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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장. 지켜줘 (94/126)

93장. 지켜줘

신라는 교수실에 준성이 없음을 확인하고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왔다. 신후는 혼자 생각하고 있었을 때보다 부드러워진 인상으로 신라를 맞았다.

“무슨 일이야?”

“최준성 씨와 얘기는 다 마치셨나 봐요?”

“복도 쪽으로 바로 나갔어.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다시 얘기할 테지만, 앞으로 조력자가 되어주겠다더군.”

“잘된 일이네요.”

신후는 그녀를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그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차 마실래?”

“괜찮아요. 그보다 선배들에게 심각한 얘기를 들었어요.”

그녀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리라.

눈빛이 가라앉는 신후를 보고 신라는 그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고민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처음에는 상상조차 못 했다. 우선과 동주를 그 자리에서 쓰러뜨린 것이 강 현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을 줄이야. 그러고 보니 쓰러져 있는 그들을 보고 강 현은 이렇게 말했었다.

- 그새 당신한테는 또 내가 모르는 일들이 있었나 보네.

“정말 신이 제 몸에 왔다 간 건가요?”

신라가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민 조교와 차 조교를 그렇게 간단하게 기절시켰다는 건 보통의 존재는 아님이 분명해.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정황상 그들이 움직일 때가 되긴 했지.”

“하아….”

그녀는 착잡한 기분으로 이마를 짚었다. 귀신에 괴롭힘을 당하다 못해 신이라는 대단한 존재까지 멋대로 몸에 다녀갔다고 하니, 이제 무엇에 의지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게 뭐죠?”

“너에게 잠시 접신해서 직접 강 현과 그 무리들을 처치할 생각이야.”

“그럼 저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요?”

“본인들이 한 일을 다른 신들에게 감추기 위해, 오로지 네 귀력만을 이용할 거야. 하지만 그들의 힘을 감당하려면 지금 그 귀력만으로는 모자라.”

그 말은, 한계 이상까지 귀력을 소진하게 된다는 소리였다. 반 정도만 줄어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버거웠던 걸 생각하면 모두 다 썼을 때는 죽음까지 간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걱정 마.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신후의 말에 신라의 불안정한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확신해요?”

“혹여 다시 너의 몸에 찾아온다 해도, 쓸데없는 짓은 하지 못하도록 내가 막을 테니까.”

“어떻게요?”

“어떻게든.”

얼핏 보면 평소와 같은 표정이지만, 그의 눈에는 깊은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신라는 그의 시선에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온몸을 짓누르는 긴장감은 여전했다.

“적을 무찌르는 대신 제 몸이 잘못되는 건 감당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힘이라면 그 과정 속에서 제가 소중히 여기는 분들이 휩쓸려서 다치거나 잘못될 수 있잖아요.”

“……”

“그러니까 교수님도 그때가 돼서 무리다 싶으면 멀리 피하셔도…”

큰 손이 그녀의 손을 강하게 쥐어 왔다. 신라는 다소 물기가 어린 눈으로 신후를 바라봤다.

“유신라. 두려우면 두렵다고 해. 참고 견뎌봤자 널 이용하려는 자들이 알아주지 않아.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지 마.”

사실은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딘가로 멀리 도망쳐버리고 싶을 만큼 두려웠다.

“그럼 어떡해요? 무서워해도 결국 일어날 일이라면, 꿋꿋이 견뎌내는 수밖에 없잖아요.”

“좀 더 네 감정에 솔직해져. 두려움도, 억울함도, 모두 너의 감정이야. 널 잃지 말아야 후에 길을 잃더라도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

“감정에 솔직할 수 없는 삶이었어요. 본 것을 보지 못한 척, 들리는 것을 들리지 않는 척…. 그게 편했고,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서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신라는 손끝에서 시작한 떨림이 온몸으로 번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누군가 참아내고 버티라고 했다면 이번에도 숨길 수 있었던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한신후는 기어코 그 감정이 숨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는 도저히 무엇도 숨겨낼 수가 없었다.

