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장. 경거망동 (96/126)

95장. 경거망동

나주연은 초조했다. 그녀는 그슨새가 그슨대에게 산 채로 먹혀버리는 광경도 몰래 지켜봤고, 추병귀가 웬 사내의 손에 제령 당하는 것도 목격했다. 적에게는 인간의 혼을 다치게 하지 않고 귀신의 혼만 베어 없애는 방법이 생겼음이 분명했다.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간 적에게도 그렇고, 주군에게도 팽당하는 수가 있어.’

인간들의 전술 중, 가장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했다. 그녀는 스스로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 * *

“나가니?”

혜령이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을 때, 뒤로 다가온 중년의 여인이 물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저택이었다. 이곳은 혜령의 가족들이 사는 본가였다. 정계에 진출한 아버지와 큰 사업을 하는 어머니 덕에 그녀는 부족할 것 없이 유년 시절을 보냈다. 가족들 간의 사이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처음 톱니바퀴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때 성적 취향을 털어놓은 이후부터였다. 그녀의 부모는 그것을 인정하긴커녕 병이라고 불렀고, 나중에는 강제로 선 자리에 나가도록 만들었다.

그러다 예은이 그런 사고를 당하게 됐다. 그것은 혜령에게 평생 지워지지 못할 상흔이었다. 부모님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연관이 없지는 않았기에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챙길 거 다 챙겨서 이제 가보려고요.”

“밥은…”

“자취 집에 반찬 많아요. 그럼 가볼게요.”

혜령이 현관문의 손잡이를 붙잡았을 때, 그녀의 모친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요새는 어떤 애 만나니?”

“…안 만나요.”

“자주 같이 다니는 연구실 사람이 있는 것 같던데, 어떤 애야?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는…”

“엄마!”

혜령이 듣다못해 화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건우는 그냥 친한 연구실 친구예요. 아시잖아요…. 저 남자랑 못 사귀어요.”

“혜령아.”

“그렇게까지 자식을 부정하고 싶으시면 엄마 마음 편한 대로 하세요. 전 변하는 거 없으니까, 기분 나쁘게 사람 붙여서 그렇게 뒷조사도 그만하시고요.”

“얘가 말을 해도…!”

“하긴…. 엄마 아빠한테는 내가 기분 나쁜 존재겠죠. 실언했네요.”

그때 거실 쪽에서 그녀의 부친이 나타났다.

“박혜령, 정신 차려! 언제까지 비뚤어져서 살려고 그래? 하나 쓸모없는 그 연구실부터 때려치워!”

“아버지는 제가 그 연구실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시죠?”

“고고학 연구실이 안 봐도 훤하지!”

“그래요. 평생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가 잘못돼도 그냥 운이 안 좋았다 생각하시고요.”

“이놈이-!”

혜령은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말했다.

“알아두세요. 날 이렇게 만든 건 내 취향도 아니고 내 고집도 아니고, 바로 엄마 아빠 두 분이에요.”

쾅- 현관문을 세게 닫고 나온 혜령은 눈가를 훔쳐내며 대문도 박차고 나갔다.

빠앙, 저택의 담벼락 아래에 세워져 있던 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누군가하고 봤더니 연구실의 공용 승합차였다.

“타라-”

운전석 창문을 연 이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보자마자 혜령의 얼굴에 겨우 웃음이 피어났다.

“뭐야, 나 데리러 온 거야? 멋진데~”

혜령은 짐짓 힘찬 걸음으로 걸어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건우는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끼워둔 달달한 카페 음료를 혜령에게 건넸다.

“마시고 인상 풀어라.”

“내 인상이 그렇게 험악해?”

혜령은 가벼운 어조로 말하곤 빨대로 캐러멜마키아토를 쭉쭉 빨아들였다. 달달함이 혀 전체를 마비시키는 느낌이 들자 겨우 숨통이 트였다.

“크- 이제 좀 살 것 같네. 답답해서 미쳐버릴 뻔했거든. 출발해! 여기 근처에 한시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으니까.”

“쯧쯧…. 그래도 낳아주신 부모인데 살갑게 좀 해.”

“살갑게 대하려고 해도 저런 식으로 자식을 제 맘대로 조종하려고 하잖아. 내가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인지 몰라?”

