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장. 선전포고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
신라는 바닥에 넘어진 채로 강 현을 날카롭게 올려다보았다. 이제 무슨 일이 생기든 모두 그의 탓처럼 느껴졌다. 또 그와 가까이 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강 현은 난간이 있는 복도 바깥 쉼터로 나와 무릎을 굽히고 신라와 시선의 눈높이를 맞추어 주었다. 은은한 달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역시나 말끔하기 그지없었다.
“보고 싶었어요, 라고 말하기 전에 면박부터 받을 줄은 몰랐네.”
“저것도 당신 짓 아닌가요?”
남학생에게 잠시 빙의한 귀신을 일컫는 말이었다.
강 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내 정체를 감추기조차 힘들 만큼 유명해져 버려서. 저렇게 물불 안 가리고 내 마음에 들고 싶어 하는 잡귀들이 많아졌어.”
“…자랑이에요?”
강 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랑이라기보다, 변명이지. 그래서 미안해하고 있어. 다친 데는 없어요?”
넘어지면서 바닥을 짚다가 살갗이 조금 까졌는지 피가 나고 있었다. 바지에 먼지를 털고 있는데 강 현이 그녀의 손을 가져가 상처 부위를 후후 불었다. 그리고 조금 맺혀 있던 피를 혀로 핥아냈다.
“읏….”
따가운 감각에 신라의 눈이 절로 감겼다.
그러고 보니 강 현의 손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지 않았다. 신라는 달동네에서 그와 마주쳤던 일이 떠올라 물었다.
“그때에도,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나요?”
“당신이 누구와 함께 있을지 모르니까 일단은 빼고 갔어요.”
우선과 동주를 기절시킨 게 강 현일 리가 없다는 사실에 쐐기를 박는 말이었다. 더 어두워지는 신라의 표정을 눈치챈 강 현은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고민이라도 있나요?”
“…신경 쓰지 마세요. 병 주고 약 주고 있는 거 알아요?”
“그랬나?”
신라는 그의 손을 떨쳐내고 스스로 일어나 복도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강 현이 넓은 어깨로 그녀를 막아 세웠다.
“비켜요.”
“이렇게 마주치기도 어려운 사이인데 얘기나 더 하고 가요.”
“조금만 지체해도 교수님이 절 찾으러 올 거예요.”
“귀걸이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조금은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여유롭게 문틀에 기대서는 강 현을 노려보던 신라는, 그에게서 조금 달라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는 왠지 또 다른 감정 위로 가면을 덮어쓴 마냥 인위적이었다.
또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 속으로 질문을 던져 봐도 불안함만 자라났다. 그가 하려는 모든 일이 그녀를 위협하는 것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늘 생각 끝에는, 그래도 사람으로 환생한 그가 조금은 인간의 ‘망설임’이란 것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불투명한 희망이 남았다.
‘검집….’
차분해진 신라의 얼굴을 보고 강 현이 입을 열었다.
“신라 씨. 나 걱정해요?”
“……”
무언을 멋대로 긍정이라 판단한 강 현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한 걸음 신라에게 다가와 난간 사이에 그녀를 가두었다. 여인의 긴 머리칼이 가을바람에 아름답게 흩날렸다. 칠흑을 담은 머리칼에서는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아마도 그런 향이 나는 샴푸를 쓰는 것이리라.
‘우리가 평범하게 만났다면 어떤 삶이었을까.’
강 현은 가만히 머릿속에 그려봤다. 두 사람은 새하얗고 넓은 침대에 파묻혀 날마다 함께 아침을 맞이하겠지. 무거운 눈꺼풀을 들자마자 옆자리에 아기처럼 곤히 자고 있는 신라가 보일 것이고, 그는 절로 내지어지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질 것이다.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나 부엌에서 간단히 아침을 만들고, 키스로 그녀를 깨우고, 그러다 눈가에 열꽃이 피어나면 자연스럽게 사랑을 나누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당신이 날 이해하고 내 곁에 있게 된다면.’
강 현은 자기도 모르게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여태껏 본 적 없었던 그의 노골적인 구애의 눈빛에 신라는 당황해서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인간으로서 쓰고 있었던 가면도 내던져버린 모양이었다.
“…비켜주세요. 돌아갈래요.”
“어디로?”
“연구실로요.”
“…그래. 당신은 날 없애려는 자들과 함께하고 있었지. 나도 자꾸만 잊게 돼. 정신을 차려 보면 눈앞에 있는 당신에게 언제나 목을 매고 있어.”
이렇게 말하는 남자가 어떻게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을 감행하는 요괴들의 수장이란 말인가. 신라는 혼란스러워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하지만 그의 손에 턱이 붙잡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아야 했다.
“이것 놓…”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강 현은 신라를 눈에 담은 채 자조적으로 웃음 지었다.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러니 이 감정도 사랑이 아니야. 난 그저 유신라, 당신에게 기대고 싶은 거야. 욕심부리고 있는 거야. 내 곁에 영원히 남아줄 이가 필요해서.”
“……”
“육욕…이라고 생각해둬.”
강 현은 그대로 신라의 입술을 머금었다. 정신을 차리고 밀어내기 전에 서둘러 혀로 입술 새를 파고들어 달콤한 타액을 맛봤다. 한 번 고삐를 풀자 차오르는 욕망을 다시 가둘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그녀의 옷을 벗기고 살 내음이 풍기는 살갗을 마음껏 탐하고 싶었다.
“읍-”
입술 안에서 버거운 듯이 신음을 흘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너무도 애처로워 그 목소리마저 삼켜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시금 단단히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몸이 난간 바깥으로 기울 때까지 집요하게 키스를 이어갔다.
