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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장. 예상치 못한 적 (92/126)

91장. 예상치 못한 적

신라의 앞에 다다른 강 현은 그녀와 이야기하기에 앞서 쓰러진 두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우선과 동주에게서는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신라는 강 현이 두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하기 전에 일단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무슨 속셈이에요.”

“아무것도.”

“두 사람을 건드렸다간 정말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난 계획 없이 행동하는 시정잡배가 아니에요, 신라 씨. 그리고…”

강 현의 손이 다소 거칠게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가만있지 않겠다, 그런 구체적이지 못한 말로 날 자극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요. 필사적인 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괴롭힐지도 몰라.”

전보다 더 가학적으로 변한 그의 성격에 신라는 잔뜩 긴장하고 말았다. 그녀가 공포에 사로잡히기 전에 강 현은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뿐이에요. 그새 당신한테는 또 내가 모르는 일들이 있었나 보네.”

그렇게 말한 그는 우선과 동주를 잠깐 내려다봤다.

신라 또한 강 현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 냉소적으로 변한 그의 언행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이 그랬다.

“당신….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거야?”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뿐이라고 말했잖아요.”

“……”

“못 믿는 모양이네. 하긴, 내가 여태껏 당신을 좀 괴롭혔어야지.”

강 현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발을 들어 동주의 어깨를 슬슬 짓눌렀다. 신라가 날 선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그만둬.”

“그거 알아요? 지국천왕을 비롯한 사천왕과 운명을 관장하는 신들은 별개의 존재인 거. 그들은 서로 협력자이자 감시자예요. 그래서 때로는 정보의 소통이 단절되곤 하지. 내가 사천왕이 주시하던 범죄자인 줄도 모르고 어둑시니와 연관된 영혼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운명의 굴레를 끊어버린 걸 보면 알 수 있어.”

“……”

“덕분에 난 ‘나머지’로서 신들의 추적을 더 교묘하게 피해갈 수 있었고. 더 재미있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사천왕이 내가 비형랑의 환생인지 알아냈음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날 처단할 수 없단 점이야.

겨우 운명의 실타래를 정상적으로 만들어놨는데 그걸 다름 아닌 본인들 손으로 망쳐버리면, 운명을 관장하는 신들과 벽을 쌓게 되는 격이거든. 그게 아니면 왜 아직도 날 처단하러 오지 않았겠어? 그들의 눈엣가시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말이야.”

강 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들었다. 지금 그의 손가락에는 귀혼이 담긴 반지가 없었다. 신라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그를 불렀다.

“강 선생님.”

그녀의 부름에 강 현의 눈빛이 잠시 예전처럼 돌아왔다.

“얘기해요.”

“신 같은 거, 난 잘 몰라요. 그중 한 명만 눈으로 봤을 뿐이에요.”

“……”

“그런데 알 것 같아요. 당신이 지금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내 감정이 어떤데요?”

“두려움.”

“……”

“외로움과 두려움. 아닌가요?”

물끄러미 신라를 바라보던 강 현이 작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마치 내가 환자가 된 것 같네요. 진찰을 받으면 이런 기분인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나도 그러니까요.”

“두려운가요? 왜죠? 난 당신만은 해치지 않는다고 했잖아.”

강 현은 신라의 손을 끌어당겨 가까이에 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선을 피하는 얼굴을 붙잡아 그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많이 두려워요? 지금 나와 같이 갈래요?”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뭐죠?”

“내 안위를 생각하는 일차적인 두려움은 이미 오래전에 무뎌졌어요. 선생님도 잘 알잖아요. 내가 뭘 가장 두려워하는지.”

강 현은 입을 다물고 잠시 예전 일을 떠올렸다. 흥미롭게 읽었던 그녀의 오랜 진찰 기록들과 친구를 구하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들을. 바보 같을 정도로 이타적이고 본인은 없는 삶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 당신은 그런 여자였지.”

강 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신라의 뺨을 어루만졌다. 불안함에 일렁거리는 눈동자가 오롯이 그만을 담고 있는 모습이 퍽 만족스러웠다.

