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장. Guilty, Honesty, Sympathy (83/126)

82장. Guilty, Honesty, Sympathy

“우선 씨…. 그러면 우리, 오늘 이 지독한 우울감을 청취자분들과 함께 없애버리는 건 어떨까요?”

김여욱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우선은 의미 모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다면, 듣고 계신 많은 분들이 그동안 힘겨울 일은 없었을 겁니다.”

“아니요, 의외로 간단할 수 있죠.”

“간단하다면…. 죽음 말씀이신가요?”

“견디듯이 살아야 한다면, 도저히 불행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도의적이고 아름다운 죽음…. 그렇게 말씀하셨었죠.”

“맞습니다.”

똑딱, 똑딱,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우선은 무언가를 고민하듯이 테이블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았다가, 슬쩍 라디오 부스 밖을 쳐다봤다. [ON AIR] 전광판에 확실히 불이 들어와 있지만, 방송 관계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김여욱이 미리 수를 쓴 모양이었다.

우선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해서 목숨을 끊는 게, 타인의 눈에는 양심적으로 보일 수도 있죠.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정말 ‘본인’을 위한 결말일까?”

“그게 무슨 말씀이실까요? 목숨을 끊으면 본인의 고통이 지워지는 길이기도 할 텐데요?”

“물론 고통이 지워지겠죠. 삶이 끝나버리니까요.”

“아아,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슬퍼하니까요?”

“아니요. 그것 또한 본인을 위한 게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관점이죠.”

“……”

김여욱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우선이 덫에 빠져 완전히 무기력해진 상태로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은 마이크에 대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남들보다 더 깊은 심연의 우울함을 가진 사람들은, 반대로 보면 언젠가 더 커다란 기쁨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울함도 환희도, 감수성이 풍부할수록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그게 어떨 때는 지독한 벌처럼 느껴지지만, 어떨 때는 큰 선물처럼 다가올 때도 있어요. 그러니까…”

김여욱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서서히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연기는 우선의 몸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우선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여러분들의 불행함은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혀질 것이고, 더 큰 행복으로 변해 찾아올 겁니다. 제 말을 믿고, 조금만 더 견디세요.”

김여욱의 손짓에 ‘ON AIR’ 전등에서 불이 꺼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 연기에 완전히 집어 삼켜진 우선의 턱을 쥐어 들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초점 없어진 눈동자가 보였다.

“귀찮게 하네….”

그는 조소를 흘리며 우선에게 말했다.

“어서 네 죄를 스스로 단죄하도록 해. 어차피 내 목적은 하잘것없는 청취자들이 아니라 네놈 목숨이었으니까.”

우선의 약점이 그의 내면에 있음을 알려줬던 건 추병귀였다. 추병귀는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비형랑에게 본인이 쓸모 있는 존재라고 전해줄 것을 바랐다. 하지만 김여욱-그슨새 역시 재물귀와 마찬가지로 필요한 정보만 빼내고 추병귀를 모른 척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 된 듯하니 잘된 일이었다.

우선은 홀로 라디오 부스를 빠져나와 정처 없이 걷는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었다. 비상구를 통해 계단을 한층 한 층 올라가, 자물쇠를 끊어내고 옥상 바깥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의 몸을 사르륵 에워쌌다.

- 제발 가뭄을 멈춰 주십시오…!

- 광철이시여, 분노를 거두소서-!

만일 순수한 인간이었다면 감당하지 못했을 어마어마한 죄악의 무게가 다시금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냈다.

- 네 부모, 네가 죽인 거 맞지?

- 솔직히 털어놔. 그런 거 끌어안고 살아가기 벅차지 않겠어?

죄악의 굴레는 이번 생에서도 반복되었다.

물론 그의 뜻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양친의 명이 다했으니 그 또한 벌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겨졌다.

그의 몸이 옥상 난간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바람이 조금만 반대쪽에서 불어도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만 같았다.

