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장. 꿈 요괴의 숲
날이 저물 무렵에야 연구실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퇴근했다.
신라는 연구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최준성―보주에게 받은 일용도를 다시 소환해보았다.
‘준호 오빠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
처음 다뤄보지만, 왠지 익숙한 그것을 사라지게 만들었다가 다시 꺼냈다가 반복하고 있을 때, 교수실 쪽 문이 열리고 퇴근 준비를 마친 신후가 가방을 멘 채 걸어 들어왔다.
“사용해 봐도 돼.”
그렇게 말한 그는 신라의 앞으로 걸어와 반듯이 섰다. 신라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어디…에요?”
“날 베어봐.”
농담으로 들은 그녀는 어이없는 듯이 웃어버렸다. 하지만 신후의 표정은 진지했다.
“어서.”
“…싫어요.”
“정말 필요할 때 주저 없이 사용하기 위해선 감각을 익혀야 해.”
“연습할 대상이 교수님일 필요는 없잖아요.”
“달리 방법이 없잖아.”
곰곰이 생각하던 신라는 준성이 했던 것처럼 허공에서 합장한 자세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다른 쪽 팔을 들어, 검으로 자신의 손목을 힘껏 내리쳤다. 지켜보던 신후의 다리가 움찔 움직였다.
“정말 안 베고 싶은 건 안 베어내네요.”
무미건조하게 말한 그녀는 검을 사라지게 만든 다음 가방을 메고 먼저 연구실을 나서려 했다. 뒤따라온 신후가 그녀가 열려던 문을 도로 닫아 멈추게 했다.
“방금 그 행동은 별로 좋지 않았어.”
“왜요?”
당당하게 대답한 신라가 돌아서서 신후를 똑바로 쳐다봤다.
“정말 확실했기 때문에 교수님한테 시험해보라고 한 거 아니었어요? 그럼 날 베어 봐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요?”
“그건 다른 문제야.”
“아니요. 같아요. 내가 날 베는 모습이 보기 싫은 거라면, 나도 당신이 베어지는 모습을 보기 싫은 것뿐이에요.”
“……”
물끄러미 신라를 바라보던 신후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졌다는 뜻을 내비쳤다.
“사실은 확인하고 싶었어. 혹시 네가 날 조금이라도 베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고 있는지.”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정말 검에 베어져도 할 말 없다고 생각했지.”
어이없다는 얼굴로 신후를 쳐다보던 신라는, 다시 일용도를 소환해 쥐었다. 그리고 신후의 몸을 사선으로 베어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신후는 신라의 화가 난 눈을 보고 피식 웃어버렸다.
“웃겨요?”
“아니.”
“뭔가는 베어졌을지도 몰라요. 당신의 그 제 몸 아낄 줄 모르는 미련함이 순간적으로 너무 싫었거든요.”
“확실히 그 검의 주인은 네가 맞나봐. 이렇게 처음부터 잘 다루는 사람은 드물 거야.”
“……”
신라는 조금 숙연해진 눈빛으로 검을 사라지게 했다. 그녀가 누구를 떠올리고 있는지 눈치챈 신후는 그녀의 눈가를 매만졌다.
“최근에 다녀갔지?”
“…네.”
“무슨 얘기를 했어?”
신후로 인해 운명의 굴레가 끊겼다는 사실에 힘겨워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지국천왕은 스스로의 존재를 하찮게 여기지 말라는 말과 신후에게 가서 직접 화를 내라는 말을 해주었었다. 또한 화비를 통해 신후가 오래도록 기다리던 여인의 영혼과 만나게 해주었다.
“비밀이에요.”
“……”
신라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가방에 손을 넣어 작은 향 갑을 꺼내 들었다.
“저한테 또 다른 십장생의 보물을 주고 갔었어요. 구름의 기운을 담은 회귀향(回歸香)이라던가….”
“회귀향…?”
신후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가 꺼내 든 것을 살펴봤다.
“그자가 널 찾아와서 이걸 주고 갔다고?”
“네. 어딘가로 되돌아올 수 없을 때, 그 향을 피우라고 했어요.”
“……”
굳어진 신후의 표정은 다시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되돌아올 수 없다…. 신라에게 언젠가 그런 일이 생기게 될 거라는 소리인가.’
