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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장. 고백 (86/126)

85장. 고백

“화비-! 어디 있어-!”

꿈 요괴의 숲을 자욱이 뒤덮고 있던 뿌연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그러자 멀찍이 서 있는 인영(人影)이 신라의 눈에 들어왔다.

“화비니…?”

신라의 목소리를 듣고 그 인영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신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한신후….”

그는 다름 아닌 신후였다. 오늘 아침에 보았던 것과 같은 옷차림인 것을 보니 분명 한신후가 맞았다.

“교수님.”

그녀를 바라보는 신후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의 몸을 가리고 있던 안개마저 모두 걷히자, 피에 젖은 그의 옷가지가 보였다.

그는 커다랗고 흉측한 검을 들고 있었고, 그의 발아래에 세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챈 신라는 입을 가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엄마…, 아빠…, 할머니….”

신후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 미안해.

신라는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당신이 그런 게 아니야.”

- 아니, 내가 그런 거야. 내가 네 소중한 사람들이 이렇게 되도록 만든 거야.

“아니야-!!”

- 미안해. 미안해, 신라.

신라는 귀를 틀어막으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니야… 아니야… 계속 중얼거려 봐도 눈앞의 참혹한 광경은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시각, 전화를 계속 받지 않는 신라 때문에 신후는 교수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고 연구실에 남았다. 마침 대학원생 수업이 끝나고 동주와 우선이 연구실로 돌아왔다.

동주는 화비도 연락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상황을 대충 눈치챘다.

“아마 꿈 요괴의 소굴에 갔는지도 몰라요. 얼마 전에 화비가 물어본 적이 있거든요.”

“왜 신라가 거기에 따라간 거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서 가서 구하지 않으면 꿈 요괴에게 마음이 먹혀서 꺼내 올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 녀석은 도망치고 싶은 과거를 보여주고, 거짓으로 만든 행복한 기억으로 먹이를 사로잡아서 죽을 때까지 귀력을 빨아먹는 요괴니까.”

신후는 혀를 차며 교수실에서 코트를 걸치고 나왔다.

“어서 안내해.”

신후와 동주는 차를 타고 꿈 요괴의 소굴이 있는 산에 다다랐다. 동주가 진입하기에 앞서 얘기했다.

“만약 행복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게 거짓임을 일깨워주는 방법밖에 없어요.”

“어떻게.”

“그를 찾으러 온 쪽이 진짜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해요. 아마 각자 다르겠죠.”

두 사람은 각자 흩어져 신라와 화비를 찾기로 했다. 신라의 귀걸이에 담긴 기운을 쫓아 산속으로 진입하던 신후는 곧 나무 기둥 아래에 피워진 회귀향을 발견했다. 그는 연기가 한 방향으로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 왜 왔어요?

신라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앞쪽에서 안개를 가르고 나타난 여인이 그를 향해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신라.”

- 당신이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래서 엉망이 된 내 과거도 정상으로 돌아오면 좋을 텐데.

신후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 이 이상 다가오지 말아요. 당신을 죽일지도 몰라.

신후는 그 말을 듣고도 멈췄던 다리를 움직였다. 한달음에 달려온 신라가 그의 가슴팍에 날카로운 검을 꽂아 넣었다. 하지만 애초에 환영이었던 그것은 안개로 변해 사라져버렸다.

회귀향의 연기를 쫓아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신라가 나타났다. 부모를 여의고 울고 있는 어린 신라가 있었고, 귀신에 쫓기다가 지쳐서 울고 있는 학창 시절의 신라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신후를 욕했고,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신후의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회귀향의 연기가 멈춘 곳에 진짜 신라가 서 있었다. 그녀는 무슨 환각을 보고 있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예쁘게도 웃고 있었다.

신후가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신라.”

웃음을 멈춘 신라가 그를 천천히 돌아봤다.

“누구세요?”

“뭘 보고 있지?”

“가족들과 함께 있어요. 오늘은 할머니 생신이시거든요. 케잌의 촛불을 켜야 해요. 잠시만 기다려주실래요?”

“…행복해?”

돌아섰던 신라가 다시 신후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 슬픈 웃음을 그리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네, 행복해요.”

“……”

“당신이 누구든, 이 행복을 깨러 왔다면 이만 떠나주세요. 난 이곳이 좋아요.”

