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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장. 접신 (91/126)

90장. 접신

“이놈아! 거기 서-!”

선선하니 날 좋은 가을의 오후, 장 형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거리를 달렸다. 다 잡았던 범인이 경찰차에 오르기 전 줄행랑을 친 것이다. 젊은 남자는 등 뒤로 수갑을 찬 채로 쏜살같이 잘도 달렸다.

“붙잡혀 갈 정도로 나는 잘못한 게 없다니까, 이 짭새야! 이건 명백한 편견이야!”

짧은 머리를 금발로 물들인 남자는 돌아서서 뒤로 껑충껑충 달리며 외쳤다. 조롱하는 듯한 그 행동에 장 형사의 이마에 핏줄이 하나 더 생겼다.

“점집을 난장판으로 뒤집어놓고 업무방해죄가 아니라고? 이 양심도 없는 놈!”

“그 무당 여자가 먼저 우리를 모욕했다니까! 나 참 억울하네!”

“조폭 놈이 억울할 것도 많다! 얌전히 잡혀가서 조서 쓰자!”

“난 잘못한 게 없다니까-!”

그들의 추격전은 인구 밀집도가 높은 대학가까지 이어졌다. 대학생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사람의 추격전을 구경만 할 뿐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수갑을 찬 남자의 날티 나는 비주얼이 꽤 위협적이기도 했고 말이다.

마침 점심을 먹으러 나왔던 우선과 동주가 소란의 근원지로 시선을 옮겼다. 장 형사가 쫓는 남자가 정확히 그들 쪽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장 형사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외쳤다.

“어-이! 그 자식 좀 잡아줘!”

조폭남은 눈앞에 보이는 호리호리한 갈색 머리 사내를 보고 코웃음을 치며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분명히 기가 죽어서 옆으로 비켜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태연하게 옆에 서 있는 키가 큰 남자와 상의하듯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못 들은 척할 생각인가? 잘 생각했어, 이 샌님아.’

조폭남은 조소를 머금은 채 가볍게 우선을 지나쳤다.

아니,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헙-!

지켜보던 사람들이 다들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선생님처럼 얌전하고 고상한 분위기의 남자가 갑자기 조폭남의 한쪽 어깨를 붙잡더니 순식간에 그 몸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짓눌러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조폭남은 본인이 제압당했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깨달았다.

“크윽, 이 샌님이…! 두고 보자!”

우선은 바르작거리는 그의 허리를 방석 삼아 앉은 채 태연스레 장 형사를 기다렸다.

“내가 저 뒤의 녀석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으면 턱이 으스러졌을지도 모르니까 고맙게나 생각하라고.”

“뭐?”

조폭남은 우선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 있는 또 다른 청년에게서 어렴풋이 살기마저 느껴지고 있어서,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마를 땅에 대고 말았다.

“허억, 허억…. 잡았다, 이놈….”

장 형사는 비틀거리며 다가와 우선의 옆, 그러니까 조폭남의 허리에 함께 주저앉았다.

“끄억!”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남자의 입에서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신음이 뱉어졌다. 우선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장 형사를 훑어봤다.

“평소에 운동 안 하세요?”

“네가 내 나이 돼 봐! 여기까지 쫓아온 것도 기적이라고….”

“쯧쯧.”

지켜보던 동주가 배를 잡고 큭큭거렸다. 그 사이 조폭남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아, 나만 잘못한 게 아니라니까!”

장 형사가 그의 허리를 엉덩이로 쿵쿵 찧었다.

“그럼 딱 10초 줄 테니까 변명해봐!”

“커헉! 여, 여동생이 귀신에 들린 것 같아서 점집에 데려갔더니, 치료받으려면 복채를 백만 원이나 달라잖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데려갔던 건데, 사람을 돈줄 취급하니까 내 눈이 뒤집어져, 안 뒤집어져!?”

그 말을 듣고 우선과 동주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나.조.폭.이.에.요.’라고 써 놓은 듯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자존심에 농담으로라도 귀신 얘기를 꺼낼 것 같지는 않았다.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진 장 형사를 쳐다본 우선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 사건은 아무래도 저희 쪽에 위임하셔야겠는데요?”

