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장. Andante
아슬아슬하게 스쳐 간 자전거는 어느새 저 멀리로 사라졌다.
“괜찮아?”
형철이 심각한 말투로 물었다. 놀란 눈을 깜빡거리던 신라가 천천히 형철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어렸을 때부터 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던 그였지만, 옷차림이 바뀌어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고마워.”
“조심해. 넌 똘똘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맹한 구석이 많거든.”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둘 다.”
형철은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와, 신라를 이끌고 개천가를 가로지르는 육교 위로 올라갔다. 육교 위는 비교적 사람이 적어 한산한 분위기였다. 축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연인들이 몇몇 있을 뿐이었다.
가만히 육교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던 형철이 입을 열었다.
“사실, 할 말 있어서 축제 오자고 한 거야.”
“할 말?”
마찬가지로 육교 아래를 구경하던 신라가 가볍게 물으며 형철을 돌아봤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사뭇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기분도 덩달아 차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서 있는 뒤로 길게 늘어진 축제의 등불과 도로 위로 수놓아진 차의 조명들이 쉼 없이 반짝거렸다.
“좋아해, 이런 말로는 내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어. 그 짧은 단어에 다 담기에는 우리가 함께해 온 시간이 너무 길잖아.”
형철은 이 순간을 오래 그려온 사람처럼 담담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신라는 도중에 그의 말을 자를 수가 없었다.
“네가 날 아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널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냐고 한다면, 그건 장담하고 나일 테니까. 아마도 지금은 아영이와 너와 나, 세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질까 봐 걱정부터 들겠지.”
“…형철아.”
“평생을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친구로 살면 그건 불가능하지. 삶이 바쁘고, 또 그 와중에 귀신들에게 위협까지 당하며 사는 네가 한 번쯤 나를 남자로 돌아봐 줄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았을 거야. 사실 네가 그런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와 이렇게 가까워진 거였겠지만….”
“……”
형철은 손을 뻗어 신라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한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천천히 할게. 네가 뒷걸음질 치던 것도 잊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아. 난 계속해서 네 친구로, 때로는 오빠처럼, 가족처럼, 항상 이렇게 있을 거야. 어디 안 가고.”
박형철이 유신라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신라는 잘 알았다. 형철이 방금 한 말과 지극히 맞아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걸. 너무도 그다운 말이어서, 이것이 낯부끄러운 고백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그저 본인의 뜻을 전했을 뿐이었다.
‘고마워.’
이 별거 아닌 한 마디조차 속으로만 삼켜내야 하는 상황이 야속해, 신라는 우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형철은 그런 신라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매만졌다.
“그래. 이렇게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야 유신라지.”
“…넌 정말 어른이구나.”
“오늘 한 말들 중에 연습 안 한 대사가 한 개도 없었는데?”
“뭐?”
신라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웃으며 마무리되는 상황이 너무나 소중했다.
형철은 신라를 처음 만났던 자리까지 데려다줬다.
“그럼 가볼게. 사람들이랑 마저 재미있게 놀고.”
“조심히 가.”
고개를 끄덕인 형철은 산책로의 계단을 올라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신라는 방금 있던 일의 여운에 사로잡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직 다 먹지 못한 솜사탕이 들려 있었다.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적지 않은 이목을 끌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안 올 줄 알았어.’
그림처럼 걸어온 남자는 미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신라의 앞에 섰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애인인가 봐.”
“완전 연예인 같아….”
신후는 어두운 니트에 세미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편하게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신라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가 인사를 하듯이 고개를 숙이자 신라의 몸이 움찔했다.
“달아.”
그녀의 손에 들린 솜사탕을 한 입 베어 물고 간 것이다. 한신후와 솜사탕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조합에 신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툭 터뜨렸다.
“솜사탕이니까 당연히 달죠.”
“맛은 있네.”
“다 드실래요?”
“천천히 걸으면서 먹을게. 다른 게 있나 좀 더 둘러보고.”
신후는 신라에게 눈짓하고는 먼저 인파에 합류했다. 신라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옆에서 그와 발걸음을 함께했다. 이것저것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둘러보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에게 이 축제가 시시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영이와는 떨어졌나 보지?”
“네. 아까 전에요.”
“그 뒤로 계속 혼자 있었고?”
“방금 전까지는 형철이와 같이 있었어요.”
신라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낸 신후는 짧은 날숨을 뱉어내며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형철이 신라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은 진즉 눈치챘었다. 사랑의 감정을 되찾기 전에도 느꼈을 정도니, 머지않아 그 마음을 고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흘러가는 대로, 이끌리는 대로….’
인간은 가끔 이런 운치를 빌려 마음을 전하고, 선택을 한다. 다른 때보다 더 들뜬 설렘을 안고 평소라면 없었을 선택지가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돌발적인 선택들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그들만의 운명을 그려낸다. 그것이 인생(人生)의 묘미였다.
늘 관찰자의 입장으로 바라만 봤지만, 어느새 그도 온전한 인간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슬슬 배고플 때 아닌가? 뭐 먹고 싶어?”
신후는 자연스럽게 신라의 손을 붙잡고 근처의 푸드 트럭 쪽으로 이끌었다. 그녀가 음식 종류를 선택하지 못하자 메뉴 세 가지를 모두 주문해 테이크아웃 했다.
두 사람은 개천가에서 올라와 근처의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벤치에 앉으니 음식을 먹기가 훨씬 편했다.
“맛있다….”
볶음밥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던 신라가 중얼거렸다. 웬만하면 감상은 잘 말하지 않는 편인데 오늘은 다행히 입에 잘 맞는 모양이었다. 신후가 밥에는 손을 대지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괜히 민망해진 신라가 그에게 밥을 내밀었다.
“어서 드세요.”
