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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장. 빼앗긴 영혼의 조각 (97/126)

96장. 빼앗긴 영혼의 조각

‘이대로 도망칠까, 아니면 저 여자도 쓰러뜨려서 데려갈까?’

발목을 붙잡은 혜령을 바라보며 나주연은 초조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부리는 인간 장정들이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어서 그 녀석 데리고 얌전히 이리로 오시지.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혜령이 으름장을 놨다.

나주연은 결국 이번에는 조용히 물러나기로 했다.

“건우 씨가 음료수를 마시다가 갑자기 쓰러지길래, 병원에 데려가려고 아는 오빠들을 부른 것뿐이에요. 그게 싫으시다면 데리고 가셔도 좋아요.”

‘웃기고 있네.’

속으로 중얼거린 혜령은 겉으로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나주연에게 대응했다.

“어머, 그러셨구나. 그런데 무슨 오빠들을 그렇게 많이 불렀을까? 누가 보면 납치해 가려는 줄 알겠어요.”

“호호! 건우 씨를 납치해 가서 제가 뭘 하겠어요?”

“좋아하는 남자가 안 넘어오면 그렇게 찌.질.한. 짓을 할 수도 있지. 안 그래요?”

‘찌질한 짓’에서 나주연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붉게 물들었다.

‘저 얄미운 계집…. 내가 언젠가 본때를 보여주마.’

나주연은 짜증 서린 발걸음으로 돌아서 혼자 캠퍼스를 나가버렸다. 장정들은 우물쭈물하다가 건우를 혜령의 앞에 내려놓고 어디론가 달아났다.

“어디 다시 한번 쓸데없는 심부름하기만 해봐! 확 다 철창에 가둬버릴 테니까!”

훅- 뺨에 내려온 머리칼을 입바람으로 세게 불어 넘긴 혜령은 바닥에 누워 있는 건우를 일으켜 가까스로 등에 업었다. 그를 데리고 연구실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선선한 가을 날씨임에도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소파에서 태인에게 핸드폰에 대해 설명해주던 우선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 건우 형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

“어- 웬 이상한 여자를 소개팅에서 만났는지 납치당할 뻔한 걸 간발의 차로 구했잖아.”

“납치요?”

“데이트 폭력도 가지가지다. 어떻게 캠퍼스 안에서 떡하니 납치해 갈 생각을 다 하지?”

우선이 혜령을 도와 소파에 길게 건우를 눕혔다. 심각한 분위기의 그들을 보고 태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마음에 드는 남자를 납치하는 것도 이 세계에서는 큰 범죄가 돼?”

그 말을 듣고 우선의 동작이 뚝 멈췄다. 순진하게 묻는 모양새에서 왠지 불길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연…하죠. 어떤 이유에서든 납치는 범죄예요.”

“그랬구나…. 사랑하면 다 용서되는 줄 알았어.”

“천만에요….”

우선과 눈이 마주친 혜령이 조용히 동정 어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건우에게서 고른 숨소리가 나는 것까지 확인한 두 사람은 그제야 안심해서 소파에 편히 앉았다. 주위를 둘러본 혜령이 물었다.

“그런데 신라는? 독서실 갔나?”

“간밤에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교수님이 시험공부는 독서실 말고 연구실에서 하라고 하셨어요. 아까 태인 님이 오시고 바람 좀 쐬겠다면서 나가더니 아직 안 돌아오네요.”

“그래? 우리 착한 신라…. 나는 그럼 땀 좀 식힐 겸 신라 찾아보고 올게. 건우 좀 부탁해!”

혜령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연구실을 나섰다.

그 시각, 신라는 다른 학과 건물 근처를 거닐다가 낯익은 중년의 남자와 마주쳤다. 일전에 캠퍼스 정문 쪽에서 길을 묻던 중절모를 쓴 남자였다. 한창 길을 설명하는 와중 갑자기 사라져서 혹시 귀신인가 싶었던 남자는, 다시 보니 보통의 인간이었다.

“우리 구면이지요?”

축 처진 눈꼬리를 접어 웃는 모습이 선해 보여서 신라도 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안녕하세요. 그때는 잘 찾아가셨어요?”

