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장. 조력자
“아가씨, 길 좀 물읍시다.”
중절모를 쓴 정장의 사내가 캠퍼스 정문에서 신라를 불러 세웠다. 점심시간이 지나 커피를 사 들고 들어오던 그녀는 가방을 멘 쪽 손으로 커피를 옮겨 쥐며 그에게 걸어갔다.
“무슨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고 길을 못 찾겠어서요.”
“말씀하세요.”
“이 학교 심리 상담센터가 어디입니까?”
“아, 심리 상담센터는요…”
신라가 직접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조곤조곤하게 설명할 동안, 어쩐지 사내의 눈빛은 길보다는 신라 쪽에 더 머물러 있었다. 그의 입가가 은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그 건물을 돌아가시면 곧장 보이는….”
설명을 마무리하며 사내를 돌아본 신라는 그 자리에 어느새 아무도 서 있지 않아서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어? 어디 가셨지….”
황망한 기분도 잠시, 그녀를 긴장시키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정문을 가로지르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배우 최준성이었다.
“인사는 걸으면서 하자고, 신라 양.”
준성은 신라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걷던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데리고 걸었다. 검은 점퍼에 기지 바지를 입어 최대한 시선을 덜 끄는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타고난 아우라는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몇몇 학생들이 그를 알아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역시 밤이 아니면 행동하기 곤란하다니까.”
“오늘은 웬일이세요? 준성… 아니, 보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준성이 피식 웃었다.
“그냥 준성이라고 불러. 오빠라고 하는 건 어때?”
“그건… 좀 고민해볼게요.”
신라의 속마음을 읽은 준성은 쓰게 웃었다. 오빠라는 호칭으로 불렀다간 자연스럽게 준호가 떠오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천천히 하자고.”
“연구실로 가고 계신 건가요?”
“응. 그쪽 수장과 나눌 얘기가 있어서.”
그와 보조를 맞춰 걷던 신라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준성이 찾아왔다는 건 결코 좋은 소식이 있어서가 아닐 테니까.
준성은 신라의 안색을 살피며 짐짓 밝게 얘기했다.
“오해하지 마. 특별히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니까. 전할 소식이 있어서 그런 것뿐이야.”
“…역시, 생각을 읽을 줄 아시는군요.”
준성은 어색함을 감추려 뺨을 긁었다.
“뭐, 그렇지.”
“준호 오빠도 생각을 읽을 줄 알았나요?”
“그분께선 일부러 약한 모습으로 인간계에 왔다 가셨어. 별다른 능력은 가져오지 않으셨던 모양이야. 그랬다면 비형랑에게 그런 식으로 죽음을 맞지는 않으셨겠지.”
이번에는 신라의 마음을 읽기 전 본인 실수를 눈치챈 준성이었다. 그는 미안한 얼굴로 그녀에게 먼저 사과했다.
“미안. 내가 너무 무신경했네.”
“…아니에요. 사실을 알려주려고 하셨는걸요.”
“혹시라도 당신 탓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면 큰 오해야. 나약한 모습으로 오셨던 이유는 만에 하나 비형랑을 먼저 찾아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쪽에서 제 발로 찾아오게 자신을 미끼로 쓰셨던 거거든. 그러니까 그 사건도 계획하신 것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신라는 생각했다.
‘내가 먼저 눈치챌 수 있었다면.’
준성은 안쓰러운 미소와 함께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사학과 건물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유신라 양. 내 입장에서 한마디 할게. 나에게 한없이 위대하신 분이 그러길 바라고 그렇게 가셨어. 덕분에 내가 그 유지를 이어받아 놈을 추적하고 있는 거야.
그 과정에 슬픔이 있을 필요는 없어. 나와 신께서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을 인간으로서 먼저 눈치채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건 우리를 기만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다소 냉정해 보였지만, 표정을 보면 오로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다. 신라는 힘없이 입가를 당기며 고개 숙였다.
‘짠해 죽겠네.’
준성은 왜 준호가 이 여인을 그토록 아꼈는지 또 한 번 알게 됐다. 본인 주변의 사건들만으로 벅찬 상황 속에서 주변 사람들까지 혼신을 다해 지켜내려 애쓰는 이 미련함이 신에게는 얼마나 갸륵하게 보이겠는가.