“신이 하는 일이라고 늘 옳지만은 않아.”

신후는 그렇게 말하며 신라의 손을 쥐지 않은 쪽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또한 답답한 감정을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이 내가 본 중 가장 최악이지…. 그들이 못 본 체한다 해도 나에겐 네 감정이 가장 중요해. 아무리 사소한 감정 변화도 나에겐 그날의 가장 큰 사건이 되기도 하니까.”

“……”

“나에게 가장 소중한 널 사라지게 내버려 두지 마.”

초연하게 웃는 신라의 눈에서 결국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다시 얘기해봐. 네 감정이 어떤지.”

“도망치고 싶어요.”

신후는 소파에서 움직여 점차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계속 얘기해.”

“왜 하필 나일까, 원망스러워요.”

“또.”

그의 손이 신라의 뺨에서 눈물을 닦아 갔다. 그 따뜻한 손길에 눈물샘은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날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할게.”

“신이든 뭐든, 나에게서 멀리 쫓아줘요.”

“그래.”

“약속해요.”

“약속해.”

신후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고 포근히 감싸 안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늘 의연하게 버티던 여인이 벽을 허물고 두려운 감정을 털어놓은 게 대견할 따름이었다.

인간으로서 대견하다고 느꼈던 이들 중 하나가 또 생각났다. 그녀는 신후에게, 아니 어둑시니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여인이었다.

“내가 알던 인간들 중에 신을 만났던 여인이 또 한 명 있어.”

“그게 누구예요?”

“날 낳아준 어머니.”

신라는 그의 품에서 살짝 벗어나며 시선을 마주쳤다.

“어머니라면….”

“어둑시니를 낳았던 인간 여인이지.”

“그분도 저처럼 귀력을 가지고 태어났나요?”

“어느 정도의 영력은 있었지. 그래서 신을 볼 수 있었던 거야. 그녀에게 머물다 갔던 건 잠시였지만, 그들은 많은 대화를 했어. 후에 어머니는 나에게 말해주셨지. 신들도 결국,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신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게 인간이니까.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도, 멀리할 필요도 없었다고.”

“용감하신 분이었네요.”

“맞아. 반귀인 아들을 낳고 수많은 편견과 멸시를 견디면서도 늘 밝은 심성을 유지했던 여인이니까.”

“그분의 용기를 본받고 싶어요.”

“넌 충분히 용기 있어. 다만 상황이 갑작스레 덮쳐왔을 뿐이지. 어머니의 생각이 맞았어. 신들의 본질은 결국 인간과 다를 바 없어. 그러니까 막연한 두려움에 잡아먹히지 마.”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몸의 떨림이 어느 정도 진정됐다.

“그 시절의 어렸던 당신 모습이 궁금해요.”

“겉보기엔 평범했어. 어머니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튀지 않으려고 노력했지.”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강한 요괴셨나요?”

“…비슷해.”

그에 관해서는 더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신후에, 신라는 잠시 궁금한 마음을 접어두기로 했다. 감추고 싶다기보다 스스로 떠올리기 싫은 기억처럼 보였기 때문에 섭섭한 마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그것이 아직 상처로 남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뿐이었다.

* * *

그 후로 신라에게는 걱정했던 것만큼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길을 걷다가 연구실 사람들도 보지 못하는 본인만의 환각을 본다든지, 환청이 들린다든지 하는 일들은 종종 생겨났다.

그것들은 그녀 본인만의 신경쇠약증이 불러일으킨 환각일 수도, 혹은 신이 의도하여 그녀에게 보이도록 한 광경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점차 그녀의 정신을 좀먹어 들어가는 것임에는 분명했다.

신후는 되도록 신라가 혼자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다. 강의 시간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창가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위태로워 보였다.

‘비형랑도 아직 이 학교에 있다.’

