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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장. 초대 (87/126)

86장. 초대

“유신라.”

서영과 함께 캠퍼스를 거닐던 신라는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사학과 건물 벽에 기대 서 있던 이가 그녀를 향해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오랜만.”

“형철아!”

신라가 반색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형철과 일면식이 있는 서영도 그에게 아는 척을 했다. 형철은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공부가 바쁘기로서니, 연락 너무 안 하는데? 유신라.”

“미안. 찾아와줘서 고마워. 잘 지냈어?”

“절에서는 늘 비슷하지, 뭐.”

“어쩐 일이야? 밥은 먹었어?”

“응. 다름이 아니고, 이거 주려고 왔어.”

형철이 내민 것은 마을의 소규모 축제 입장 티켓이었다. 매년 열리는 축제라 동네 주민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정도였다. 개천가를 따라 주전부리를 파는 노점상들이 줄을 서고, 각설이패 공연도 열리는 꽤 커다란 축제였다.

“이번에는 티켓도 파네?”

“규모가 점점 커져서 예산을 감당할 수 없나 봐. 신자들한테 홍보 좀 해달라고 티켓을 한 뭉텅이로 주더라고.”

“고마워. 재미있겠다. 꼭 갈게.”

서영이 티켓을 흔들며 말했다.

“나도 꼭 갈게.”

형철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몇 장 더 줄 테니까 친구들 많이 데려와.”

“진짜? 과 애들 어디 있나 지금 전화해봐야겠다.”

서영이 급히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사이, 형철이 신라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요새는 좀 괜찮아?”

“응?”

“아직도 위험한 일 많이 하고 그래?”

“아…. 난 괜찮아. 오히려 너희한테 또 불똥이 튈까 봐 걱정되곤 해.”

“그런 걱정은 마. 이래 봬도 조연사에 대대로 내려오는 주술들을 거의 연마한 몸이라고.”

“네가 강한 건 물론 잘 알지.”

서영이 통화를 마치는 것을 보고, 형철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내일 밤에 봐.”

“조심히 가.”

형철이 멀어지는 모습을 함께 쳐다보고 있던 서영이 신라를 쿡쿡 찔렀다.

“쟤는 도저히 우리랑 동갑 같지가 않아. 훨씬 오빠 같다니까?”

“풋,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대학교 다녔으면 인기 정말 많았을 거야. 잘생겼지, 몸 좋지, 목소리 좋지….”

그때 그녀들보다 머리 하나 더 큰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누구 얘기야?”

동주였다. 그의 뒤에는 우선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놀라서 숨을 집어삼킨 서영이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 그게, 저기….”

“서영이가 눈이 높았구나.”

“그, 그렇지 않아요! 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일 뿐이고, 하지만 만나고 싶은 남자는 그렇게까지 안 잘 생겨도 되는데, 동주 선배가 안 잘 생겼다는 소리는 아니고요! 아! 그런데 그러면 만나고 싶은 남자라는 게 선배라는 뜻은 또 아니긴 한데…, 그게 아예 또 아니라는 뜻은 아니라요…!”

스스로 말을 끝맺지 못해 울상이 되어버린 서영을 보고 신라와 우선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동주는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긁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눈이 높지 않다는 거지?”

“네에….”

동주는 웃음을 참으며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뭘 그렇게 심각해. 그건 그렇고, 그 손에 들린 티켓은 뭐야?”

“아, 이건 방금 형철이한테 받은 마을 축제 티켓이에요. 여러 장 주고 갔어요. 선배들도 같이 가실래요?”

동주와 우선은 건네받은 티켓을 유심히 관찰했다. 우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6시부터구나. 우리 퇴근하고 바로 가면 되겠다. 차동주 넌 스케줄 어때?”

“아아, 난 학부생들 수업을 그때 잡아놔서, 좀 힘들 것 같아.”

실망으로 물드는 서영의 표정을 보고 우선이 말했다.

“내가 대타 뛰어줄게. 먼저 가서 놀고 있어.”

“어? 진짜?”

“저번에 네가 대타 뛰어줬잖아. 갚는 셈 치라고.”

“오오, 땡큐!”

우선은 동주가 안 보는 사이 서영과 신라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건우와 혜령도 내일 밤 별다른 스케줄이 없어 퇴근한 뒤 개천가 축제를 구경 가기로 했다.

남은 것은 신후뿐이었다. 그의 티켓을 양도받은 신라는 교수실 문 앞에서 노크를 할지 말지 꽤 오래 망설였다.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잠시 잊은 것이다.