혀뿌리까지 휘감아 강하게 빨아들이고 입 안의 약한 점막을 간질여 타액이 넘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생명수처럼 느껴졌다. 기어코 그녀의 입술 바깥으로 흘러내리는 타액도 꼼꼼히 핥아냈다. 생리적으로 차올라 흐르는 눈물도 마찬가지였다.
“읍….”
신라는 마치 그에게 잡아먹히는 듯한 감각이 들어 몸서리쳤다. 이대로 가다간 몸의 수분이란 수분은 모두 빼앗길 것 같았다. 다시 힘주어 양손으로 가슴팍을 밀쳐내니 이성을 잃었던 그가 잠시 멈추고 물러났다. 덕분에 턱까지 차오른 숨을 잠시 골라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야하네….”
강 현은 실컷 핥고 빨아내서 붉게 부어올라 타액에 젖어 있는 신라의 입술을 홀린 듯이 매만졌다. 이걸로는 모자랐다. 좀 더 많은 곳을 타액으로 묻혀 그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 귀찮은 어둑시니가 더는 끼어들지 못하도록 말이다.
신라는 입술을 간질이는 그의 손을 쳐내고 그가 멍해 있는 틈을 타 불시에 복도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연구실 쪽으로 향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면서도 눈빛으로는 끊임없이 구애하는 남자가 바보 같았다. 인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에서 희열을 느끼는 남자는, 집착과도 같은 외로운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기 스스로를 알까?
만약 안다면,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애처롭다고 느끼는 이 모순적인 마음도 관찰하고 있는 걸까?
걸음을 재촉해 신후의 교수실에 다다른 신라는 노크도 하지 않고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어?”
그런데 불이 꺼져 있는 교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편, 신후는 모든 감정이 사라진 듯한 얼굴로 누군가와 대치 중이었다. 그의 앞에 선 강 현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
잠깐이나마 신라의 귀력이 느껴져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단숨에 달려왔던 신후였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정도로 사소한 변화였지만 그것마저 감지해낼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신이 그녀의 몸을 차지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이곳에 다다랐을 때 두 사람은 입을 맞추고 있었다. 한쪽이 강제적으로 이어가는 키스가 분명해 끼어들려는 찰나 신라가 스스로의 힘으로 강 현을 떨쳐내고 연구실 쪽으로 달려갔다.
“경고하는데 신라한테 더는 접근하지 마.”
신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강 현은 작게 조소하며 답했다.
“방금 전 위험한 상황이 있었는데, 구해낸 건 내 쪽이었어. 유신라를 모든 상황에서 지켜낼 수 있다는 착각은 버려. 그건 네 오만에 불과하니까.” “지금 신라에게 가장 독은 너라는 존재야. 신들이 널 없애기 위해 그녀를 이용하기 시작했어. 더 접근했다간 둘 다 죽는 경우가 생겨.”
“접신…인가. 그래서 그때 자각 없이 같은 편을 쓰러뜨리고 내 탓을 했군.”
신후는 강 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워낙 기척 없는 이들이라 복도의 센서 등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강 현은 신후의 분노를 알아챘다. 이렇게까지 온몸에서 뿜어내고 있으니 귀혼을 떨어뜨려 놓았는데도 느껴질 정도였다. 음침하게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기며 기회를 엿보다가 적을 공격하던 자가, 어느새 인간으로 환생해 이토록 존재감을 당당하게 드러내게 되다니.
“유신라가 너에게 그렇게 소중해?”
“네가 ‘소중’하다는 단어의 의미를 안다면 그렇다고 긍정해 주지.”
“왜 모르겠어. 나도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너에게 가장 소중한 건 네놈의 유희 아니었나? 누군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으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성격파탄자잖아.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고. 삶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누군가를 둘 수 있어야 비로소 소중하다고 일컬을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신후는 서로의 구둣발 끝이 맞닿을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가 강 현을 코앞에서 노려봤다.
“어중간하게 인간 놀이 그만하고 얌전히 처박혀서 기다려. 이번에는 확실히 내 손으로 네 혼을 갈가리 찢어놓을 테니까.”
“이번에는 무엇이든 어중간하게 하지 않으려고. 그래야 너 따위 신의 개한테 또 물리지 않지.”
“어중간하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이쪽도 마찬가지야.”
“인간의 삶에 물들어 어중간하게 살고 있는 요괴의 입에서 잘도 그런 말이 나오는군.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나와 신들의 눈에 넌 그냥 어둑시니일 뿐이야. 잃을 게 많은 그 삶을 네가 과연 망설임 없이 내려놓을 수 있을까? 그것도 마지막 생에서.”
“무엇도 잃지 않고 널 없애면 돼.”
“큭큭…. 그래. 할 수 있다면 해봐. 그래야 내가 즐겁지.”
강 현은 참아내지 못한 웃음을 흘리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간격이 생기자마자 신후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아까부터 꽉 쥐고 있던 주먹을 강 현의 턱에 세게 휘둘렀다.
뻑-
복도 전체에 울릴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다. 겨우 바닥에 쓰러지지 않고 중심을 잡은 강 현은 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신후는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귀혼을 감추고 있더라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그게 방금 전 내 사람을 멋대로 건드린 대가야.”
“…내 사람이라.”
신후는 미련 없이 돌아서 교수실로 향했다. 주먹 한 방으로 아까의 분노가 사라질 리 없었지만, 더 시간을 끌었다간 혼자 있을 신라에게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신후가 사라지는 쪽을 가라앉은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던 강 현은, 다시금 신라와의 키스를 떠올리며 입술을 매만졌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삶에서 우선순위에 둘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