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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장. 목소리 (90/126)

89장. 목소리

신후와 신라가 이야기를 마치고 개천가로 돌아왔을 무렵, 그들의 지인들이 차례로 나타나 모였다. 동주와 서영, 혜령과 건우, 그리고 우선과 태인까지.

그들은 앉을 자리가 마땅하지 않아 개천 둑 위쪽 계단에 일렬로 늘어져 앉았다. 혜령이 신후에게 지갑을 열게 해 모두에게 간식을 쏘게 만들었다.

모두의 관심이 신후에게 몰리자,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던 태인이 주머니를 뒤지더니 손바닥만 한 조개를 꺼내 보였다.

“자! 이것은 내가 아끼는 바다의 보물이다.”

“우와, 예쁘다…. 그게 뭐예요?”

서영이 눈을 빛내며 다가와 물었다. 그에 우쭐해진 태인이 조개를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

“백 년 동안 정성스레 단 하나의 진주를 만들어낸다는 백 년 진주조개지.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진주를 내어주기 위해 입을 벌린다고 해.”

“열린 적이 아직 없는 건가요?”

“응, 아직 없어.”

“제가 한 번 들어봐도 될까요?”

서영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태인에게서 조개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손바닥 위에 수평으로 올려놨다. 모두의 기대감 어린 시선이 몰렸지만, 백 년 진주조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꿈쩍도 안 하나 보구나….”

서영이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조개를 태인에게 돌려줬다.

“또 시험해보고 싶은 사람 없어?”

태인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혜령이 조개를 집어 들고 건우의 뒤로 걸어가 그의 정수리 위에 조개를 올려뒀다. 아니나 다를까 방금 전과 다를 바 없이 움직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조개였다. 괜히 얼굴이 달아오른 건우가 정수리에서 조개를 잡아채면서 혜령에게 발길질 시늉을 했다.

“난 지금 사귀는 사람도 없다고!”

“왜~ 끈질기게 찾아오는 소개팅녀 있다며!”

“난 싫어!”

그들이 실랑이를 하는 통에 조개가 튕겨 나와 신라의 무릎 위에 안착했다. 신라가 조개를 집어 들자, 시끄럽던 잡음이 사라지고 다들 그녀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

민망해진 신라는 얼른 조개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때 조개의 입이 움찔 열렸다 닫히는 것을 대부분이 목격했다.

“대박! 신라, 한 번만 더 들어볼래?”

혜령이 달려들어 신라에게 조개를 쥐여 주려 하자, 신라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신후가 팔을 뻗어 대신 혜령을 막아냈다.

“시시한 장난 그만해. 곤란해하잖아.”

“에이~ 교수님. 지금 여기에서 제일 궁금하면서~”

“다 미신이야.”

“고고학 교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직속 제자들로서 많이 섭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의도치 않게 신후의 체취를 고스란히 느끼고 있던 신라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바닥에 있던 조개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신후의 손 위에 슥, 자연스럽게 올려놨다.

“……”

“……”

신후는 묵직한 무게감이 손에서 느껴지자마자 신라와 눈을 마주쳤다. 이런 깜찍한 돌발행동을 해 놓고도 결백하다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라였다.

다른 이들도 신라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정작 신후의 손 위에 올려진 조개에는 잠시 관심을 끊고 있었다. 그래서 조개의 동태에 이상이 생긴 것을 태인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

그녀는 조개를 가리키며 허무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열렸다….”

그 말을 신호로 모두의 시선이 신후의 손 위로 몰렸다. 태인의 말대로 정말 조개가 입을 벌리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진주를 내보이고 있었다.

먼저 행동한 것은 신후였다. 그는 조개에서 진주를 꺼내 신라에게 건넸다.

“네 거야.”

“……”

신라가 그에게 건넸기 때문인지, 그의 손에 올려졌기 때문인지, 누구로 인해 조개가 열렸는지 다들 확신하지 못했다. 아직 신후에게는 사랑의 감정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정황상 신라 때문에 열렸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개의 입이 열린 타이밍이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난 먼저 가보지. 재밌게들 놀다 가.”

신후는 바지를 털고 일어나 슬슬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백 년 진주를 손안에서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던 신라가 뒤늦게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사 랑 해

어렴풋하던 기시감이 그녀의 마음에서 점차 형체를 잡아가고 있었다.

* * *

강 현은 땀에 흠뻑 젖어 고통스러운 몸짓으로 벽을 긁어내렸다. 인간의 몸으로 감당키 힘든 금지된 주술이 그를 끝도 없는 고통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의 뒤에 조용히 선 윤 노인, 아니 이제는 중년의 모습으로 회춘한 그슨대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읊조리다가 말했다.

“견뎌내셔야 합니다. 그 과정을 버텨야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강한 육신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크윽… 아악…!”

버티다 못한 강 현은 와이셔츠를 찢어내고 살갗을 피가 날 때까지 긁었다. 마치 태양 불에 지져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제정신을 찾기 힘들게 만들었다. 지옥 불에 던져졌을 때도 이 정도로 힘겹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귀신의 몸이었으니 말이다.

“허억…! 그만, 그만-!”

강 현이 벽을 치며 울부짖자, 그슨대가 읊조리던 주문을 멈추었다. 서재에 가득하던 붉은 요기가 점차 희미해지다가 사라졌다.

“오늘은 이만하도록 하지요. 고생하셨습니다.”

그슨대가 서재를 나서고, 강 현은 긴 한숨을 뱉어내며 벽에 기대 스르륵 무너져 앉았다. 턱 끝까지 차올랐던 가쁜 호흡이 겨우겨우 안정을 되찾아갔다.

“하아…. 하아….”

