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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장. 신의 사자 (84/126)

83장. 신의 사자

그날 밤 김여욱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 우울증을 앓고 있지만 견뎌보기로 했다는 후기 글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었다. 덕분에 김여욱이, 아니 그의 몸에 빙의했던 그슨새가 자살을 유도하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해서는 그저 ‘연극’의 일부였다고 치부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이상하게도 최근 방송했던 것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신께서 저에게 왔다 가신 게 아닐까 싶네요.’

그가 오늘 자 방송에 나와 한 말이었다. 그걸 보고 신후의 연구실에서는 그슨새가 김여욱에게서 빠져나갔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이걸로 민 조교도 큰 산을 하나 넘은 거야.”

신라를 제외한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신후가 말했다. 속죄의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반드시 한 번은 찾아온다고 했던 고비를 말하는 것이었다. 다들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연구실 소파에 앉아 있던 혜령이 신후에게 물었다.

“그 자살을 유도하는 그슨새라는 녀석은, 최근에 바다 봉인에서 풀려난 그슨대와 연관이 있는 요괴인가요?”

“비슷한 속성이긴 하지. 하지만 그슨대가 훨씬 상대하기 까다로워. 그놈은 상대의 정신을 쥐락펴락하면서 스스로를 자멸하도록 만들거든. 그리고 주술에 능해서 웬만한 건 모두 간파해. 이번에는 봉인시키는 것조차 어려울 거야.”

“흐음…. 머리 아프네.”

건우가 이를 갈며 말했다.

“봉인은 필요 없어요. 이번에는 그냥 없애버리면 돼요.”

생각에 잠겨있던 동주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혼의 매개체를 썼다면, 놈을 없앤다 하더라도 그 몸의 원래 주인은 혼이 갇힌 채 식물인간처럼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혼의 매개체에서 사람의 혼을 꺼내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해요.”

신후가 말을 받았다.

“한 가지 가능성 있는 게 있어.”

그는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소파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 위에 길게 펼쳤다. 그곳에는 십장생의 보물 열 가지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그들이 이미 본 적 있는 자라경과 진실경도 있었다. 신후가 손가락으로 짚어 가리킨 것은 반달 형태의 칼날을 가진 화려한 검이었다.

“‘해’의 기운이 담긴 「일용도(日鎔刀)」야. 해의 열기로 베고자 하는 것만 베어 녹일 수 있다는 검이지. 이게 있으면 혼이 다치지 않게 매개체만 녹여 없앨 수도 있을 거야.”

“지금 어디에 있죠?”

“원래는 권선징악의 신인 지국천왕이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인간계에 잠시 왔다 갔으니 어딘가에 숨겨놨거나 누군가에게 맡겨놨을 거야.”

“그렇군요…. 다행히 적의 손에 있지는 않다는 얘기네요.”

신후는 얼마 전 다녀갔던 지국천왕을 떠올렸다. 그라면 분명히 이 싸움에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남겨놓고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신라에게도 다녀갔겠지.’

그는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마침 신라의 수업이 끝났을 무렵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온 신라는 잊고 나온 것을 가지러 가기 위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이 2시쯤이니까…. 다녀오면서 커피 테이크아웃 해 오면 딱 맞겠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훤한 대낮이었다. 연구실에 학부 연구생으로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한신후를 만나기 전에는 대낮에도 잡귀들이나 빙의 당한 사람들에게 곧잘 기습적인 괴롭힘을 많이 당해서 늘 경계하며 다녔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 악의를 갖고 접근하면 어느 정도 기척을 눈치챌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을 뿌리칠 수 있는 능력도 갖게 됐다. 그래서 조금 방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윽…!”

건물 사이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의 손목을 우악스레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녀의 어깨에 메져 있던 가방이 허무하게 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신라를 인적 드문 막다른 골목으로 끌고 온 것은 서너 명의 장정들이었다. 귀신에 들린 낌새는 보이지 않아서,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올려다봤다.

