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장. A Guilt Trip
교통사고가 ‘날 뻔한’ 두 사람은, 학생들 평이 제법 괜찮은 중식점에 갔다. 가격대가 좀 있을뿐더러 방마다 칸막이가 있어,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는 곳이었다. 준성은 식당의 퀄리티가 의외로 괜찮아서 만족스레 식사에 집중했다.
“대학이란 곳이 꽤 괜찮구나.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고, 근처에 밥도 이렇게 맛있는 데가 많고.”
신라는 흘끔흘끔 그의 모습을 눈에 담느라 본의 아니게 깨작거리듯 식사하고 있었다. 애처럼 입가에 짜장 소스를 다 묻히고 먹는 남자에게서 왜 준호를 보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 닦으세요.”
휴지를 건네는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준성은, 신라를 향해 씨익 미소 지었다.
“자상하네.”
“어디에서 사진 찍힐지 모르는 직업이시잖아요.”
“그렇게 아무에게나 자상하게 굴면, 언놈이 잡아가도 할 말 없어요.”
준성은 신라가 건네준 휴지로 입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신라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생긴 거랑 다르게 노인네 같은 말투….’
쿨럭! 갑자기 준성이 사레에 들렸는지 기침을 뱉어냈다.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기침하던 그는 갑자기 억울한 표정으로 신라를 쳐다봤다.
“내가 좀 오지랖 부렸나 보죠?”
“네?”
“아니, 방금 표정이 그래서요.”
“…?”
신라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고 준성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다시 짜장면을 입에 넣었다. 소스를 계속 입가에 묻히는 그를 보고 신라는 작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웃지 마요! 음식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요.”
“아,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진 없지만. 왜 안 먹어요? 많이 팍팍 먹어요. 전보다 여위었다며.”
“네? 제가 언제….”
뚝, 손을 멈췄던 준성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여위어 보인다는 말이에요.”
“네에….”
“어서 들어요.”
식사가 끝나고, 계산대에서 신라가 카드를 내밀었지만, 준성은 그 위로 그의 카드를 들이밀었다. 준성을 알아본 카운터 직원은 홀린 듯이 그의 카드를 집어 들어 계산했다.
신라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저 때문에 날 뻔한 사고인데….”
“괜찮아요. 작정하고 괴롭힌 건데 안 넘어가면 이상하지.”
“……”
신라는 아까부터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의미심장한 얘기들을 늘어놓는 준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들은 중식집을 나와 바로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커피는 신라가 사기로 했다. 음료가 나왔을 때, 고민하던 신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혹시…”
그때 신라를 돌아본 준성이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그리고 특유의 호쾌한 미소를 내지었다.
“제 이미지가 신비주의라. 질문은 다음에 받아도 될까요?”
“……”
“커피 잘 마실게요.”
결국 궁금증을 풀지 못한 신라는 식당에 세워둔 차로 돌아가는 준성의 모습을 시선으로만 쫓았다. 출발하기 전 운전석 창을 내린 준성이 바깥에 서 있는 신라를 바라봤다.
“질문을 다음에 받겠다고 했는데, 그다음이 언제인지 궁금하죠?”
“아뇨,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살펴 가세요.”
“그렇게 아련한 눈빛으로 계속 쳐다보면 마음이 없다가도 끌리겠어요, 당신한테.”
내가 그랬나, 속으로 생각한 신라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까지 그에게서 준호의 모습이 겹쳐 보여 어쩔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왠지 쓰게 웃은 준성은, 선글라스를 쓰며 떠날 준비를 했다.
“잘 있어요. 밥 잘 챙겨 먹고요. 다음에 만나면 검사할 거예요. 알았죠, 신라 양?”
“……”
준성의 스포츠카가 매끄럽게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가 떠난 자리를 응시하던 신라는,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윤 노인은 요양 병원 휴게실에 앉아 유유자적하게 차를 음미했다. 요양원에 있다가도 건강 상태가 악화되면 옮겨지는 요양 병원에서 이토록 몸도 정신도 건강한 상태인 노인은 드물기에, 의사도 간호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간혹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이가 있으면 그는 가차 없이 호통을 쳤는데, 괴이하게도 그에게 혼난 이는 나이와 직위를 불문하고 한동안 통곡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윤 노인의 앞에는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3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옛날 가요를 흥얼거리며 바둑판에 흑돌을 얹어놓았다.