신이 인간에게 쓸데없는 선물을 했을 리가 없다. 신후는 일단 향 갑을 신라에게 되돌려줬다.
“가방이 아니라 몸 가까이에 지니고 있도록 해.”
“…네.”
두 사람은 교수회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시동을 건 신후는 신라가 안전벨트를 채우는 것을 확인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학교를 빠져나가 신호에 걸리자, 무언가 생각났는지 신후가 피식 웃었다. 그 소리를 듣고 신라가 그를 의아하게 돌아봤다.
“왜 그러세요?”
“학교에서 나오면 앞으로도 존칭은 빼지 그래.”
“네?”
“이름으로 부르는 거. 듣기 좋아서.”
“……”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본 신라는 곧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추병귀에게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는 그에게 자기도 모르게 이름을 외쳐 말렸던 게 떠올랐다.
“그, 건 실수였어요. 죄송해요.”
“또 있어. 네가 내 이름 부른 적.”
“…제가요?”
“그때 절벽에서. 추락하는 널 붙잡아 끌어안고 있으니까 네가 유령 보듯이 쳐다보면서 불렀었어.”
“……”
“그전에는 장난처럼 곧잘 불렀었는데, 최근 들어 또 부르고 있어서 기분이 좋아.”
사랑을 완전히 잊은 사람이라서 그런가, 속마음을 말하는 데에 이토록 거침이 없다. 신라는 붉어진 뺨이 식을 기미가 없어서 작게 손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슬쩍 신후를 돌아봤다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운전에 집중하고 있을 줄 알았던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귓불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교수님…?”
“좀 덥네.”
그는 운전하는 도중 차창을 살짝 내렸다. 고개가 반대쪽으로 틀어지자 붉어진 목덜미도 보였다.
“……”
“……”
시원한 밤공기가 차 안으로 새어 들어와 열기를 조금 식혀주는 듯했다.
* * *
“신라.”
학교 근처를 걷다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신라는 깜짝 놀라 주위를 돌아봤다. 일전에 추병귀에게 끌려가 몹쓸 짓을 당할 뻔한 이후로 생긴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신라를 부른 것은 다행히 익숙한 존재였다.
“화비!”
화비는 평소와 달리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해 있지 않고 여우귀 본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깡총깡총 골목길에서 뛰어나온 화비는 양 귀가 시무룩하게 쳐진 채 말을 망설였다. 신라는 그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왜, 무슨 일 있어?”
“고민이 있는데…. 스승님한테 말했다가는 혼날 것 같아서.”
“말해봐. 들어줄게.”
“사실….”
화비에게는 몇 안 되는 여우귀 동족이 있었다. 그중 유달리 산속의 금은보화를 발견해 모으길 좋아하는 여우귀 친구가 있었는데, 최근에 ‘꿈 요괴’의 보금자리를 찾았다고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주의 말에 따르면 꿈 요괴의 소굴은 생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절대 그 근처에 가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 말을 그 친구한테 전했는데, 무시하고 그냥 들어간 것 같아…. 통 모습이 보이지를 않아.”
“저런…. 그곳이 어디인데?”
“근처의 산속에 있어. 큰 부탁은 아니고, 내가 내 친구를 구해올 때까지 바깥에서 기다려줬으면 해. 시간이 없다면 다른 친구들에게…”
“아니야. 그 정도 도와줄 시간은 있어.”
화비가 민망한 듯 귀를 팔락팔락 움직였다.
“고마워.”
“그럼 가자.”
등산로로 개발되지 않은 산길은 꽤나 거칠고 가팔랐다. 그나마 햇빛이 쨍쨍한 대낮이라서 다행이었다. 화비는 앞서 달리다가 신라가 어디쯤 왔는지 돌아봤다가, 다시 달리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게 사십여 분을 깊이 들어가자 비로소 낯선 요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기다려, 신라. 이거 받아.”
화비가 신라에게 건넨 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호루라기였다.
“내가 한 식경(*30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이 호루라기를 불어줘. 길을 잃어버렸다는 뜻일 테니까.”
“그래. 조심해야 돼!”
화비는 폴짝폴짝 뛰어 자욱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신라의 걱정 어린 시선이 그의 모습을 끝까지 쫓았다.