멍하니 넓은 서재를 둘러보는 그의 시선 끝에는 누구도 없었다. 어떤 것들도 허락 없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텅 비어버린 듯한 심장은 결코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 당신은… 외로웠던 거예요. 아무리 억지로 손에 가져도 결국 그것들은 모두 당신 곁에서 떠나가 버렸으니까.

“외로움…이라.”

외로움이란 감정은 피상적으로 가엽고 애처롭다. 세상에 오로지 나 홀로 남은 듯한 지독한 적막함 속에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고 무너진다. 아무리 높은 사회적 지위와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신과의로 살면서 수도 없이 고찰한바, 외로움은 결과적으로 인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나약함이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더이상 드러낼 수 없을 때까지 벌거벗기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다음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것은 그의 본성에서 비롯된 순수한 의지이자 바람이었다.

누군가는 기절할 때까지 오열했고, 누군가는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을 마셨고, 또 누군가는 자해를 했다. 그들의 머리에서 행동을 제약하는 사회적 자아를 걷어내자, 짝사랑하는 이를 스토킹하고, 자해를 넘어서 자살을 하고, 방화를 저지르고, 살인을 했다.

그 감춰진 본성을 드러낼 때 비로소 인간은 극도로 아름다워졌다.

강 현은 조용히 눈을 감고 이 외로움 끝에 무엇이 있는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풍경 속에 단 한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 없이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당신도 외롭잖아.’

강 현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맨발로 땅을 밟고 천천히 나아가자 그가 지나간 자리에 피 묻은 발자국이 생겼다. 그녀는 그 발자국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치지 마. 이게 나라는 남자야.’

빠르게 걸어가 여인의 어깨를 붙들었다. 옷의 단추를 풀고 몸을 감싸고 있는 옷자락을 걷어내 뽀얀 살결을 드러나게 만들었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달콤한 체향을 들이쉬었다. 바르르 떠는 몸이 애처롭고 사랑스러워 꽉 끌어안자, 뺨에 얼굴을 부벼 온다.

- 많이 외로워요?

‘응.’

- 내가 필요하군요.

‘응…. 당신이 필요해. 유신라.’

여인의 손이 찢어진 와이셔츠 자락을 걷어내고 맨살이 드러나게 했다. 그리고 온통 상처투성이인 살결을 어루만져 주었다.

- 날 찾아와요. 밤새도록 안아줄게요.

‘정말이지?’

- 응.

‘날 밀어내지 마. 곧 데리러 갈 테니까….’

강 현은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키스할 것처럼 고개를 틀며 다가갔다. 하지만 입술이 맞닿기 전 환영은 안개가 되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강 현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본인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그는 피 묻은 와이셔츠를 완전히 찢어내 버리며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고요한 새벽녘, 침대에서 신라의 몸이 쉴 새 없이 뒤척였다. 구체적이지 않은 압박감과 공포가 그녀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그녀는 꿈속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야 했다.

‘도대체 누구야? 왜 이렇게 끈질기게 날 쫓아오는 거야!’

필사적으로 달리던 그녀는 어딘가에 걸려 세게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를 뒤쫓아 오던 검은 그림자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발목을 세게 낚아챘다.

‘이거 놔!’

- 도망쳐도 소용없다. 넌 내 눈에서 벗어나지 못해.

‘당신 도대체 누구야!’

- 네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지.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검은 그림자 속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와 그녀의 시야를 점멸시켰다.

-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이미 너에게 다녀갔던 적이 있다. 이번에는 경고를 하기 위해 찾아온 거야.

‘경고…?’

시린 눈을 억지로 치켜뜬 신라가 물었다.

- 어둑시니의 환생과 가까이 있지 마라.

‘뭐?’

신라의 표정에서 공포가 사라지고 의구심이 떠올랐다. 신후의 존재가 언급되자 꿈속에서도 이성이 깨어난 것이다. 더불어 이 상황이 꿈이라는 것까지 인지됐다.

‘당신 누구야?’

- 지금은 알 필요 없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제가 당신 말을 따를 이유가 없잖아요. 다시 물을게요. 당신은 누구죠? 왜 날더러 한신후에게서 떨어지라고 하는 거예요?’

환한 빛 속에 묵묵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던 거대한 몸집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 나는 어둑시… 의… 다.

‘뭐라고요? 잘 안 들렸어요.’

잠시 후, 굵직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에 울렸다.

- 나는… 어둑시니의―

그 뒤의 말이 들리기 전, 몸이 강하게 흔들리며 정신이 깨어났다.

“하아…. 하아….”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멍한 눈을 깜빡거리니, 침대맡에 심각한 얼굴로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신라가 깨어난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붙잡고 있던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창가에 드리워 놓은 커튼 새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니 이른 오전의 시간대인 것 같았다.

“무슨 꿈을 그렇게 깊이 꾸는 거야. 깨어나지 않아서 놀랐잖아.”

“저한테서… 뭔가 느껴졌나요?”

“갑자기 귀력이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사라져버려서 내려왔어.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더군.”

“…저도 잘 모르겠어요. 무슨 꿈을 꾼 건지….”

아직도 신라를 심각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신후는 점차 표정을 풀고 그녀의 머리맡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다시 자. 잠들 때까지 있어 줄 테니까.”

“이미 오전 아닌가요?”

“그렇게 부지런할 거 없어. 아직 시험 기간도 아니잖아.”

“그런가….”

다시 눈을 감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흐트러진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얼굴이 간질거릴 정도로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신라는 물에 잠긴 것 같은 정신을 도저히 깨워낼 수가 없었다. 다시 의식이 잠에 빠져들려고 할 때 손을 부드럽게 감싸오는 감촉이 느껴졌다. 땀이 마른 이마에도 말캉하고 따뜻한 것이 닿아갔다.

기분이 좋아서 잠시 입가가 당겨진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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