“다음 차례십니다.”
“재촉하지 말게. 바다 풍경을 보고 있으면 좋은 수가 떠오르곤 하거든.”
“하하. 그러면 규칙 위반이십니다. 나름 시간 제한이 있는 놀이거든요.”
“나와 달리 성격이 급하구먼. 이름은 비슷한데 말이지.”
“그렇습니까? 스스로 여유 있는 성격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윤 노인은 웃음을 머금은 채 백돌을 두었다.
“그래서, 슬슬 행동을 개시해볼 작정인가?”
“판은 다 짜 놓았으니, 슬슬 거둘 차례죠.”
“어떤 판을 짰지?”
“거미를 죽일 때 가장 재미있는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남자는 다음 수를 두며 말을 이었다.
“팔다리를 하나씩 잘라내는 겁니다. 버둥거리는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요.”
“허허…. 그리 여유로워도 되겠나?”
“주군의 즐거움을 위해서, 라고 해두지요.”
남자는 섬뜩한 말을 뱉은 것치고 눈꼬리를 접으며 제법 순하게 미소 지었다. 지나가던 간호사들이 남자를 보고 수군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가와 사인을 부탁했다. 그는 웃는 얼굴로 기꺼이 종이에 사인을 해주었다.
* * *
나른한 평일 오후의 고고학 연구실. 평소보다 피곤해 보이는 우선을 보고, 일어나 다가온 동주가 그의 의자 등받이를 꾹 누르며 말을 걸었다.
“뭐야, 우리 몰래 연애라도 하고 다니는 거야?”
“무슨 소리야?”
“왜 그렇게 피곤해해?”
“아…. 챙겨 듣는 라디오 프로가 특집이라고 밤새 방송을 해서….”
“아아, 네가 요새 자주 듣는 그거?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자리에서 논문을 들여다보던 건우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도 들어봤는데, 별로 재미없던데? 듣다가 잠들었어. 남자 목소리가 너무 졸립거든.”
우선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반박했다.
“그게 매력이에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인데, 사회 현상들에 대해 촌철살인으로 비판하거든요.”
“하긴. 우리한테도 촌철살인으로 잔소리하는 네 코드에 맞긴 하겠다.”
약이 오른 우선이 동주의 턱을 떠밀어버렸다.
“내가 언제 촌철살인으로 잔소리를 했다고 그래? 랩장으로서 할 말만 한 거지.”
“예, 예.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 목마르니까 커피나 사 마실 겸.”
“당분간 비형랑이 교내에 돌아다닌다고 했어. 그렇게 넋 놓고 다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할지도 모른다.”
“그래, 이런 촌철살인.”
“휴….”
안경을 쓴 채 학위논문 예비 심사용 발표 자료를 만들던 혜령이 손을 들며 말했다.
“내 것도~”
건우도 따라서 손을 들었다.
“그럼 나도~”
졸지에 연구실 모두의 커피를 배달하게 된 두 사람은 터덜터덜 연구실을 나섰다. 목적지는 건물에서 거리가 좀 떨어진 교내 카페였다. 팔베개를 한 모양으로 휘파람을 불며 걷던 동주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아! 그거 들었어? 신라가 최준성이랑 밥 먹었대.”
“최준성? 설마 그 신인 남자 배우?”
“그래. 서영이가 알려줬어. 교통사고가 날 뻔해서, 미안하다고 밥을 샀대.”
“저런…. 사고가 날 뻔-”
그때 누군가를 발견한 우선이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동주도 따라 멈춰 섰다.
“안녕하세요-!”
온몸을 분홍색 아이템으로 치장한 꼬마 아가씨가 두 사람에게 배꼽 인사를 했다. 그리고 소녀의 뒤로 그들에게 익숙한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크흠! 아, 산책하러 나왔다가, 거 우연히 마주쳤구먼!”
장 형사였다. 어색하게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딸의 손을 붙잡은 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면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가 뻔했다. 일전에 딸의 병환을 물리쳐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온 것일 터다. 표정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동주는 은근히 내지어지는 미소를 감추며 먼저 자리를 피해주었다.