“자유와 방종은 한 끗 차이니라-”

“이럴 때만 자꾸 늙은이같이 굴래?”

“너희들 앞에서는 늙은이 맞잖아. 세상 여러 번 산 늙은이.”

“풉!”

건우는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시켰다. 1분도 안 돼서 음료의 반을 비워버린 혜령이 장난스레 발을 구르며 말했다.

“거누거누, 난 네가 참 좋아.”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급정거시킨 건우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혜령을 돌아봤다. 그 표정을 보고 기분이 상한 혜령이 그의 팔뚝을 세게 때렸다.

“야! 오해한 건 그렇다 쳐도 그 표정은 뭐야!?”

“아…. 오해냐? 다행이다.”

“이게? 당연히 사람으로서 좋다는 의미지, 이 멍청아!”

“맨날 잡아먹을 것처럼 굴면서 갑자기 좋다고 하면 믿을 것 같냐?”

건우는 툴툴대며 운전에 집중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혜령이 부연 설명을 하듯이 덧붙였다.

“일단 첫 번째로 넌 날 심심하지 않게 해줘. 이렇게 진지할 때는 진지하게 대화가 가능하다가도, 정신을 차려 보면 초딩처럼 열심히 싸우고 있잖아. 우린 아무래도 전생에 같이 만담꾼을 했나 봐. 안 그래?”

“저기요. 저는 제 전생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거든요.”

“만담꾼을 안 해봤으면 뭐, 절친 정도는 했겠지!”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 미적지근한 반응은 뭐냐!? 어서 고마워하라고!”

“네, 네. 감사함다.”

삐진 것처럼 창가로 고개를 돌려버린 혜령은, 곧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건우와 또 한바탕 말다툼을 했더니 거짓말처럼 우울함이 사라진 것이다.

“네가 내 오빠였다면 좋았을 텐데.”

“왜.”

건우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날 이해해주고 편견 없이 대해주잖아.”

“그건 다른 조교들도 마찬가지잖아.”

“그렇긴 한데, 너한테는 아무래도 여러 생을 살아온 연륜이 묻어 있다니까. 그 어른스러움이 가끔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허….”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닌 듯 건우는 코끝을 어색하게 문질렀다. 혜령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래서 난 다음 생에 너랑 결혼할 거야.”

끼긱-!

대로변에서 승합차가 또 한 번 급정거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동주가 서영과 함께 학교 근처로 점심을 먹으러 나가고, 연구실에 남은 우선과 신라는 간단하게 햄버거를 배달시켜 먹기로 했다. 혜령과 건우는 돌아오는 길에 바깥에서 외식을 하고 온다고 했고, 신후는 교수들끼리 회식이 있었다.

“선배는 기분이 어때요?”

신라가 햄버거를 작게 한 입 베어 먹으며 물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우선이 감자튀김을 먹다가 되물었다.

“응? 뭐가?”

“단짝 친구한테 갑자기 여자 친구가 생겼잖아요.”

“음~ 당연히 좋은 일이지.”

“심심하지 않으세요?”

우선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심심하긴 하지. 늘 같이 붙어 다녔으니까. 요새는 퇴근도 같이 안 해. 완전히 버려졌어.”

“동주 선배 너무해. 서영이도 너무해요.”

“그러고 보니 신라도 버려졌구나?”

“네….”

“우리 버려진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놀아보자.”

우선이 귀엽다는 듯이 신라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였다. 갑자기 바다 내음이 풍기면서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화려한 옷감을 펄럭이는 여인이 나타났다. 처음과 달리 그리 싫지만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우선을 보고, 신라는 작게 웃었다.

‘곧 나 혼자 남겠네.’

태인은 신라의 머리에 올라가 있는 우선의 손을 보고 나타나자마자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렸다.

“너희 둘이서 뭐 하느냐?”

우선이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하며 일어났다.

“갑자기 연구실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시, 시찰 나왔다!”

“바다의 귀인께서 왜 육지를 시찰 나오십니까?”

“윽…. 말이 많구나! 그런데 뭘 먹고 있는 거냐?”

햄버거의 향이 적잖이 식욕을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그대로 두면 침이라도 뚝뚝 흘릴 것 같아서, 신라는 햄버거를 칼로 깔끔히 잘라내 휴지로 잘 싸서 태인에게 건넸다.