“누구세요?”

그들 중 하나가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궁금해할 거 없어. 우리도 딱히 네가 궁금하지 않으니까. 그냥 돈 받고 하는 일일 뿐이야.”

“……”

“시간 맞춰 온다고 했으니 곧 오겠네.”

그때 장정들의 뒤쪽에서 절뚝거리는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신라의 얼굴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것처럼 사색으로 질렸다.

“설…마….”

장정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이 계집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하더니, 표정을 보니까 진짜인가 보네?”

장정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것은 역시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추병귀였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장정들은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그 자리에서 떠났다.

“큭큭…. 인간으로 살면서 돈이 많다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야. 재물귀에게 돈이라도 한몫 두둑이 받아놓길 잘했어. 안 그래?”

“……”

신라는 추병귀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간 병원 치료를 받았는지 절뚝이는 다리를 빼면 그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추악한 내면까지는 가려질 리 없었다.

“그 몸의 주인한테 피해가 갈 짓은 그만두는 게 좋아.”

“큭큭! 아직까지 이 혼이 버티고 있을까? 내 생각에는 소멸 직전 같은데 말이야.”

“재물귀는 또 누구지?”

“알 거 없어. 나중에 네놈들 중 누군가 당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신라는 입술을 꽉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지금의 널 못 당해낼 것 같아?”

“어떻게 하게? 또 날 죽이기라도 할 거야?”

“난 널 죽인 적 없어. 네가 날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 적은 있지.”

신라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주먹을 꽉 쥐었다. 절로 치가 떨리는 악몽 같은 기억이었다. 신후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그 바닷가는 그녀의 무덤이 되었을 것이다.

추병귀는 휘파람을 불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손 하나로 가려질 정도의 작은 권총이었다.

“이게 이렇게 작긴 한데, 인간 하나 죽일 정도는 된다더군.”

“……”

“귀력도 모두 잃은 마당에, 널 굳이 귀신의 방법으로 괴롭힐 이유는 없더라고? 킥킥! 어디, 한번 시험해볼까?”

총구가 천천히 신라의 쪽으로 겨누어졌다. 이를 꽉 깨문 채 추병귀를 바라보고 있던 신라의 시선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뒤쪽으로 옮겨졌다.

신후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추병귀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척 없이 권총을 빼앗아가는 손에 추병귀의 얼굴이 멍해졌다.

“어…”

이번에는 권총의 총구가 추병귀의 이마 정중앙에 겨누어졌다. 아무런 미동도 없는 신후의 얼굴은 무슨 일이든 원하는 대로 곧장 행할 것만 같았다.

“한신후!”

신라가 재빨리 외쳤다. 신후는 살기 가득한 시선을 추병귀에게서 떼지 않았다.

“정말 인간 하나 죽일 수 있는지 시험해볼까?”

“사… 살려줘.”

“그날 밤 절벽에서 널 직접 죽일 수도 있었어. 한 번은 살려줬으니 된 거 아닌가?”

“제, 제발!”

추병귀는 언제 거들먹거렸냐는 듯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신후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려둔 채 신라를 향해 말했다.

“보기 힘들지도 모르니 이곳에서 먼저 빠져나가 있어, 신라.”

“그러지 마세요. 손을 더럽힐 가치도 없는 놈이에요.”

“걱정 마. 이런 걸로 편하게 죽게 하지는 않아.”

신후는 고민하듯이 미간을 좁혔다. 아까 연구실에서 모두와 얘기했던 문제였다. 추병귀의 귀혼을 없애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진짜 문제는 그가 차지하고 있는 몸의 원래 주인이었다.

“범죄 현장인가?”

그때 신후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신라는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신후가 살기 어렸던 시선을 그대로 뒤쪽으로 옮겼다. 그곳에 한 남자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배우 최준성이었다.