더군다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남 탓을 하기보다는 항상 본인 탓이 먼저였다. 바보 같지만 이런 모습을 신들은 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신후는 막 강의를 마치고 교수실로 돌아오던 참이었다. 문 앞에서 두 사람과 마주친 그는 준성이 왜 갑자기 학교까지 찾아왔는지 어느 정도 짐작한 눈치였다.
“먼저 둘이서만 얘기를 나누도록 할까.”
신후는 준성에게 교수실로 들어올 것을 권하고, 신라에게 후에 부르겠다고 일렀다.
준성은 신후의 안내에 따라 교수실의 소파에 몸을 앉혔다. 신후가 따라서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확인부터 하고 싶군.”
준성이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띤 채 물었다.
“무엇을?”
“넌 지국천왕을 따르는 자이지. 그 외에 다른 사천왕들의 명령도 듣는 존재인가?”
“아니. 난 오로지 한 분만을 모셨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럼 앞으로 널 지국천왕 본인이라고 생각하고 대해도 되겠지?”
준성은 어렴풋이 웃었다.
“지금 네 심장에 다른 신들이 금했던 감정이 들어차 있는 걸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
신후의 눈매가 미묘하게 굳었다. 예상 밖의 얘기였으나, 신의 사자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게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준호가 생전에 했던 말이 머릿속에 스쳐 가고 있었다.
- 그녀가 네가 원하는 감정의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에 수명을 늘리는 죄를 지었다면, 너에게는 그 감정이 없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겠지.
-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세상 끝까지 뒤져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져보아라.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루어지게 만든다면,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그 심장을 못 본 척해 줄 수도 있다.
태어난 이후로 신의 자비를 느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국천왕의 이 같은 행동들은 그들을 향한 오랜 편견마저 깨뜨릴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권선징악의 사천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죄를 판단하는 잣대는 다른 신들에 비해 더욱 정확했던 것이다.
“신라에게 신들 중 하나가 다녀간 모양이야.”
신후는 결국 준성에게 숨겨뒀던 이야기를 꺼냈다. 준성은 아예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닌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바라봤다.
“그분들도 슬슬 움직이실 때라고 생각했어.”
“애초에 신라의 주위를 맴돌던 목적이 바로 이거였나? 강한 귀력의 원천에게 접신하기 위해서?”
“단 한 순간. 누구도 모르게 비형랑을 처치하면 된다고 생각 중이지. 신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인간은 몇 없으니까, 때마침 나타난 유신라가 가장 눈에 띄긴 했을 거야. 귀력이 넘치는 인간 여인이라니, 이보다 더 이용 가치가 있는 이는 드물지.”
“지국천왕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야?”
“알고 계셨지. 애초에 그래서 그녀 가까이에서 지켜주고 계셨던 거거든.”
“나와 연구실 사람들은 단순한 보험이었다는 거군. 우리가 정말 성공할 거라고 믿지 않았던 거야.”
“관점이 틀렸어. 지국천왕께서는 신라 양 곁에 머물면서 점차 그녀에게 딱한 마음을 품게 되셨던 거야. 되도록 신라 양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비형랑을 처치하길 바라셨고, 그게 당신이었지. 다른 신들 입장에서야 비형랑을 없애는 데 인간 한 명으로 족하다면 굳이 당신들 같은 인재들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지만 말이야.”
“내가 살아있는 한 신라가 직접 손에 피를 묻힐 일은 없어. 이 점은 명확히 해 두지.”
신후가 힘주어 얘기하자, 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생각에는 나도 동의해. 지국천왕께서 원하던 바이시기도 했고, 이미 인간으로 환생해버린 귀신의 생사여부에 신이 관여한다는 건 좋지 않은 일이거든. 아무리 대의명분을 가져다 붙여도 결국 당신들이 비형랑이 갖고 있는 ‘신의 죄’를 중간에서 가져갈까 봐 불안해서 직접 움직이시는 거니까.”
신후는 착잡한 기분을 한숨으로 토해냈다. 비형랑의 무리가 저렇게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어쩐지 그들 쪽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싶었다. 이미 그들은 계획대로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 때를 놓치고 후회하지 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그가 친히 찾아와 채찍질을 하고 갔던 것은 역시나 순수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생각하는 일순위는 변함없이 유신라였다. 신후는 그래서 왠지 더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생각해 둔 작전이라도 있는 건가?”