똑똑.

문 저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놀랄까 봐 노크하고 연 거야.”

신후가 벽을 짚고 선 채 말했다. 놀리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그는 아마도 진심일 것이다. 신라는 잠시 손에 들린 티켓만 만지작거렸다. 신후의 시선이 그녀의 손을 따라갔다.

“내 건가?”

“뭔지 아세요?”

“글쎄…. 연구실에서 시끄럽게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어딘가의 입장 티켓 같던데. 교수는 빠지는 모임인가 했지.”

“그런 거 아니에요. 형철이가 선물하고 간 거라서, 시간 되시는 분들은 다 같이 가기로 한 거예요.”

신후는 그녀의 손에서 티켓 한 장을 집어 들고 내용을 유심히 살폈다. 그에게는 시시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라의 낯빛이 괜히 민망함으로 물들었다.

“정말 별거 없는 소규모 축제예요. 사실 가봤자 동네 주민들한테 치이기만 할 거예요.”

“구경 가는 건 상관없어. 날 혼자 두지만 않는다면.”

“저희 중 누군가는 같이 있을 거예요.”

“너는?”

“네?”

신후는 벽을 짚었던 손을 떼고 대신 팔짱을 끼며 문틀에 기대섰다.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신후를 보고 신라는 그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해야 했다.

“아…. 저는 아마 서영이와 함께 다닐 것 같아요.”

“그래?”

“……”

“그럼 생각해볼게.”

신후는 그렇게 말하며 일단 티켓을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별다른 할 말이 없어진 신라는 그에게 목례하고 돌아서려 했다.

“신라.”

발걸음을 붙잡는 목소리에 신라의 고개가 천천히 돌려졌다.

“네.”

“티켓 고마워.”

아무리 특별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에게는 신라가 주었다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선물이 되었다. 다시 목례로 답하고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신후는 언제나처럼 자기혐오에 빠졌다. 예전과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대하도록 노력하는 신라의 모습이, 자꾸만 스스로를 간사한 기회주의자로 만들었다.

사 랑 해

물이 흥건한 도화지에서 물감이 번져버리듯이 환각의 기운에 흐릿하게 지워졌던 세 글자를 다시금 저 귀에 똑똑히 들려준다면, 과연 저 하얗고 작은 얼굴에 어떤 색이 피어날까.

함께 기뻐해 줄까? 칭찬해 줄까?

아니면, 무서워서 달아날까?

‘네가 달아난다 해도, 난….’

올해 축제는 홍보가 잘 된 모양인지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중고생들부터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까지, 개천가에서 선선한 가을밤을 마음껏 즐겼다.

“신라, 저기 봐! 맛있는 것도 엄청 많이 팔아~”

신난 서영이 신라의 손을 애타게 잡아당겼다. 신라는 웃으며 그녀에게 이끌려갔다.

“와, 예쁘다!”

서영이 처음 멈춰 선 곳은 팔찌와 귀걸이를 파는 플리마켓이었다. 신라도 솜씨 좋게 만들어진 공예품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두 사람이 한창 축제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 때, 여러 개의 그림자들이 뒤에서 나타났다.

“안녕, 아가씨들.”

혜령이 두 사람에게 동시에 어깨동무를 했다. 고고학 연구실 조교들이 함께 온 것이다. 우선은 동주 대신 학부생들 수업을 하느라 조금 늦을 예정이었다.

“생각 보다 북적여서 재미있네. 뭐 하고 있었어?”

혜령의 물음에, 동주를 발견하자마자 뺨이 살짝 발그레해져 있던 서영이 대답했다.

“신라랑 플리마켓부터 구경하고 있었어요. 예쁜 것들이 많아서요.”

“음~ 소녀소녀 해라. 갖고 싶은 거 있어? 하나 사 줄까?”

“선배~ 그렇게 설레게 하시면 안 돼요….”

“아~ 서영이는 이런 걸로 설레는구나?”

혜령이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슬쩍 동주의 옆구리를 찔렀다.

“억!”

“차동주, 뭐해? 너도 여동생 거 하나 사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 그랬는데 왜….”

“서영이도 이런 거 좋아한다잖아. 둘이 쭉 돌고 와. 응?”

“하지만 서영이는 신라랑 같이 다니고 있었-”

잠깐 사이에 혜령의 눈짓을 신호로 받은 신라가 어색하게나마 끼어들었다.

