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장. Sincerely
신후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신라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렸다. 신후가 일전에 추억을 먹고 다른 기억을 내어주는 요괴를 통해 잊고 있었던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긴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과거에 그가 까맣게 잊은 채 강화 땅에 버려두고 왔던 애처로운 여인을 생각하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 잊으면 안 됐던 기억을, 너무 늦게 되찾았어. 마지막 인사조차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어. 새까맣게 잊어서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치는데도 나에게 큰절을 올리더군. 속도 없는 게 말이야….
스스로 우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그에게 이렇게 위로했었다.
- 그때는 울 수 없었으니까요.
신후가 조용히 손을 뻗어 신라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새까맣게 잊은 난 그때 울 수 없었지. 하지만 더 빨리 기억이 났다 하더라도 울 수 없었을 거야.”
“왜요?”
“애초에 성격이 그래. 연민만으로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성적인 타입이 아니니까.”
“그럼 왜 울었는데요?”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그 아이와 널 이미 동일시했는지도 모르지.”
“설마요….”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붙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가끔은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게 진실에 가까울 때가 있어.”
신후는 생각했다. 고려 시대에 마주쳐 애(愛)의 감정을 일깨워준 여인은 그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고, 후생에 혹시라도 박복한 삶을 살고 있다면 도의적으로 편히 살 수 있게 도우리라- 딱 거기까지만이었다고.
하지만 세 번째 삶, 강화도에서 만났던 재희라는 여인은 일생에 한 번 만날까말까 한 운명의 짝이 아니었을까. 불행히도 그때는 아직 사랑의 감정이 없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신들은 그의 기억 속에서 재희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네 번째 삶, 안타깝게 스쳐 갔던 여인이 그에게 기적처럼 다시금 찾아온 것이다. 왜 하필이면 망쳐놓은 운명이 유신라의 것인가? 너무 박복하기 그지없어서 이는 신이 일부러 설계한 상황일 것이라고 막연한 원망만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은 단지 어둑시니 주변의 인물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리고 예정대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 태어난 유신라를 알아보지 못했다. 기억이 지워진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이 마음까지 조종할 수는 없었고, 시간이 흘러 다시금 만나게 된 운명의 짝을 알아본 것은 스스로의 능력이고 선택이었다.
그래서 유신라는 한신후에게 속죄의 시작점이자 종점인 것이다. 그녀만이 한신후를 진심으로 뉘우치게 만들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도록 허락할 존재였다.
신후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너의 전생이 재희라고 하면 비로소 퍼즐이 맞춰지는 거야. 신들은 나와 가장 연관되었던 비형랑과 재희, 둘의 운명이 굴레를 잘라내길 선택했던 거지.”
“제 운명이 어긋나게 된 게, 전생에 당신을 만났기 때문이라는 소리예요?”
“그런다고 물론 너의 불행이 줄어든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
한신후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막연히 불행의 원인을 그에게서밖에 찾을 수 없었을 때와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전생에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은, 그 원인이 어느 정도 자신에게도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네요.”
“뭐가?”
신라는 발뒤꿈치로 바닥을 톡톡 건드리며 나지막이 속마음을 꺼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었다는 게 놀라워서요. 유치하지만, 당신이 행복을 선물하기 위해 오랜 시간 기다렸던 그 여인과, 엉뚱한 우연으로 당신에게 불행한 삶을 받게 된 내가 그동안 너무 대조됐거든요. 하지만 이 불행이 완전한 우연만은 아니었고, 과거에 당신과 연관된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이라는 소리니까.”
“그런다고 내가 너에게 죄인이라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아.”
“알아요. 그래도….”
신라는 그를 돌아보며 살풋 미소 지었다.
“이제야 당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신후 씨.”
신후는 그녀에게 닿고자 멋대로 뻗어나갈 뻔한 손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다시금 그녀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보게 될 줄 몰랐다. 꿈 요괴의 숲에서 구해냈던 날 밤 비몽사몽간에 내지은 미소에도 모든 것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었는데 말이다.
‘아직 아니야….’
모질지 못한 신라 대신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로 했다.
신라는 상쾌한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짐짓 큰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돌아갈까요? 개천으로. 아직 구경하고 싶은 게 많아요.”
옅게 미소 지은 신후는 일어서서 그녀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가자.”
“지금은 하이힐 같은 거 신고 있지 않은데도요?”
신후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안 붙잡아도 삐지거나 안 해.”
“밤길이 어두워서 그런 걸로 해요.”
신라는 천천히 손을 뻗어 신후에게 내밀었다. 신후는 그 손을 감싸 쥐고 소중한 것 마냥 내려다봤다. 낯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신라는 일부러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거짓말이야. 사실 안 잡아주면 삐질 거였어.”
어색함을 깨기 위해 뱉어진 그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든 신라는, 문득 분수대에 고인 물에 비친 달의 형상을 보고 미소를 옅게 만들었다.
‘어? 보름달이네….’
그녀는 다시 신후를 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름달이 뜨는 날 밤이면 결코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인간의 모습으로 서 있다.
‘뭐지, 이 기시감….’
그때 신라의 귀에 환청처럼 목소리 하나가 스쳐 갔다.
사랑해
분명히 한신후의 목소리였다. 꿈 요괴의 숲에서 들은 것 같은데, 그것이 환각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한 번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떠올려보듯이 신라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사랑해
‘현실이 아니겠지만… 이런 잔상마저 기분이….’