“예. 이 학교 학생이었던가요?”

“네, 맞아요. 사학과 3학년이에요.”

“허허. 역사를 공부하는 여인네라. 아주 매력적이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혹시 시간 있으면 저쪽 벤치에 앉아서 얘기 좀 나눠볼 수 있을까? 이 학교에 대해서 조금 궁금해져서 말이에요.”

보통 낯선 이가 대화를 걸면 거부감부터 들기 마련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낯선 이를 조우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신라에게는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누구인지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마음이 놓였다. 간혹 착한 혼인 척 다가와 해코지를 하는 귀신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례지만 학교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상담사로 오래 일했어요. 아가씨 이야기도 조금 들어보고 싶네.”

“시험 기간이라 공부 중이지만, 머리 식힐 겸 잠깐이라면 괜찮아요.”

그들은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았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모습이 캠퍼스에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요새 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뭡니까?”

“아무래도 금전적인 문제겠죠. 등록금도 비싸고, 취업하는 데에도 돈이 적잖이 들어가니까요.”

“그래도 열심히 해서 좋은 데 취직하면 그때부터는 인생이 좀 피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려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온 거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요. 입신양명하기 위해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고, 집안에 보탬이 되려는 마음은.”

‘옛날 사람 말투….’

속으로 생각한 신라가 답했다.

“저의 경우에는 사실 배움이 좋았어요. 가족이 없거든요.”

“아아, 그랬군요. 그것참 외로웠겠군요.”

“괜찮아요. 익숙해졌으니까요. 대신 만남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져요.”

“그런 이들이 곁에서 떠나갈 때는 더 힘들겠군요.”

“그렇긴 하죠….”

상담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쉽게 속마음을 파고들어 오는 느낌이 들었다. 강 현이 그녀의 밝은 면을 짚어내며 자연스럽게 접근했다면 남자는 우울한 면을 쉽게 파고들었다.

우울함은 사람이 가장 취약한 면이라서 어쩔 수 없이 늘 쉽게 깨지곤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남자의 얘기를 듣자마자 떠나간 준호를 비롯한 가족들의 빈자리를 떠올렸던 걸 보면 그랬다.

“하지만 그래서 더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외로움에 지쳐서 힘이 빠져 있다간 남아 있는 소중한 사람들마저 무기력하게 떠나보낼 수도 있으니까요.”

“당신은 참 강한 여인이군요…. 주변의 상황이 모두 당신을 약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는데도 세상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남들보다 강한 모습으로 꿋꿋이 버티고 있어요. 보통은 해답을 자기 자신에서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한 비난에서 찾으려고 하는데 말이에요. 그래…. 그게 사실 정답이죠. 세상은 변하지 않으니 스스로가 변하는 게 맞는 거예요.”

‘네가 그런 여인이니 주군이 그렇게 목을 매고 있는 거겠지.’

남자는 속으로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신라가 모르는 사이 벤치 아래로 드리워졌던 그의 그림자가 스물스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그림자는 곧 신라의 그림자와 연결되었고, 그녀의 등을 타고 올라갔다.

유난히 눈 부신 햇살이 그늘을 뚫고 들어왔다. 신라는 손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가리며 잠시 하늘을 쳐다봤다.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바로 눈앞을 스쳐 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오른 눈에서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당황한 그녀는 눈을 감싸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 눈을 찌른 것처럼 시린 통증이었다.

“신라!”

멀찍이서 신라를 발견한 혜령이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급하게 달려왔다.

중년의 남자는 또다시 유령처럼 사라져 있었다.

“신라, 괜찮아? 왜 그래, 눈이 아파?”

“선…배…. 오른쪽 눈이 너무 아파요….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어디 봐.”

혜령은 신라의 뺨을 쥐어 눈물이 흐르고 있는 오른쪽 눈을 살폈다. 겨우 떠진 눈의 눈동자가 왠지 뿌옇게 변해 있었다.

“이건…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교수님을 부를게.”

그때 회식을 마치고 돌아온 신후가 타이밍 좋게 나타났다. 사학과 건물로 곧장 들어가려던 그는 근처에서 신라의 기운이 느껴져 이쪽을 먼저 들른 것이었다.