그런 그를 건물 아래에서 누군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무 기둥에 기대선 그는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렸다.

“속죄의 생을 스스로 끝내는 것 또한 커다란 죄이거늘….”

그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우선의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해치려는 움직임은 아닌 듯 보였다. 하지만 무언가를 발견하고, 입꼬리를 당기며 도로 손을 내렸다.

우선의 몸이 난간에서 서서히 기울었다. 속절없이 추락하는 몸을 누군가 간발의 차로 덥석 붙들어 멈췄다. 옥상 문을 통해 달려 들어온 동주였다. 전력 질주한 모양인지 그의 몸이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민우선, 정신 차려-!!”

뒤따라 헐떡거리며 달려온 장 형사도 난간 밖으로 허리를 잔뜩 늘어뜨려 우선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럼에도 우선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미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게다가 우선의 몸을 휘감고 있는 그슨새의 검은 요기(妖氣)가 그를 아래로 집요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크윽…!”

동주는 괴력을 발휘해, 붙잡고 있는 우선의 손목을 더 세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탁- 하고 떨어져 나가며 우선의 몸이 가볍게 옥상으로 올라왔다.

“허억, 허억….”

축 늘어진 우선의 몸을 벽에 기대 앉힌 동주와 장 형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토해내며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우선의 눈꺼풀이 경련하다가 천천히 떠졌다. 그의 시야에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동주가 들어왔다.

“오면서 라디오 다 들었어.”

동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숨을 고르던 그는, 순간 분노가 치밀었는지 벌떡 일어나 우선의 멱살을 쥐어 일으켰다.

“인마. 그게 적의 함정인 걸 알았으면 혼자 싸우지 말고 우리한테 도움을 청했어야지! 난 또 네가 그슨새한테 홀려서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에 끌려온 줄 알고….”

우선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이미 천 개의 자라경에서 나의 실체를 봤어. 어설픈 힘으로는 내 감정을 흔들 수가 없어.”

“그럼 왜 뻔히 함정인 걸 알면서 온 건데!”

“죄 없는 아까운 인생들이 더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도록.”

“그래서 널 희생하려고 한 거야?”

“글쎄. 희생이라고 할까…. 도망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선이 자조적으로 말했을 때, 장 형사가 동주의 뒤에서 걸어 나왔다.

“도망치고 싶어? 그 당당하던 민우선 어디 갔어?”

우선의 눈빛이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장 형사는 무섭게 굳힌 표정으로 우선의 앞에 섰다.

“나는 아직도 네 부모의 죽음에 네가 연관돼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죽는 걸 바란 게 아니야. 정당하게 법의 잣대로 처벌을 받아야-”

“아니요.”

감정을 억제하기 힘든지 우선의 눈시울이 벌게져 있었다. 그가 장 형사의 앞에서 양친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법의 잣대로 단죄할 수 있었다면 진작 자수했겠죠. 사람의 힘으로 알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장 형사님도 처음에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잖아요. 결국 내가 나 스스로를 미워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당신은 늘 집요했고 아픈 기억을 끄집어냈지만, 그래서 사실 고마웠어요.”

장 형사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누군가 나를 나 대신 원망해주길 바랐으니까. 그러면 내가 나 스스로를 덜 미워해도 되니까.”

우선은 할 말을 잃은 듯한 장 형사에게 조금 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우선의 부모는 천성이 나쁜 이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선에게 기이한 능력이 있음을 알아채고 난 뒤부터 점차 사소한 것에도 잘 화내는 성격으로 변해 갔고, 결국 하루에 두세 번은 심한 말다툼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는 울면서 하지 말라고, 잘못했다고 소리쳤다.

곁에서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본 우선은 그녀의 울부짖음에 충격을 받아 그만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가 애원하는 이들의 터전을 모조리 말려 죽이던 때의 기억 말이다.

화르륵-!