신라가 그렇게 상념에 잠긴 사이 신후는 그녀의 손을 약하게 잡아당겨 자연스럽게 개천가 쪽으로 거닐었다. 그와 속도를 맞춰 걷고 있는 이 상황이 어쩐지 기분 좋아서, 신라는 머지않아 혼자만의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아무렴 어때- 라는 생각이 이성을 온통 점령해나갔다. ‘함께’하게 된 사소한 순간들마저 이렇듯 소중한 선물 같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수업을 마치고 8시가 넘어서야 마을 축제에 도착한 우선은 두리번거리며 연구실 사람들을 찾았다.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부터가 시작인 모양인지 여전히 사람은 많고 시끌벅적했다.
“기운들은 여기저기서 느껴지는데, 누구부터 찾아간담….”
그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양 갈래로 긴 생머리를 묶어 내린 소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마치 아이돌처럼 짧은 치마에 화려한 가죽 재킷을 입고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쯤 훑어보고 지나갈 정도였다.
뒤늦게 존재를 눈치챈 우선이 고개를 들고 소녀를 눈에 담았다.
“너는….”
“얼빠진 표정이로구나! 내가 친히 찾아올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더냐?”
그녀는 동해 용왕의 딸이자 태용의 누이인 태인이었다. 우선은 한숨을 내쉬며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의 허리에 묶어주었다. 그러자 다 드러났던 하얀 다리가 어느 정도 가려졌다.
“이, 이게 뭐야?”
“다 큰 아가씨가 야밤에 이러고 다니면 위험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그쪽이 ‘공주님’인 걸 알 리가 없으니까요.”
“위험해? 뭐가?”
태인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 앙증맞은 모습에 지나가던 남자들이 숨을 헙 들이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우선이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 옷차림은 도대체 누굴 보고 따라한 겁니까?”
“커다란 상자에 이런 옷을 입은 여인네들이 많이 나오더구나.”
TV를 말하는 건가. 속으로 생각한 우선은 다시 물었다.
“그전에는 어떤 옷을 입고 돌아다녔는데요?”
“그야 한복이지!”
“…눈에 엄청 띄었겠네.”
사람으로 둔갑해 있는 것이 영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간단히 호흡을 하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태인이었다. 도저히 이대로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우선은 그녀를 잠시 데리고 다니기로 했다.
보아하니 최소한의 경호자들은 곳곳에 숨어 있는 것 같았지만, 만일 인간들과 시비라도 붙는 날에는 더 귀찮은 일이 발생할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기도 했고 말이다.
“지상의 마을 축제에는 웬일이십니까?”
함께 보조를 맞춰 걷던 우선이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태인이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음료수….”
“네?”
“저번에 네가 주었던 차가운 쇠 껍데기에 담겨 있던 음료 말이다…. 그게 너무 맛이 있어서 계속 생각이 났다.”
웃음이 삐져나올 뻔한 우선은 입가를 매만지는 척하면서 가까스로 그 웃음을 가렸다. 겨우 오렌지 쥬스 하나에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을 하고 지상까지 나들이를 왔다는 소녀가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그럼 비슷한 거라도 한 번 더 마셔보시겠습니까?”
“그게 무엇인데?”
우선은 아무런 생각 없이 태인의 손목을 붙잡아 푸드 코트 쪽으로 이끌었다. 그녀가 드넓은 동해 바다에서 손에 꼽힐 만큼 귀한 신분이란 사실을 잠시 잊은 것이다. 불시에 태인의 몸에 타인의 손이 닿자, 어디선가 날카로운 침 같은 것이 날아와 우선의 손등에 꽂혔다.
“읍….”
작게 신음한 그는 손등에 꽂힌 침을 확인하고 그것을 날린 자를 쳐다봤다. 태인을 경호하던 이가 반사적으로 한 행동 같았다.
“아, 아프냐?”
태인이 퍽 난감해진 얼굴로 발을 구르며 물었다.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내 짓고 있는 태인을 보고 우선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당혹스러워할 줄 몰랐던 것이다.
“아… 괜찮습니다. 다행히 그냥 침인 것 같아서요.”
“…미… 미안….”
“이제부터 이런 일이 없으면 돼요. 이제 쥬스 사러 가요.”
우선은 태인의 손을 붙잡고 살짝 잡아당겼다. 그런데 태인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버티며 섰다.
“왜 그러세요?”
“시, 실은, 그 음료가 너무 맛있었는데 다음날 크게 배앓이를 하였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거예요?”
“그 음료가 아니면 내가 이곳까지 오게 된 명분이 사라지는 걸 어떡해….”
“……”
곰곰이 태인의 생각을 헤아려보던 우선은, 그녀가 애초에 인간계에 찾아왔었던 이유가 은인을 찾기 위해서였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은인은 다름 아닌 전생의 그, 광철이었고 말이다.
“그 은인을 찾으러 오신 거군요.”
“…으응….”
우선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은인이라고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길을 지나가던 중 우연히 발견하고 가벼운 ‘도움’을 준 것뿐이었다. 이렇게까지 목을 맬 필요가 없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벌써 까마득하게 오래전 일입니다. 그자가 만일 환생했고, 기억까지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사소한 일이라서 잊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태인 님도 그만 잊으셔도 됩니다.”
“그 덕에 내가 목숨을 부지했는데 은인을 어떻게 잊는다는 말이냐?”
진심이 가득 담긴 애절한 눈망울을 보고 우선은 그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만일 그 은인이 엄한 요괴놈이라도 됐으면 어떻게 할 뻔했는지, 묘하게 안심마저 되고 있었다.
“배탈이 나지 않을 만한 음식 거리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에 계십시오.”
우선은 그녀를 길가 가장자리에 세워놓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태인의 눈빛에, 왠지 모를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