“그 두려움의 원인 중에, 나를 생각하는 마음도 들어 있나요?”

아니라고는 대답하지 못하는 신라를 보고 강 현의 미소가 점차 진해졌다.

“착해, 유신라.”

“……”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날 필사적으로 미워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곁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지만 그렇다고 날 직접 찔러 죽이지도 못하지.”

신라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하지만 결국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강 현은 눈물이 묻은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올려놨다.

“따뜻하네. 오랜만이다, 이런 기분.”

“당신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알아?”

“응. 알아.”

강 현은 다가가 신라를 품에 넣고 꽉 끌어안았다.

“어쩔 수 없어. 어둑시니와 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운명이야.”

“…흑….”

“그렇게 힘들면 당신은 선택할 거 없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그 모순적인 모습으로 영원히 있어 줘. 난 그런 당신을 사랑해.”

강 현은 신라의 턱을 들고 자연스럽게 입을 맞췄다. 함락은 빠르고 부드러웠다. 신라는 뒷걸음질 치다가 비탈길 난간에 허리가 닿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잔인한 남자는 그녀에게서 흘러내리는 눈물마저 아깝다는 듯이 턱에 맺힌 것을 입술로 찍으며 가볍게 빨아냈다.

가슴팍을 밀쳐내려 하는 손목을 붙잡아 올리자, 다친 부위인지 짧게 신음하는 소리가 났다. 강 현은 잠시 이성을 되찾고 키스를 멈췄다.

“유신라… 넌 날 미치게 하면서, 미치지 않게 만들어.”

“하아… 하아….”

강 현이 놓아주자마자 신라는 힘이 풀린 다리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때마침 집에서 걸어 내려오던 이삭이 평범하지 않은 광경을 목격하고 큰 목소리를 냈다.

“뭐야, 이게 도대체!?”

우선과 동주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있고, 신라는 웬 남자의 앞에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강 현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이삭을 쳐다보고는 돌아서 골목길을 걸어 내려갔다. 그 예사롭지 않은 기운에 잠시 짓눌려 있던 이삭은 재빨리 우선과 동주에게 달려가 숨이 붙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호흡에는 이상이 없어 보이는 그들이었다.

“그냥 기절했나 보네…. 이봐, 여대생! 괜찮아?”

“…응…. 고마워요.”

신라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핸드폰부터 꺼내 들었다. 때마침 진동이 울리며 신후의 이름이 액정 화면에 떠올랐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 어디예요?”

「…너야말로 어디야.」

무슨 일이 생겼음을 단번에 직감했는지 신후의 목소리가 평소 보다 가라앉았다.

“우선 선배랑 동주 선배가….”

「지금 갈게.」

“빨리 올 필요 없어요. 이미 그자는 갔…”

온 세상이 부지불식간에 어둠에 잡아먹혔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시야가 점멸해서 깜짝 놀라 눈을 비빈 이삭은, 검은 연기를 이끌고 눈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를 보고 기겁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남자는 신라의 몸을 차분히 끌어안고 있었다.

그의 품 안에서 편히 눈을 감은 신라가 중얼거렸다.

“빨리 올 필요 없다니까….”

“이미 늦은 상황 같지만, 이제 떨 필요 없어.”

신후는 신라에게 온기를 전하는 와중에 고개를 돌려 이삭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에 화들짝 놀란 이삭이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귀신인 줄 알았던 남자가 내뱉은 말은 지극히 평범했다.

“어서 구급차를.”

“…아! 으, 응!”

이삭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119를 불렀다. 점차 어둠이 내리깔리고 있는 달동네에 하나둘씩 조명이 켜지고 있었다.

똑똑똑.

다음 날 아침, 간결한 노크 소리와 함께 신후의 교수실 문이 열렸다. 들어온 이는 우선과 동주였다.

“몸은 어때.”