“당신이 왜…”

신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관심이 다른 이에게 쏠린 틈을 타 추병귀는 신후를 지나쳐 재빨리 골목길을 빠져나가려 했다.

달려오는 추병귀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은 준성은 허공에 손바닥을 맞댄 다음 무언가를 그러쥐는 손동작을 했다. 그리고 그대로 팔을 휘두르자, 그가 그러쥔 곳에 검의 손잡이가 나타났고, 뒤따라 허공을 가르며 나타난 검날이 마침 근처에 다다랐던 추병귀의 목을 서슴없이 베어냈다.

놀란 신라가 입을 가렸다. 준성이 휘두른 검에 추병귀의 ‘귀혼’의 목이 베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 커억….

추병귀의 허무한 말로(末路)였다. 몸을 움직이던 혼이 사라지자 그 신체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신라가 다가가 그가 무사한지 살폈다.

신후는 준성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은 눈치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그의 물음에, 준성은 쓰러진 몸에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베이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가 베어낸 것은 사람의 몸에 들어 있던 혼의 매개체였다. 즉 그것만을 베어내 갇혀 있던 사람의 혼을 무사히 해방시킨 것이다.

“으….”

그 증거로 남자의 몸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곧 의식이 깨어날 것 같았다.

“장소를 옮길까?”

검을 다시 사라지게 만든 준성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는 전과 달리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신라를 보고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날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명색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인데 이건 좀 심한 처사가 아닐까.”

준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금 앉아 있는 의자에 밧줄로 칭칭 몸이 감겨져 있었다. 신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해 들은 조교들이 일단 수상쩍은 그를 포박해놓은 것이다.

“추병귀를 끝장낸 건 충분히 감사할 만한 일이지만, 왜 신라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접근했었지?”

혜령이 팔짱 낀 자세로 매섭게 캐물었다. 그러자 준성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건 오해야.”

“들은 게 있는데 거짓말은-”

“아니. 접근했던 게 신라 양뿐만이 아니란 소리야. 너희들 모두에게 접근했었어. 눈치를 못 챘을 뿐이지.”

“…뭐?”

준성은 여유로운 웃음을 띤 채 며칠간의 행적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중에는 우선이 그슨새에게 당할 뻔했던 날도 들어 있었다. 배우라는 눈에 띄는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기척을 잘 숨겼던 것을 보면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신라의 옆에 서서 가만히 준성을 바라보고 있던 신후가 입을 열었다.

“풀어줘. 그 ‘검’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적어도 지국천왕이 믿는 자라는 소리니까.”

그 말을 듣고 동주가 준성에게 묶인 밧줄을 힘으로 끊어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의자에서 일어난 준성은 신라에게 웃어 보였다.

“당신이 날 왜 그런 눈으로 바라봤었는지 사실 알고 있었어. 얘기 많이 들었거든.”

“누구…에게요?”

“내가 모시는 분에게.”

준성은 예전에 가끔씩 준호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에 들렀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준호는 일적인 이야기 외에 신라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고, 또 그녀의 얘기를 할 때면 마치 직접 키운 자식에 대해 얘기하는 듯이 얼굴에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준성은 늘 신라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까 했던 것처럼 허공에서 주술을 펼쳐 검을 소환했다. 그것이 바로 ‘해’의 기운을 담고 있다는 일용도(日鎔刀)였다.

- 가장 필요한 사람보다는, 가장 잘 다룰 것 같은 사람에게 주도록 해.

지국천왕이 남겼던 마지막 말이었다.

준성은 일용도를 신라의 손에 조심스레 넘겨줬다.

“이제 당신 거야.”

“제… 거라고요?”

신라는 얼결에 검을 건네받아 손잡이를 쥐었다. 바뀐 주인에게 벨 것이 없다는 걸 안 영험한 검은 스스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할까.”

준성은 신라에게 악수를 청했다.

“난 사천왕 중 권선징악의 신인 지국천왕을 모시는 사자, 보주(保主)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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