“…에이!”

상황을 납득하고 만 장 형사는 화풀이로 다시 남자의 허리에 엉덩이를 찧었다.

“커헉!”

조폭남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완전히 넉다운 되고 말았다.

조폭 청년의 이름은 남이삭이었다. 대부업체에서 수금 업무를 맡은 행동 대장으로 평소에도 형사들과 자주 부딪혔다고 했다.

우선과 동주가 확인차 그가 뒤집어놓았다는 점집에 가보니, 무당이라고 앉아 있는 여인에게서는 단 한 점의 영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로, 사기꾼이라는 것이었다.

장 형사는 우선의 말을 믿고 입맛을 다시며 서로 돌아갔다. 업무방해는 명백한 죄였지만 사기꾼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이것 말고도 형사과는 처리해야 할 일투성이였다.

이삭은 툴툴거리며 우선과 동주를 뒤에 붙이고 걸었다. 귀찮은 형사를 떼어내 준 장본인들이니 매몰차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결정적으로, 싸움을 잘했다. 기생오라비처럼 유약하게 생긴 남자마저 말이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이 녀석들. 집에 데려가도 되는 건가….’

이삭에게서 도무지 경계심이 줄어들지 않자, 동주는 극약처방으로 신라를 불렀다. 얌전하게 생긴 여대생이 나타나니 이삭의 이마에 가득 잡혔던 주름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동주가 이삭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이제 뱅글뱅글~ 동네 구경 좀 그만 시키고 집으로 갈까? 여동생 상태가 어떤지 봐주겠다잖아.”

“윽….”

결국 이삭은 체념하고 집으로 곧장 향했다. 그가 사는 집은 허름하고 작은 집채들이 모여 있는 달동네에 있었다. 가파른 비탈길을 삼십여 분이나 올라가야 했다. 우선과 동주는 땀만 조금 흘리는 정도였지만 신라에게는 아니었다. 땀범벅이 된 그녀를 보고 동주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신라야?”

“네! 등산했다고 생각하죠, 뭐.”

이삭은 아직도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집 앞에 멈췄다. 그리고 열쇠로 문을 딴 뒤 세 사람을 돌아봤다.

“누가 먼저 들어갈 거야?”

우선이 먼저 쇠로 된 현관문 가까이 다가가 안에서 어떤 기운이 느껴지는지 파악했다. 희미하긴 했지만, 분명히 요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약하긴 한데,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 되겠어. 일부러 요기를 억누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먼저 들어갈게.”

동주가 선뜻 나섰다. 우선은 이삭에게 물러나 있을 것을 권했다.

“다, 다치게 할 거야?”

이삭이 다급히 물었다. 그러자 동주가 걱정 말라는 듯이 그에게 웃어 보이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작은 단칸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주는 머리를 긁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기척을 잡아낸 우선이 밖에서 외쳤다.

“차동주, 위!”

하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 천장에 달라붙어 기회를 살피던 소녀가 동주의 몸을 덮쳤다.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몇 배는 더 강한 힘이어서 동주의 몸이 방바닥을 굴렀다. 소녀는 양손을 뻗어 동주의 목을 사정없이 졸랐다.

“동주 선배!”

“차동주!”

일반인이었다면 아마 단번에 목이 비틀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피가 몰려 얼굴이 붉어진 동주는 목을 조르고 있는 손을 가까스로 떼어냈다.

“쿨럭…! 엄청 세네…. 이렇게 조그만 몸에 들어가서 어지간히 답답하셨겠어.”

“캬아악-!”

문제는 소녀가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게 귀신을 제령하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수단을 쓰든 가벼운 타박상은 남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 저 조폭 청년이 길길이 날뛸 것만 같았다.

‘어쩐다….’

우선과 동주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신라가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잘 붙잡고 계세요.”

젊은 여자가 시야에 들어오자 소녀가 킬킬대며 웃기 시작했다.

“새로운 먹이네…. 너한테 들어갈까?”

“감당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봐.”