신후가 컴퓨터 화면을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19를 불렀던 건 그들을 그 장소에서 편하게 옮기기 위함이었지 치료를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단순히 기절한 상태였고, 심지어 동주는 구급차 안에서 깨어났으니 말이다.

“덕분에 괜찮습니다. 면목 없네요.”

동주가 먼저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신후는 우선에게도 물었다.

“너는.”

“…보시다시피 괜찮습니다.”

“표정이 석연치 않군. 생각하고 있는 걸 말해봐.”

우선은 동주의 기색을 살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그의 얼굴을 보고 더 이야기를 꺼내기 힘들어지는 기분이었다. 동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선의 어깨를 쥐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넌…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뭐가? 물론 느꼈지. 누군가 강제로 의식을 날려버렸는데 안 이상했겠어?”

“쓰러지기 전에 비형랑의 기척을 느꼈어?”

“…아니.”

“아무리 그 남자가 비형랑이고 귀혼을 숨길 수 있다고 해도, 우리 둘을 동시에 어린아이 다루듯이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야. 그건 교수님도 불가능한 일이고.”

“그럼 도대체 누가 그랬다는 건데?”

우선은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그의 의식을 직접적으로 앗아간 자의 목소리를.

- 잠들어라.

그 목소리의 근원지는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았었다. 우선은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기를 여러 차례 망설였다.

“설마 그 조폭 청년?”

기다리다 못한 동주가 넘겨짚어 봤지만, 우선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영력이 있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야. 너도 느꼈잖아.”

“그렇긴 하지.”

결국 말하기로 마음을 먹은 우선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는 이미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신후를 향해 단호한 어조로 얘기했다.

“신라였습니다. 저희 의식을 빼앗은 건.”

* * *

잘 나가는 배우 최준성은 곧 방영될 예정인 주말 드라마에서 거의 주연급과 마찬가지인 조연의 배역을 따내게 됐다. 오늘은 그 첫 촬영을 하는 날이었다.

그가 세트장에 서서 마지막으로 대사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상대역인 여배우가 다가와 밝게 인사했다.

“오늘 잘 부탁해요, 준성 씨.”

그녀는 동안의 대명사임과 동시에 연기력으로도 대중의 인정을 받는 톱스타급 배우였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해빈 선배님.”

“해빈 선배님은 무슨, 딱딱하게. 대본 리딩 때 그냥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잖아요.”

“감사합니다, 누님! 누님도 말씀 편히 놓으십시오!”

준성의 말재간 덕에 긴장감이 맴돌던 촬영장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촬영 감독이 박수를 치며 모두가 집중하기를 유도했다.

“자자, 첫 씬입니다! 해빈 씨, 준성 씨! 스탠바이-!”

준성은 해빈과 마주 보고 섰다. 첫 대사는 준성의 것이었다.

‘우리 어디에서 본 적 있지 않나? 라고 물으면, 꼬시는 방법이 참 고리타분하네, 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거였지.’

그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계속 시뮬레이션을 했다. 그런데 감독이 ‘큐’를 외치기 전, 여인의 입이 먼저 열렸다.

‘긴장했나?’

준성은 속으로 웃었다. 어쩔 수 없이 첫 NG가 날 것이라고 직감했다. 해빈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때가 다가왔으니 몸을 낮추고 기다려라.”

촬영장 전체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누군가는 잘못 들었다는 표정으로 헤드셋을 벗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내뱉은 건 대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대사였던 것이다.

‘이건….’

준성만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표정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감독이 어색하게 웃으며 해빈에게 말했다.

“실수했네, 해빈 씨. 다시 갈까?”

“네? 어머, 제가 방금 뭐라고 했어요?”

“뭐, 때가 왔다고 기다리라고 그랬잖아. 다른 영화 대사야?”

“아, 아닌데, 그런 대사는 외운 적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대역을 바라보며 준성은 초조하게 입술을 뜯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든,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인 것만은 분명했다.

“미안해요, 준성 씨. 다시 갈게요.”

민망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준성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에게 잠시 머물렀던 ‘그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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