“아! 저는 배가 너무 고파서요. 선배들이랑 푸드 트럭에서 먼저 허기 좀 채우고 있을게요.”

“아…. 그래?”

민망하게 머리를 긁적인 동주가 서영을 돌아봤다.

“그럼, 이쪽으로 가볼까? 어디부터 봤어?”

“그, 그냥 아무 쪽으로나 가면 돼요. 저희도 이 가게가 처음이어서….”

“그래. 그럼 가자.”

“네.”

동주가 먼저 걸음을 옮기고, 서영은 긴장한 표정으로 모두에게 손 인사를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쳐다보던 혜령이,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는 신라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누구 찾아?”

“아….”

사실 만나기로 구체적인 약속을 잡았던 건 형철이었다. 그런데 방금 전 무의식적으로 찾았던 사람이 형철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정확히 장담할 수가 없었다.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 있으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빠져줘야겠네?”

“아, 안 그러셔도….”

“그렇다고 아주 빠이빠이는 아니다. 조금 둘러보다가 전화할게.”

“네, 감사합니다.”

혜령은 웃으며 바람에 조금 날린 신라의 머리를 정돈해주었다. 건우는 혜령과 자리를 뜨기 전 신라에게 당부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특히 마을 축제에는 잡귀들이 많으니까 항상 조심해.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무심한 듯 챙겨주는 건우의 마음이 고마워, 신라는 밝은 미소로 답했다. 그녀를 구하려다 가장 두려워하는 자에게 붙잡혀 가기까지 했었던 그가 이렇듯 변함없이 안위를 신경 써 주니 말이다.

“오우, 조건우 멋있는데~”

혜령이 일부러 과장된 말투로 칭찬하며 엄지를 치켜세우자, 콧방귀를 뀐 건우가 먼저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혜령은 신라에게 마지막으로 손 하트를 날리고는 건우를 따라갔다.

“휴….”

왠지 정신없었던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길의 가장자리에 얌전히 서 있었다. 바닥을 쳐다본 채 발 장난을 하고 있을 때, 그녀의 눈앞에 솜사탕 두 개가 불쑥 내밀어졌다.

“어?”

고개를 드니, 형철이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그림자랑 대화라도 해?”

“박형철!”

형철은 솜사탕 하나를 신라의 손에 쥐여주었다.

“웬 솜사탕이야?”

“어렸을 때 같이 먹었었던 게 갑자기 기억나서. 그런데 왜 혼자야?”

“어쩌다 보니.”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 맞지?”

“응.”

마주 보며 웃은 두 사람은 나란히 솜사탕을 들고 사람들의 물결에 합류했다. 형철은 평소와 달리 개량 한복 차림이 아닌 사복 차림이었다. 다림질이 잘 된 스트라이프 셔츠에 청바지를 입으니 보통의 대학생처럼 보였다.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한 번쯤 힐끔 쳐다보고 갈 정도로 말끔한 외모였다.

“서영이가 한 말이 맞았어.”

“응? 무슨 말?”

“네가 대학교에 다녔다면 인기가 많았을 거라고 했거든. 사람들 시선을 보니까 그게 맞는 것 같아서.”

형철은 듣기에 나쁘지 않은 듯 입가를 당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신라를 슬쩍 쳐다봤다.

“너는 원래 그렇게 생각 안 했었나 보지?”

“네가 어딜 가나 안 빠지는 녀석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지.”

“그게 다야?”

“그럼. 엄지라도 치켜세워 줘?”

장난스레 엄지를 들어 보이는 신라를 보고 형철이 즐겁게 웃었다. 그가 웃는 걸 보고 신라도 덩달아 웃음을 흘렸다.

“아, 이렇게 축제에 오니까 좋다. 대학교 축제보다 훨씬 즐거워.”

“그때는 네가 준비위원회였다며? 그러니까 재미가 없었겠지.”

“그런가?”

“즐겁다니 다행이네. 네가 머리가 복잡해 보여서 이렇게라도 쉬게 해주고 싶었거든.”

“……”

의외의 소리를 들은 것처럼 신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옅어졌다.

“잠깐 본 게 다인데…. 그렇게 티가 많이 났어?”

“우리가 몇 년지기냐. 그 정도는 네 눈썹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풋, 그게 뭐야.”

“거짓말 아닌데.”

그때 자전거 한 대가 사람들을 가르며 쏜살같이 달려왔다. 웃느라 걸음이 흐트러져 자전거의 진로에 서게 된 신라를 발견한 형철이 그녀를 잡아당겨 빠르게 품으로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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