신후는 피식 웃으며 벤치에 걸쳐놨던 손을 들어 그녀의 입꼬리 쪽에 묻어 있던 밥풀을 떼어내 자신의 입으로 넣었다.
“난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콜록!”
당황해서 사레에 들린 신라는 가슴을 치며 기침을 토해냈다. 신후가 돕기 위에 등을 살살 두드려줬다.
“그렇게 도로 뱉어낼 정도로 느끼했어?”
“그게 아니라….”
“놀리는 거야. 어서 먹어.”
“…씨….”
부루퉁하게 다시 숟가락질을 하는 신라를 보고 신후가 즐겁게 웃었다. 신후가 중간부터 합류해서 겨우 3인분을 해치우는 데 성공했다. 신라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일어났다.
“음료수는 제가 뽑아올게요.”
신라는 천천히 달려서 공터 반대편에 있는 자판기 앞으로 갔다. 그리고 고민 끝에 콜라와 캔 커피를 하나씩 뽑았다.
“교수님은 캔 커피 마시겠지….”
중얼거리며 벤치 쪽을 쳐다봤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앉아 있던 신후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져서 주위를 둘러봤다.
“교수님…?”
그의 기운을 무의식적으로 쫓아가니 물이 채워진 커다란 분수대가 나왔다. 밤중이라 분수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구조물이 제법 아름다웠다. 그 옆에 한신후가 편안히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서 있었다.
“여기에서 뭐 하세요?”
신후는 아무 말 없이 이쪽을 돌아봤다. 그의 깊어진 눈빛이 또 현실에 없는 특별한 것을 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저 시선의 끝에 이번에는 무엇이 있을까. 떠나가 버린 운명의 여인이 보이고 있을까? 과거가 아니라면,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을까?
덩달아 차분해진 신라는 그의 앞에 걸어가 캔 커피를 내밀었다. 신후는 그것을 받아 뚜껑을 따며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밤공기가 선선하고 좋군.”
“그러게요.”
신라도 그의 옆에 몸을 앉혔다. 수풀 내음이 느껴지는 곳에서 밤공기를 쐬고 있자니, 며칠 전 산속에 사는 꿈 요괴의 보금자리에서 그와 마주 보고 서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환각이고 현실이었는지 아직도 구분되질 않아….’
그때의 기억을 쫓아 무의식적으로 신후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는 이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숲에서 절 처음 발견하셨을 때, 제가 뭘 하고 있었나요?”
“가만히 서 있었어.”
“무슨 말을 했죠?”
“행복한 것을 보고 있다고 했어. 그러니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했지.”
“…그랬군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신후가 캔 커피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마도 그 행복한 풍경에 나는 없었을 거야. 너에게 행복은커녕, 불행을 안겨다 준 장본인이니까 그럴 만도 하지.”
“……”
“그래서 널 그곳에서 구해내는 게 순간 망설여졌어. 그 행복 속에서 널 꺼내 다시 고통스러운 현실로 데려다 놓는 게 과연 옳은 길일까, 싶어서. 결론은 난 그것밖에는 해줄 수가 없는 무능력한 자더군.”
신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신후처럼 손에 들린 음료수만 만지작거렸다.
“아무튼 감사했어요. 제가 보고 있던 게 어떤 풍경이든, 지금 와서 아무런 쓸모없는 거짓에 불과하니까요.”
“사실이 될 수 있을 뻔한 환각이야. 내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장담할 수 있어요? 내 운명의 굴레가 어긋나지 않았더라도, 난 원래 이렇게 혼자 살아가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잖아요.”
“네가 귀신에게 잘 노려지는 귀력의 화수분으로 태어난 게 내 탓은 맞잖아. 그로 인해 수반된 모든 불편과 고통에 대한 책임은 피해갈 수 없어. 그러니까 네가 날 어떤 식으로 대하든, 난 모두 감내할 수 있어. 넌 내 마지막 생에서야 비로소 만난, 속죄의 시작이자 종점이니까.”
속죄의 시작이자 종점
신라는 어쩐지 가슴 깊숙이 들어온 말을 곱씹었다. 여태껏 한신후 속죄의 시작과 종점은 이미 떠나간 그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네.”
“저를 만나기 전부터 속죄의 삶은 시작된 상태였잖아요.”
“난 죄를 저지르고도 진정한 속죄의 의미를 몰랐어. 그저 적당히 신의 비위를 맞춰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 여인의 혼을 멋대로 설계한 뒤로는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어. 널 만나기 전까진.”
“……”
한신후는 신라를 눈앞에서 빼앗기고 벼랑 끝에 몰려서야 스스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속죄는 명분 따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마음을 짓누르는 괴로움을 떨쳐내기 위한 동아줄과도 같았다.
“이 모든 게 신이 설계한 거라면 난 지금에 와서 그들을 진심으로 경외할 수 있을 정도야.”
“무슨 설계요?”
“널 이전 생에 만나게 한 거.”
신라는 알 수 없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전 생에… 우리가 만났다고요?”
“믿기지 않는다면 억지로 믿을 필요는 없어. 꿈 요괴가 너에게 잠시 전생의 삶을 보여준 모양이더군. 그래서 좀 더 확신을 갖게 됐어.”
그동안 신조차 찾기 힘든 운명의 굴레를 찾아주겠다고 하는 그의 말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해주고 싶은 것과 정말 가능한 일의 경계가 뚜렷이 갈라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구체적인 단서를 가지고 말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신라는 멈춰 있던 가슴이 다시금 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었는데요?”
그리고 당신은 그걸 어떻게 확신해? 분명 전생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많이 다를 텐데.
이채를 띠고 있는 신라의 눈을 바라보며, 신후는 서두르지 않고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 조곤조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