신후는 다가가 신라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뿌리치려는 그녀를 억지로 돌려세워 마주 보게 만들었다.

“그건 진짜가 아니야.”

“아니요, 그런 건 상관없어요.”

“미안해.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듣기 싫어요!”

고개를 숙이며 외친 신라가 눈물로 땅을 적셨다.

“이미 이곳에서 수도 없이 들었어…. 더는 그런 말 듣기 싫어. 당신이 미안하지 않은 현실에 있고 싶어. 더는 듣기 싫어.”

“……”

“당신이 나에게 죄인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가 이곳에 다다를 때까지 신라의 손에 수없이 할퀴어지고 찔렸듯이, 그녀도 마찬가지로 그의 사죄를 수없이 듣고 부정했을 것이었다.

지쳐버린 그녀에게 지금 서 있는 이곳이 현실임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이것이 그녀가 현실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오만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진심으로 자신의 저주가 끝나기를 바라준 여인에게 보답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답해줄 필요는 없어. 이건 일방적인 거니까.’

그는 신라의 귓가에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랑해.”

그 짧은 단어에 숙여져 있던 신라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녀는 눈물 젖은 눈으로 신후를 멍하니 바라봤다. 방금 들은 말을 의심하는 것 같았다. 환각에서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말임이 분명해, 신후는 쓰게 웃었다.

스스로 숨겨두었던 애(愛)의 감정을 되찾았다는 걸 그녀에게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 감정에 휩쓸려 그녀가 억지로 용서하게 되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기 힘든 이 공간에서라도 넘쳐흐르는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그는 신라와 이마를 맞댄 채 다시 한번 속삭였다.

“사랑해.”

“……”

“돌아가자. 더는 불행하게 하지 않아. 약속했잖아.”

그의 손이 신라의 손을 붙잡아 강하게 이끌었다. 한순간 신라의 시야에 가득 찼던 환상들이 씻겨 내려가듯 사라졌다. 나머지 요기들은 신후가 그의 기운으로 밀어내 버렸다. 멍하니 이끌려가던 신라가 입을 열었다.

“이것도… 꿈이에요?”

신후가 웃으며 그녀를 돌아봤다.

“널 현실로 데려가는 꿈일지도 모르지.”

“한신후….”

신후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신라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금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증명해주세요. 당신이 진짜 한신후라는 걸.”

“어떻게?”

“어떻게든요.”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벌써 몇 시간을 현실 같은 꿈에 갇혀 있었을 테니 말이다. 신후는 신라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눈 감아.”

“왜…”

그의 입술이 말을 끝맺지 못한 입술을 틀어막듯이 머금었다. 입안을 부드럽게 헤젓는 감미로운 키스에 취해 신라의 두 눈이 절로 감겼다.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는 팔 덕에 겨우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었다. 허공에서 떨리고 있던 두 손이 신후의 등을 천천히 감쌌다. 애타게 혀뿌리를 빨아당기고 타액을 삼키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치열을 하나하나 훑으며 호흡을 고르는 남자의 키스는,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하고, 또 익숙했다.

눈물이 날 것처럼 따뜻했다.

“다시… 다시 말해줘요….”

“사랑해.”

“다시….”

“사랑해.”

이 남자가 내뱉는 세 글자에 왜 이리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그 이유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항상 듣고 싶었던 말임이 분명했다. 신라는 울 것처럼 일그러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신후를 와락 끌어안았다.

신후 또한 그녀를 꽉 끌어안고 젖은 눈가에 계속해서 입 맞췄다.

- 당신이 요괴로 남을 수도 있고 인간이 될 수도 있다면, 그 따뜻함으로 인간이 되시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모습일 것입니다.

꿈 요괴는 애초에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쫓아와 해코지를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화비와 그의 여우귀 친구는 동주에게 구해진 뒤 그 자리에서 혼쭐이 났다.

신라는 신후에게 업힌 채로 나타났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여서, 동주의 표정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신후는 별일이 아니라며 그에게 학교가 아닌 오피스텔에 내려달라고 했다.

신후는 신라를 품에 안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흙먼지가 묻은 겉옷만 벗겨내고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것 같은 붉은 눈가가 안타까워 손을 떼기 힘들었다.

“잘 자.”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침대에서 떨어지려는데, 약한 손길에 옷깃이 붙잡혔다.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신라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깼어?”