“육지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이에요. 먹어보세요.”

“그, 그래?”

태인은 햄버거를 깨물기 전 엄마 바라보는 아이처럼 우선을 쳐다봤다. 우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먹어도 됩니다. 지난번에 보니까 음료만 조심하면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럼 먹어보겠다.”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자마자 태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어, 어뚜케 움띡에더 이던 마디 나누냐(어떻게 음식에서 이런 맛이 나느냐)!”

다람쥐처럼 볼이 빵빵해져서 햄버거를 열심히 먹는 태인의 모습이 귀여워, 우선과 신라가 동시에 웃었다.

혜령을 먼저 연구실에 올려보낸 건우는 캠퍼스 내 적당한 자리에 주차하고 차에서 나왔다. 사학과 건물로 향하려는 그의 앞에 화려한 복장의 여인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건우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우리 그만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

나주연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가까스로 미소를 유지했다.

“그건 그쪽의 일방적인 생각이고요.”

“사람이 만나는 데 어느 한쪽이라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 만남은 아닌 겁니다. 아실만한 분이 왜 그러실까.”

“그럼 우리 친구 해요. 나 조건우 씨가 마음에 들었거든.”

“내가 부잣집 딸들한테 뭐가 있는 건가….”

건우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물론 그렇다고 나주연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갑작스레 일이 바빠져 그것을 핑계로 만남을 물렀지만, 지금은 확실해졌다. 그와 나주연은 성격적으로도 취향적으로도 뭐 하나 제대로 맞는 게 없었다.

연인이 될 수 없다면 친구가 되어도 결과가 뻔했다. 그래서 건우는 미련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미안하지만 저희는 인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 아쉽네.”

나주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커피 한잔만 해요, 우리. 정말 마지막.”

“…알겠습니다. 커피는 아까 마셨으니까 근처 벤치에서 자판기 음료나 한잔하시죠.”

음료는 나주연이 뽑아왔다. 친절하게도 뚜껑까지 열어 온 것이 특이해서 슬쩍 그녀를 올려다본 건우는 별 의심 없이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주연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요? 맛있어요?”

“늘 마시는 건데요, 뭘. 그쪽이야말로 이런 거 안 마셔보던 거 아닙니까?”

“마셔보니까 괜찮네요.”

“것 봐요. 내가 먼저 그만두자고 하긴 했지만, 나주연 씨는 나한테 과분한 사람이에요. 살다 보면 거절해준 내가 고마워질 때가 있을 겁니다.”

“어머, 겸손해라.”

‘슬슬 신호가 올 때가 됐는데.’

나주연은 건우가 눈치 못 채도록 그의 동태를 살폈다. 상대하기 만만치 않은 그를 먼저 약이 든 음료로 쓰러뜨린 다음 강 현의 앞에 다시금 붙잡아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적의 전력이 뚝 떨어질 것이고, 더불어 강 현도 전보다 더 자신을 신용할 것이 분명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주군이 널 아끼시는 걸 다행으로 알라고. 후훗….’

사람이 아닌 귀신이 만든 약이라 효과는 상당했다. 건우는 졸리다는 사실도 인지하기 전에 그대로 옆으로 기울고 말았다.

나주연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를 당겨 허벅다리에 눕혔다. 지나가는 이들이 간간이 이쪽을 쳐다봤지만, 의심의 빛은 없었다. 그저 연인들이 벤치에 앉아 쉬어 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슬슬 데리고 가볼까?’

나주연의 손짓에 멀찍이 잠복해 있던 그녀의 하인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들은 정말 보통의 인간으로, 나주연이 주는 돈을 받고 그녀의 밑에서 일하는 자들이었다. 물론 그녀의 정체가 요괴라는 사실은 추호도 몰랐지만 말이다.

장정들 중 하나가 건우의 몸을 조심스레 업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미리 학교 바깥에 세워둔 승합차로 옮기려 했다.

“동작 그만.”

그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들의 뒤에서 울렸다. 나주연은 일을 그르쳤음을 짐작하고 그쪽을 신경질적으로 노려봤다.

고고학 연구실의 여자가 위풍당당한 기세로 서 있었다.

“내 다음 생의 남편을 데리고 어디로들 가시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