우선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못 들었어? 산책하러 나왔다잖아!”
“그 먼 거리를, 잘도 산책만 하러 나오셨겠습니다.”
“흥!”
우선은 부드러운 웃음을 만들며 소녀의 앞에 걸어가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작은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다 나았니?”
“네! 오빠 덕이라고 했어요. 감사합니다.”
“내 덕은 무슨. 아버지가 여.기.저.기. 물심양면으로 애쓰고 다니신 덕이지. 안 그래요?”
우선이 장 형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왠지 뼈가 담긴 그 말에 장 형사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뒤끝 있게 그럴래!?”
“뒤끝의 끝판왕께서 그런 소리를 하시니 기도 안 차네요.”
“하여간 귀여운 구석이 요만큼도 없다니까!”
고개를 저으며 일어난 우선이 소녀의 귀를 양손으로 꾹 덮으며 장 형사에게 속삭였다.
“그때 ‘그거’, 그 자리에서 달아나버렸어요. 언제고 다시 돌아와서 해치려고 할지 모른다는 소리예요.”
“머, 뭐?”
“그러니까 항상 주의하세요. 쉽게 유혹에 휘둘리지 마시고, 또… 이제 저한테 다시는 찾아오지도 마시고.”
“……”
할 말을 삼키는 우선의 어색한 표정을 보고, 장 형사는 그가 하는 말이 이유 없는 모진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다음에는 그렇게 구해주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저와의 인연은 이걸로 끝내세요.”
“……”
“잘 알아들으셨으리라 믿어요.”
우선은 작은 목례를 남기고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생각에 잠겨있던 장 형사는 곧 돌아서서 우선의 자취를 심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소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빠, 왜 그래?”
“어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근데 저 오빠, 왜 슬퍼 보여?”
“…저 녀석은 늘 그랬어. 언제고 사라져버릴 것처럼 굴었거든. 그래서 더 집착하게 됐는지도 모르지….”
“사라져버리면 안 되는데….”
어린 딸의 울적한 목소리에, 장 형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지면 안 되지….”
- 살려주십시오-!
- 제발 가뭄을 멈춰 주십시오…!
지독한 악몽이었다.
머나먼 옛날의 기억에 사로잡힌 우선은 몸을 뒤척이면서도 쉽사리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 광철이시여, 분노를 거두소서-!
- 아이들이 굶어 죽고 있습니다….
용으로 승천하지 못해 분노한 요괴는 인간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재해를 떠안겼고, 그들의 죽음을 관망하며 분노를 삭였다.
‘그만, 그만둬-!’
전생의 자신에게 아무리 절규하며 소리쳐본들, 이미 저지른 일들이 되돌려질 리는 없었다.
우선은 절망하며 주저앉았다.
- 차 조교의 비극은 네 힘으로 막은 거나 다름없어. 하지만 네 비극도 그 녀석이 막아내 줄 수 있을지 의문이군.
비극. 그 비극이 정해진 결말이라면 겸허히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다. 속죄의 삶을 살면서도 늘 무거운 죄책감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것으로 이 괴로움이 덜어진다면.
“헉…!”
겨우 악몽에서 깨어난 우선은 땀에 젖은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지끈대는 머리를 붙잡고 있자니, 끄지 않고 잠든 라디오 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직도 안 끝났네. 오늘도 특집인가?”
방송이 시작한 지 벌써 네 시간이 흘러 있었다.
우선은 싱숭생숭한 기분을 잠재우기 위해 잠시 벽에 기대앉은 채로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달에 사는 남자, 김여욱입니다. 벌써 새벽 네 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군요….
여러분은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질러본 적이 있나요?
아무리 진심으로 뉘우쳐도, 도저히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세상에는 많은 죽음이 있고, 그 안에는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죽음도 많이 있죠.
그런데 저는 그런 죽음들을 보면서, 어떻게 보면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이 가한 벌로는 죄가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또 한 번 벌주는 거잖아요. 얼마나 도의적이고 아름다운 죽음입니까?」
창밖의 어두운 동네 풍경을 바라보며, 우선이 홀린 듯이 따라 중얼거렸다.
“도의적이고, 아름다운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