위해 바르작대던 신라의 손이 뚝 멈췄다. 그녀는 잘못 들었다는 듯이 동그래진 눈으로 신후를 올려다봤다.
“네?”
“연애할까? 우리.”
언제부터였을까. 애처롭게 사랑을 갈구하던 반요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음을 감추듯이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남자의 모습만 남아 있었다.
그가 여러 생 동안 기다렸던 여인이 떠난 이후로, 단둘이 있을 때도 일방적인 키스나 스킨십은 일절 없었다. 그저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교수…”
“아니. 지금은 학교 밖이야.”
학교 밖에서는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는 그의 말이 떠올라, 신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신후는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연애…하자고요? 저와?”
“응.”
신후는 그녀의 혼란을 이해했다. 되도록 천천히,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며 다가가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를 만큼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지금 신라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시간적 여유가 아니라 강한 버팀목이었다.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네가 예전에 나에게 고백했던 건 없던 일로 치는 거야. 그때는 네가 나에 대해 너무 일면만 알았으니까. 이제 난 너에게 거의 모두 보여줬어. 그런데도 이 고백을 받아준다면 내 쪽에선 고마운 일이지.”
“잠깐… 잠깐만요. 정리가 안 돼서요.”
신라는 신후의 팔에서 벗어나 그네의 지지대를 붙잡은 채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신후가 고백을 했다.
저렇게 진지한 모습으로. 모든 감정을 이해하고 있는 깊은 눈빛으로.
육욕을 참지 못해 갈구하는 키스를 끝내고 난 뒤에는 항상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어중간한 마음으로 무려 연애를 하자고 할 리는 없었다.
- 사랑해.
초연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남자에게서 얼마 전 환영에서 본 광경이 언뜻 겹쳐 보였다.
“설마… 그게… 현실이었어요?”
“꿈 요괴의 숲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거야?”
“절 구하러 오셨던 건 맞지만, 쓰러져 있는 걸 업어갔다고….”
“난 그렇게 말한 적 없어. 동주가 그랬을 거라고 얘기했겠지.”
“그럼….”
“맞아. 꿈이 아니라 현실의 나였어.”
“……”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멍하니 서 있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다시 그녀와 거리를 좁혀 어깨에 걸쳐 있는 재킷을 잘 여며주었다.
“어떻게… 언제부터….”
“모두 내가 애(愛)의 감정을 신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이 아니었어. 그들이 분노에 차서 내 심장을 헤집었을 때는 이미 그 감정이 이 안에 없었거든. 그래서 지국천왕을 비롯한 신들이 나는 애초에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고 단정 지었던 거야.”
“이미 없었다는 말은, 원래는 있었다는 말이죠?”
“그래.”
“그 감정을… 어딘가에 숨겨놨던 거예요?”
신라는 전래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됐다. 하지만 여느 때와 같이 차분히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는 신후의 눈빛에서는 그 어떤 거짓의 기운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의 다음 말을 듣지 않아도 신라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흩어졌던 퍼즐이 하나둘씩 맞춰지고 있었다.
신후는 이미 신라에게 재킷을 주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어깨에서 무언가를 벗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정말 그의 손에 투명한 두루마기 같은 것이 걸려 스르륵 벗겨졌다. 그는 그것을 신라의 가까이에 가져가 보여주었다.
“내가 그 여인에게서 찾아야만 했던 건 바로 이거였어. 죽은 그녀의 몸을 감쌀 수의에 이 감정을 숨겨놨었거든. 신들이 날 벌할 때 이 감정을 찾아 빼앗으려 할 게 분명했으니까. 더 나아가 칠정(七情) 모두 빼앗기긴 했지만….”
“그럼 당신이 그분을 기다렸던 건…”
“결국은 맡겨뒀던 이 감정을 되찾기 위해서였어. 종적에는 내 교만함이 그녀의 후생을 그렇게 망쳐놓았다는 죄책감에 망설였지만 말이야.”
신후가 기운을 불어넣자 비단 수의가 하늘거리며 두 사람 사이로 떠올랐다. 어디론가 가버리려는 줄 알고 신라가 다급히 그 옷깃을 붙잡았다. 신후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다시 내렸다.
“아니… 여기에 있어.”
그는 그 손을 천천히 그의 왼쪽 심장에 가져갔다. 단단한 가슴팍 아래에서 잔잔하게 뛰고 있는 심장 고동을 느끼고, 신라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단순한 심장 박동이었지만 어쩐지 그 안에 꽉 차 있는 따뜻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벅차오른다는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여기에… 정말 있어요?”
신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늘 높이 올라가던 수의가 옷자락 끝부터 잘게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반짝거리며 눈처럼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그 아름다운 빛의 조각들 사이로 그림처럼 미소 짓고 있는 신후의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