오른쪽 눈을 감싸 쥐고 있는 신라를 보고 표정을 굳힌 신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혜령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눈을 감싸 쥐고 있길래 달려와 보니까 눈이 뿌옇게 변해서….”

신후는 조심스럽게 신라의 턱을 쥐고 오른 눈을 살폈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이 정말 뿌옇게 변해 있었다. 무언가로 덮어씌운 것이라기보다 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이 주술은….’

“누구와 함께 있었어?”

신후는 자꾸 눈을 비비려는 신라의 손을 붙잡아 막으며 물었다.

“중절모를 쓴… 남자요….”

“아무런 느낌이 안 들었어?”

“보통의 사람 같았어요…. 수상한 느낌은 없었…”

가까스로 대답하던 신라는 갑자기 시야가 빙글 돌아가는 느낌이 들어 눈을 가리며 비틀거렸다. 급히 그녀를 지탱한 신후는 혜령에게 도와줄 것을 청했다. 혜령은 신후를 도와 그의 등에 신라가 업히도록 만들었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맞아요. 그슨대의 짓….”

쓰러진 지 1시간여 만에 깨어났던 건우가 어지러운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신라는 연구실로 옮겨져 건우가 누웠던 자리에 눕혀졌다. 그녀는 정신을 잃어서도 무언가를 견디듯이 간간이 신음을 흘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태인을 돌려보낸 우선과 뒤늦게 연구실로 돌아온 동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신라의 상태를 관찰했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뚜렷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신라의 곁에 앉은 신후가 그녀의 이마에서 식은땀을 닦아내며 건우에게 물었다.

“영혼을 빼앗아가는 주술이겠지.”

“그런 것 같아요. 인간의 눈은 영혼의 창이니까, 그 각막을 떼어 가면 영혼의 조각을 가져가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어요. 금지된 술법을 정체를 숨긴 채 그렇게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요괴는 드물죠. 게다가 본연의 요기마저 신라가 눈치 못 챌 정도로 숨길 수 있다면, 아무리 지국천왕의 사자라 해도 추적하기 힘들 거예요.”

“신라가 얼굴을 봤으니 찾아내는 건 사실 시간문제일 거야. 학교 곳곳에 CCTV가 설치돼 있으니까.”

“하긴, 봉인에서 풀려난 지 얼마 안 됐으니 이 시대에 한창 적응하고 있는 중이겠죠. 걸음 하나하나가 추적 가능한 시대라는 건 상상조차 못 하고 있을 거예요.”

“문제는 왜 영혼의 조각을 가져갔냐는 거야. 그것으로 무슨 짓을 하려고.”

“그건, 서둘러서 알아보겠습니다.”

신후는 신라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조교들에게 잠시 나가줄 것을 부탁했다. 힘겨운 숨을 내쉬고 있는 마른 입술 가까이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포개고, 비어 있는 영혼의 자리가 잠깐이나마 메워질 만큼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잠시 후 고통스럽게 들리던 호흡 소리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신라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신후에게 겨우 초점을 맞췄다.

“교수…님….”

“괜찮아?”

“조금… 나아졌어요…. 그런데 아직 오른 눈은….”

“아마 흐릿해서 잘 안 보일 거야.”

“왜 그런 거예요?”

신후는 사실을 말해주기를 망설였다. 이미 적지 않은 스트레스로 아슬아슬하게 한계점을 넘나들고 있었을 텐데, 그슨대가 다녀갔다고 얘기하면 분명히 충격을 받을 테니까.

“치료해줄 수 있으니까 걱정 마. 잠시 동안만 불편한 거라고 생각하면 돼.”

“제가 또… 조심하지 못하다가 당한 건가요?”

신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네가 조심하지 못한 탓이 아니야. 비겁한 건 놈들이야. 그리고 자꾸만 그들에게 널 노출시키고 마는 내 탓이 더 크지.”

“교수님 탓은 아니에요…. 어떻게 24시간 망을 보겠어요. 내가 당신 그림자도 아닌데.”

신후는 어렴풋이 웃으며 그녀의 오른 눈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상황이 안전해질 때까지 널 내 어둠 안에 가둬놓을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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