“좋은 꿈을 꿨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요.”

신후는 옅게 웃었다.

“그런 꿈을 보여주는 곳이었어.”

“당신이 날 데리러 왔어요?”

“그래.”

눈가를 찌푸리며 기억을 떠올리려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그녀의 머리맡에 다시 앉아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억지로 떠올릴 필요 없어.”

“많은 환상을 봤는데… 그중에는 제 모습이 아닌 환상도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생생해서, 누군가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 그냥 제가 가지고 있는 기억 같았어요.”

“그래?”

“이름이 뭐랬더라…. ‘재희’랬나.”

신라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자마자 신후의 호흡이 뚝 멈췄다.

“…뭐라고?”

“아… 당신도 봤어요. 말을 타고 와서, 약 같은 것들을 건네주고 가버렸어요. 전 당신을 도령이라고 웃기게 불렀고요….”

“좀 더 얘기해봐.”

“풋, 억지로 떠올리지 말랬으면서….”

해사하게 웃는 여인의 얼굴은 그 자체만으로 완전했다. 전생에 누구였든 상관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과거의 굴레를 찾아 연결시켜주는 것은 오롯이 그의 역할이었다.

신후는 곧 체념의 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신라가 오랜만에 미소를 되찾은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 지금은 좀 쉬어.”

“그 기억이 정말 제 거였을까요?”

그렇다면 정말 멋진 일이겠지. 작게 속삭인 신후가 신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서 자둬. 많이 피곤할 거야.”

“당신, 많이 달라졌어요.”

“뭐가?”

신라의 눈꺼풀이 금방 잠들려는 사람처럼 꿈뻑거렸다.

“무척 무뚝뚝하고 표정도 없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웃고 있잖아. 내 마음마저 따뜻하게 만들어 줄 정도로.”

“……”

“…역시… 훨씬 어울려…. 사람 쪽이….”

신라는 신후의 손을 붙잡은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전생의 모습과 비교한 거겠지.’

그녀가 꿈 요괴의 숲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후는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신라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 * *

라디오 DJ 김여욱의 몸에서 빠져나온 그슨새는 갈 곳이 없어져 비형랑의 거처를 배회했다. 금방 다음 육신을 마련해줄 줄 알았지만, 저택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번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몸을 달라고 해야겠어.’

연예인이기 때문에 생기는 행동 제약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어차피 한 번 쓰고 버릴 몸이라 매개체도 쓰지 않고 단순 빙의했던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때 저택의 문이 안쪽에서부터 열렸다.

‘들어오라는 거군. 드디어….’

그슨새는 새처럼 날아 저택의 로비로 단숨에 들어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비형랑은 없고, 그의 오른팔이자 책사인 윤 노인―그슨대가 서 있었다. 얼마 전 그가 머물던 요양 병원에서 대담을 한 뒤 처음 보는 것이었다.

- 다음 육신은 어디 있는 겁니까?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슨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윤 노인이 손을 휘젓자, 저택의 현관이 저절로 닫혔다. 시중을 드는 자들이 다가와 그슨새가 도망갈 수 있는 퇴로를 차단했다.

-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주군과 상의한 결과, 자네의 가치는 이번 일로 모두 소진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네.”

- 그게 무슨 소리야!

“상대를 내면부터 무너뜨리는 것은 나나 자네나 마찬가지. 같은 능력을 둘이 갖고 있을 필요는 없지. 그러니 자네의 힘을 나에게 귀속시키기로 했네.”

- 웃기지 마.

조소를 내뱉은 그슨새는 로비 공간을 빠르게 날아다니며 달아날 구멍을 찾았다.

하지만 윤 노인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가 허공에 합장을 하자, 로비의 바닥이며 천장까지 모두 붉은 글귀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 개의 혼을 하나로 합치는 금지된 주술이었다.

- 끄아악…!

그슨새는 끝끝내 버텼으나, 결국 힘에 부쳐 회오리에 휘말리듯 빠르게 윤 노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한 손이 윤 노인의 가슴팍에 튀어나와 허공을 붙잡으려는 듯이 허우적거렸다. 윤 노인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 손을 가슴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동시에 비명 소리도 사라져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후우….”

윤 노인은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 지었다. 귀기를 흡수하자 주름졌던 노인의 얼굴이 회춘해 중년 남성의 얼굴로 변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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