덤덤하게 답한 신라는 허공에서 합장을 했다. 그녀가 뭘 하려고 하는지 깨달은 동주와 우선이 탄성을 내뱉었다.

신라는 오른손을 그러쥐고 단번에 일용도를 뽑아냈다. 해의 기운을 가득 담은 검이 보이는 자들의 눈앞에서 신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뭐, 뭐야, 저거….”

이삭이 헛것을 보는 듯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일용도를 소환한 신라를 보고 소녀에게 접신한 귀신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동요는 일용도 때문만은 아닌 듯 보였다. 소녀의 시선은 일용도가 아닌 신라의 머리 위로 향해 있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선이 그곳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고정됐다.

“누, 누구야! 저리 가!”

신라는 일용도를 들고 소녀와의 거리를 천천히 좁혔다. 그럴수록 귀신의 기세가 점점 더 누그러졌다.

“살려줘! 자, 잘못했… 용서해주세요! 히익!”

우선과 동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귀신이 무엇을 보고 저토록 두려움에 질렸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주저 없이 일용도를 휘둘러 소녀의 몸속에 있는 귀신만을 베었다. 꽤 강한 힘을 가졌던 귀신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조용히 제령 당했다.

눈앞에서 동생이 베이는 것을 목격한 이삭이 깜짝 놀라서 달려가 신라를 밀치고 동생을 끌어안았다.

“이현아, 괜찮아? 오빠야, 정신 차려봐!”

그에게 떠밀려 방바닥에 넘어진 신라는 눈가를 찌푸리며 손목을 쥐었다. 조금 접질린 모양이었다. 우선과 동주가 신라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살폈다.

“신라, 괜찮아?”

“네. 힘줄이 조금 놀랐나 봐요.”

“쯧. 저 녀석, 호들갑은….”

얼마 뒤 이삭의 여동생이 정신을 차렸다. 평소처럼 오빠, 하고 부르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삭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흐윽, 미안하다, 오빠가 미안해!”

“오빠, 왜 울어?”

“저, 저 계집애가 널 이따만한 칼로 베어버렸단 말이야….”

그 말을 듣고 세 사람이 깜짝 놀라 이삭을 쳐다봤다.

“뭐야, 너 그게 보였던 거야?”

동주의 물음에 이삭은 씩씩대며 대답했다.

“그래! 너희 도대체 정체가 뭐야?”

“하긴, 그러고 보니 여동생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영력이 꽤 있는 편이네. 또 귀신에 들리지 않게 조심해라.”

“이, 일 다 봤으면 이만 나가. 사례는 나중에 돈으로 할 테니까….”

“필요 없거든.”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삭과 그의 여동생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달동네에서 바라보는 노을 진 풍경은 꽤나 운치 있었다. 비탈길을 천천히 내려오며, 동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그 귀신은 신라에게서 뭘 본 걸까?”

깜짝 놀란 신라가 대답했다.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군요.”

“접신을 하게 되면 귀신들끼리는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거든. 아마 잠깐 무언가가 네 몸에 다녀간 것 같아.”

“어떤 귀신이었길래 그렇게까지 겁을 먹었을까요….”

“그러게. 가장 무서워해야 할 대상은 그 녀석을 직접 제령시킨 신라 너였는데 말이야.”

민망해져서 입을 다무는 신라를 보고 동주와 우선이 동시에 웃었다.

“일 마무리 됐다고 장 형사 아저씨한테 알려줄까, 말까~”

장난스레 말하며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든 우선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홀로 멈춰 섰다. 그리고 동주를 쳐다봤다.

“차동…”

말을 끝맺기도 전에 우선의 몸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우선 선배…?”

사색으로 질린 신라가 쓰러진 우선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동주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돌아봤지만, 그 또한 이미 의식을 잃고 바닥으로 기울고 있었다.

털썩…!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신라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때 비탈길 아래에서 누군가 단정한 걸음걸이로 올라왔다. 달동네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고상한 분위기의 남자가 붉게 일렁이는 노을 배경을 등지고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강 현….”

신라는 무감정하게 중얼거렸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강 현의 얼굴에 곧 싱그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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