깨닫지 못한 사이 집안 살림 곳곳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놀란 어머니가 급히 불을 꺼보려 했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만취 상태였던 부친은 연기를 마시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 우선아, 어서 나가…! 엄마는 아빠 데리고 나갈 테니까!

하지만 우선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을 모두 끌고 나가려던 어머니도 결국 연기에 질식해 쓰러지고 말았다.

소방관이 도착해 불길을 진압했을 때는 이미 집채가 형체를 잃고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난 뒤였다. 구경하던 이들 모두 집 안에 사람이 있다면 결코 살아 있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당시 소방차에 뒤이어 출동했던 장 형사는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재만 남은 집 안으로 진입했다. 그러다가 귀신을 본 사람처럼 멈춰 섰다.

거실로 보이는 공간에서, 옷만 그을렸을 뿐 멀쩡한 모습의 어린아이가 새까맣게 타버린 사람의 형체를 끌어안고 있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어두운 눈은, 결코 평범한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괴물이다….’

그때 장 형사의 머릿속에 깊이 박히게 된 생각이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은 우선은 그때처럼 절망감에 젖은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지만 입만은 허무한 미소를 내 짓고 있었다.

“장 형사님…. 당신이 맞았어요. 저희 부모님, 제가 죽인 거 맞습니다.”

비가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세 사람 모두 비를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장 형사는 험악하게 굳은 얼굴로 우선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 확실히 인간의 힘으로는 알아낼 수도 없고, 처벌할 수 있는 법도 없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겁한 방법을 쓰려고 한 거냐?”

“그럼 어떡해요. 전생의 죗값은 치르고 있지만, 내 힘 때문에 희생당한 내 부모의 넋까지 신들은 신경 쓰지 않을 텐데. 내가 날 얼마나 어떻게 더 벌줘야 하냐고요!”

철썩- 우선의 뺨을 세게 때린 장 형사가 그의 멱살을 거칠게 쥐어 들었다. 그리고 울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 네가 여태까지 모른 척 발뺌한 덕분에 내가 내 동료들 사이에서 한창 정신병자로 불렸었지.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어! 이제야 네가 실토를 하는구나! 이 살인자 놈! 부모 죽인 잔인한 새끼!”

우선의 눈이 질끈 감겼다. 동주는 울컥해서 장 형사의 어깨를 붙잡았다가, 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화를 억눌렀다. 장 형사의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몰랐지! 아무도 몰랐을 거야! 이제야 알았네! 제길, 어렸을 때도 네가 그런 괴물 새끼였으니까-! 그렇게 힘 조절을 못 해서, 부모가 뒤졌다는 거 아니야!!”

“그래요….”

“그래! 나라도 눈치채서 다행이었지. 네가 범죄자라는 걸 나라도 알아서…. 잡아 처넣을 수도 없으니, 앞으로 욕이나 평생 하며 살아야겠다! 네 놈 만날 때마다 아주 호되게 욕을 퍼부어줄 테니까, 각오해! 알았어, 인마!?”

제길, 왜 이렇게 눈물이 질질 나와! 신경질적으로 외친 장 형사는 우악스레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눈가를 가린 채 오열하고 있는 우선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그간 ‘괴물’이라는 인식이 틀어박혀서 필요 이상으로 우선을 모질게 대한 게 사실이었다. 행동 하나하나를 범죄와 연관시켰고, 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하지만 결국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이었다. 악질적인 언행마저 죄책감을 덜어주는 고마운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은 녀석이었던 거다. 그런 녀석의 상처를 얼마나 후벼 팠던가.

동주가 다가와 우선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없는 역할을 해준 장 형사를 고맙게 바라봤다.

“가장 큰 고비가 지나갔군.”

건물 아래에 서 있던 남자는 조용히 중얼거리고는 우산을 펼쳐 방송국 건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가 지나치는 가게에서 잔잔한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중부 지방에 일기 예보에 없었던 소낙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외출하실 분들께서는 꼭 우산 챙겨 나가시길 바랍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