그리고 30분 후. 도저히 감감무소식인 화비 때문에 발만 동동 구르던 신라는 호루라기를 불어보았다.
‘돌아오고 있는 건가….’
주기적으로 호루라기를 불며 또다시 기다리기를 30여 분. 참을성이 바닥난 신라는 결국 화비를 찾으러 직접 나서기로 했다.
“혹시 모르니까 써볼까.”
그녀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향 갑을 꺼내 그 안에서 회귀향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손가락 길이의 향을 나무 기둥 근처 흙바닥에 잘 세워놓고, 성냥을 피워 불을 붙였다. 혹시 불이 붙을까 싶어 근처의 나뭇잎들은 모두 치워냈다.
회귀향에서 피어오른 옅은 연기는 신기하게도 주인인 그녀의 자취를 따라오고 있었다.
“화비야-! 들려-?”
신라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호루라기로 나무 기둥에 표시를 하며 화비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욱한 안개가 곧 그녀의 몸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통에 나무 잔가지에 몸 곳곳이 긁혔다. 그보다 더 신라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것은 점점 짙어지는 요기였다. 아마도 꿈 요괴의 것이리라.
‘생각보다 강한 요괴인 것 같은데…. 동주 선배가 조심하라고 한 이유가 있을 거야.’
신라는 잠시 멈춰 서서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남은 방법은 귀력을 뿜어내어 신후가 이쪽에 이상이 생겼음을 눈치채게 하는 것이었다. 최대한 귀걸이에 귀력이 쏠리도록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때, 반대편 수풀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그녀는 잔뜩 경계하며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쪽을 쳐다봤다. 안개를 뚫고 걸어 나온 사람은 웬 하얀 소복 차림의 여인이었다. 긴 머리까지 깔끔하게 빗어 올려 땋아놓은 모양이 사극에나 나올 법한 모습이라서 섣불리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인의 눈에 신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이상하네, 나 또 길을 잃었나? 큰일이네. 의원님 오실 시간인데….
여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다른 길로 걸어가 버렸다.
“저기요!”
신라는 무작정 그녀를 쫓아갔다.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드는 그녀를 이대로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 나가자, 갑자기 숲속 풍경이 사라지고 웬 바닷가 풍경이 펼쳐졌다. 갈매기 떼가 하늘에서 날아다니고, 어부들이 갓 잡아 온 물고기들을 소쿠리에 와르르 쏟아냈다.
그 생동감 있는 풍경에 잠시 정신이 팔려있자니, 한 중년의 사내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 여기서 뭐하고 서 있어? 어서 집에 가자. 의원님 오실 시간이다.
누구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멋대로 말하고 있었다.
- 네, 아버지. 잠시 길을 잃었지 뭐예요?
‘이건 도대체 무슨 기억이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한 기와집 대문에 다다랐다.
그때 골목길 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옆집 대문 앞에 세워진 말에서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고상한 느낌의 남자가 내려왔다. 그는 몸종에게 말을 맡기고 자택에 들어가려다, 시선을 느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봤다.
‘어…?’
분명 겉모습은 달랐다. 하지만 풍겨 나오는 그 익숙한 기운을 신라가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교수…님?’
남자는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인에게 작은 보자기를 건넸다. 풀어보니 그 안에는 각종 약재가 들어 있었다.
- 달여 먹으면 고통이 좀 완화될 거다.
- 감사합니다, 도령.
남자는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자니, 집의 대문 안쪽에서 아버지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 재희야, 안 들어오고 뭐 하니.
‘재희라니…. 난 그런 이름이 아니야.’
신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집에서 돌아 나와 아까 있던 숲을 찾아 무작정 달렸다.
“허억, 허억….”
다행인지 불행인 지 오래 지나지 않아 화비를 찾아 헤매던 숲으로 다시 돌아온 신라였다. 그녀는 땀을 닦아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호루라기로 긁어 표시해둔 나무 기둥들이 보였다.
‘귀신에 홀렸던 거야…. 처음부터 다시 해보자.’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비웃듯이 어딘가에서 환청 같은 것이 들리기 시작했다.
- 그건 거짓이 아니야….
- 모두 있었던 일이지.
- 네가 이곳에서 보는 모든 것에 거짓은 없어….
신라는 귀를 꽉 틀어막은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