신후의 물음에 준성이 민망한 듯이 웃었다.
“사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 상대가 너무 꼭꼭 숨어 있으니까. 비형랑의 환생은 그 귀혼을 어딘가에 숨겨두었고. 적이 먼저 움직일 때를 기다렸다가 놓치지 않고 잡아 없애는 방법뿐이지.
다만 유신라 양은 앞으로도 간혹 일어날 접신 현상을 이겨내기 위해선 정신 수양을 따로 좀 해야 할 거야. 이번에는 신께서 비형랑을 탐색하기 위해 잠시 다녀가신 모양이지만, 앞으로는 힘을 쓰실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인간의 혼으로 감당키 어려울 수 있어.”
“정신 수양이라면?”
“유신라가 유신라로 있을 수 있도록, 자아를 잘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도록 만들어야 하지.”
“유신라가 유신라로 있을 수 있게…라.”
신후는 지국천왕이 신라에게 주고 갔다던 회귀향을 떠올렸다. 그는 신라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물건을 주었던 것이다.
‘이때를 생각해 건네줬던 거군….’
이쯤 되면 신라가 지국천왕의 가족이라도 되는 것인지 의심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 정도로 신라를 향한 지국천왕의 애정은 지대했다.
신후는 상념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비형랑이야 내가 상대할 수 있다고 쳐도, 만일 그슨대가 동시에 덤비면 막아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어. 그에 대한 대비책은 있는 건가?”
“그슨대는 내가 맡도록 할게. 인간보다는 내 쪽이 놈을 상대하기 훨씬 쉬울 거야.”
신의 사자가 적의 오른팔을 맡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일일 것이다. 신후는 딱히 이의가 없음을 표현했다.
준성은 다시 배우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해 보이는 그에게 신후가 먼저 물었다.
“할 말이 더 남은 건가?”
준성은 단순한 호기심인 듯 멋쩍게 턱을 긁으며 물었다.
“기껏 마지막 감정을 찾아놓고, 신라 양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이유가 뭐지?”
신후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선 채 무덤덤하게 답했다.
“난 그녀에게 아직 죄인이니까.”
“잠깐 생각을 읽어본바, 당신을 그리 원망하고 있진 않았어.”
“내가 되찾은 건 깨닫는 순간부터 쉬워지긴커녕 점점 더 복잡해지는 감정이야. 그 크기가 커질수록 오히려 섣불리 전할 수 없어지게 되거든. 내 과오로 얼룩진 신라의 삶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때까지 무책임하게 내 마음을 드러내고 마음의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 당신도 배우로 살려면 그 감정을 이해하는 게 연기에 도움이 될 거야.”
“알 듯하면서 어렵군. 충고는 감사히 받아두지.”
할 말을 모두 마친 준성은 곧장 연구실에서 나갔다.
신후는 그가 나가자마자 다소 굳어진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따로 언급을 안 하는 걸 보니, 어떤 신이 다녀간 것까진 모르는 모양이군.’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최준성은 믿을 만한 조력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문제는 신라에게 다녀간 신의 정체를 파악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황상 본인들의 과오를 비밀리에 묻어야 하는 사천왕 중 하나임이 분명하긴 했다.
그와 그나마 일면식이 있는 자는 그중에도 으뜸의 지위에 있는 ‘다문천왕’이었다. 다문천왕은 그 옛날 어둑시니에게 직접 벌을 내린 사천왕이었다.
‘이제 와 또 같은 죄를 저지를 만큼 어리석진 않아. 하지만 당신이 먼저 내 사람을 이용하면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내 속죄의 이유가 된 여인이 잘못된다면 더는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이 벌이라고 내린 이 삶 자체가 의미 없어지는 걸 테니까.’
신후는 얼굴마저 까마득한 천상의 존재를 향해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때 연구실 쪽에서 누군가 걸어와 문을 두드리기를 망설였다. 누구의 기척인지 훤히 꿰뚫고 있는 신후는 조금이나마 딱딱했던 표정을 풀었다.
“들어와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