알게 모르게 강 현의 동태에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조금 떨어진 의과대 건물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사학과 건물로 의심 없이 넘어올 수 있는 신분이었으니까.

그가 생각 외로 신라에게 접근하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본래 존재 자체만으로 불순한 존재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기에 조교들과 함께 늘 주의를 기울였다.

올해도 어김없이 마지막 기말고사 기간이 찾아왔다. 공부하는 것은 늘 버거웠지만, 그래도 시험이 끝나면 크리스마스와 연말 행사, 그리고 새로운 해가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학생들은 들뜬 마음으로 공부했다.

반가운 소식은, 동주와 서영이 사귀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전 날 마을 축제에서 함께 데이트한 것을 시작으로 급격히 사이가 가까워졌고, 서영이 용기를 내어 한 고백으로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신라를 비롯한 연구실 사람들은 모두 두 사람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사실 사귀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이는 없었지만 말이다.

서영이 동주와 짬짬이 데이트를 하게 되자 신라는 혼자 공부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나마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하면 신후의 호출이 와서 연구실로 돌아가야 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능력을 써서 찾으러 오는 그 때문에 어딘가에서라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머리를 식힐 겸 독서실이 있는 3층 난간으로 나온 신라는 가을 밤공기를 쐬며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어디에 있든 신후가 순식간에 찾아올 수 있었던 건 바로 귀걸이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만날 때마다 귀걸이가 제대로 끼워져 있는지 집착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정도였다.

- 귀력의 화수분이 저기에 있다….

- 저 여자를 가져다 바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대….

- 누구에게?

신라는 미간을 구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는 이 목소리들이 정말 귀신들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환청인지 알 길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바람을 쐬러 나왔던 커플이 두리번거리는 그녀를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며 건물로 들어갔다.

‘이놈의 신경쇠약….’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기지개를 죽 켜고 건물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섰다.

‘깜짝이야.’

그런데 소리 없이 문가에 서 있는 인영이 하나 더 있었다. 늘 건너편에서 공부하던 다른 과 학생이었다.

‘담배라도 피려나?’

신라는 그를 지나쳐 복도로 들어가기로 했다. 입구가 좁아 바로 앞을 스쳐 갈 수밖에 없었다.

“저기…. 좀 좁아서 그러는데 지나가도 될까요?”

남학생은 어려울 것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한 걸음 바깥으로 나와 주었다.

‘역시 신경과민이었어….’

속으로 생각한 신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복도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 투박한 손이 뻗어져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윽-!”

그는 발을 걸어 넘어뜨린 신라의 위로 올라타 그녀의 귀에서 귀걸이를 단숨에 빼냈다. 그리고 건물 난간 너머로 힘껏 집어 던졌다.

“안 돼…!”

다급히 외치는 신라의 입이 순식간에 틀어 막혔다.

“널 비형랑에게 넘기면 좋은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말이야.”

“읍읍-!”

“얌전히 굴면 상처 하나 없이 끌고 가주지. 하지만 그 전에… 이 달콤해 보이는 귀력을 조금만 맛보면 안 될까?”

남학생의 얼굴이 그대로 신라의 목덜미로 내려왔다. 더럽게 할짝이는 혀로 살갗을 맛보려는 움직임에 소름이 돋은 신라는 귀력을 써 그를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꽤 강한 요괴인지 틈을 주지 않았다.

“읍…!”

이대로라면 정말 귀력을 빨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즈음, 무거웠던 몸이 갑자기 뒤로 밀려났다. 누군가 남학생을 복도 저편까지 던져버리고, 그쪽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하아…. 하아….”

신라는 숨을 고르며 겨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괜찮아요?”

부드럽게 물으며 다가오는 그는 어두운 달빛 아래에서 보면 얼핏 신후의 실루엣과 비슷했으나 전혀 다른 자였다.

“위험했네요. 신라 씨.”

그는 의과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강 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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