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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장. 새로운 인물 (80/126)

79장. 새로운 인물

점심을 앞둔 이른 오후, 신라는 서영과 함께 교양 수업을 듣고 연구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세상 소식들을 누구보다 빠르게 이것저것 알려주는 서영이 곁에 있으면 기분이 가라앉아 있다가도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요즘 아침에 눈을 뜨고부터 밤에 침대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고민할 거리들이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허무하달까….’

차라리 신후가 기다렸던 그 여인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지 않고 그의 곁을 지키게 됐다면 더 나은 결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누구 하나 뚜렷하게 가해자로 만들지도, 피해자로 만들지도 않는다. 아무리 진심 어린 사죄를 들었다고 해도 한신후를 완전히 예전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혼란은 정체되었고, 언제 또 위기가 닥칠지 몰랐다.

“신라 씨.”

…지금처럼.

신후와 목숨을 건 싸움을 했던 자치고 너무 멀쩡한 모습이라서, 새삼 그가 적의 수장이라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고 만다.

신라는 책을 들고 있던 팔에 꾹 힘을 주며 서영을 뒤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먼저 가라고 속삭였다. 서영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캠퍼스에 들어와 있어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남자였다. 이렇다 할 표정이 없는 남자를 보고, 신라는 마지막으로 그를 어떻게 대했었는지를 떠올렸다.

그의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아무리 극진한 대접을 받았어도 결국 선택한 것은 태어나서 가장 큰 상처를 준 한신후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싸우기 직전, 신후에게 비형랑의 약점이 무엇인지 귀띔해주었었다.

“얘기, 하고 싶어서.”

신라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강 현이 입을 열었다. 신라는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이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점심을 먹으러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걱정 말아요. 얼마 안 걸려.”

“학교 안의 카페로 가요.”

두 사람은 처음 함께 갔던 교내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마주 앉아 있는 강 현을 바라보는 신라의 눈에는 이제 어쩔 수 없는 경계심이 깃들어 있었다. 강 현은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음미했다.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인위적인 미소가 사라지고 얼굴에 표정 자체가 거의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웃지 않으니까 더 무서운가요?”

“……”

“목숨이 걸린 싸움에서 당신이 날 선택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가면으로 쓰고 있던 미소조차 아직 잘 안 되네요.”

“애쓸 필요 없어요. 오히려 가면이 더 무서우니까.”

신라의 흔들림 없는 시선을 보고, 강 현이 허탈한 웃음을 잠깐 흘렸다.

“그자가 준 상처가, 당신을 또 강하게 만들었나 보군요.”

“……”

“당신이 나한테 준 상처로 내가 조금 더 단단해진 것과 비슷한 맥락이겠지.”

신라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언제부터 인간이 주는 상처 따위에 휘둘리는 사람이었나요?”

“당신은 나한테 그냥 인간이 아니야.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지.”

“외로움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나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당신이 그랬잖아. 내가 외로워하고 있다고. 그 감정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기로 했어.”

또 어떤 말로 휘두르려고 저런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신라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강 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나 좀 봐요, 신라 씨. 이렇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되잖아.”

“……”

“내가, 당신 방에 단검을 두고 나왔던 거 기억해요?”

신라는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던 강 현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것을 두고 간 의미가 무엇일지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결국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보기 싫은 그것을 조용히 침대맡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짧은 인생을 산 당신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지 모르겠지만, 난 수많은 시간을 지옥과 같은 감옥 안에서 보냈어요. 신들은 어떻게 하면 내 혼이 알아서 망가지게 될지만을 연구하는 것처럼 늘 새로운 고문 방법을 가지고 왔죠.”

“……”

“왜…? 내가 그들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에.”

강 현은 잠시 그때의 시간을 회상하듯 낯빛을 어둡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진 고문을 억겁의 시간 동안 받고도 내 욕망이 지워지질 않는다면, 난 원래 이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겠지. 그래서 이 행동을 멈출 수는 없을 거야. 아마도 다시금 당신의 주변부터 하나둘 제거하기 시작할 거고.”

신라의 눈빛에 순간 화가 차올랐다.

“그만둬요.”

“그만둘 수 없어. 이제 어느 한쪽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이 싸움은 계속될 테니까.”

강 현은 오늘 반지를 끼고 나오지 않았다. 고로 귀혼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얘기였다. 이쪽에서 공격할 기회라고 보기에도 어려웠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어떻게, 무슨 명분으로 그를 제압하겠는가.

강 현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신라의 손에 포근히 자신의 손을 얹어놓았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회유하러 온 거야. 앞으로는 더 지독해질 거고, 아무리 상대가 당신이라 하더라도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거든.”

전생에 그의 오른팔이자 간신이었던 그슨대라는 자가 봉인에서 풀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신라는, 그가 하는 말이 괜한 얘기가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어둑시니는 당신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고 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어때? 이제 그자도 나와 다를 바가 없어.”

“……”

“세상 모든 것들을 다 망가뜨린다 하더라도, 내 곁에 있는 당신만큼은 지켜줄 자신 있어. 그러니…, 날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검집이 되어줘.”

신라는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빨갛게 변한 눈가로 강 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강 현이 손을 뻗어 그런 그녀의 눈가를 매만지려 했다.

그때 다른 곳에서 뻗어 나온 손이 그의 손목을 중간에서 내리눌러 테이블에 고정시켰다.

“자기 자신을 희생시켜서라도 세상 모두를 살리고 싶어 하는 여인에게 그런 쓸데없는 제안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향했다. 신후가 강 현을 살기 어린 고요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 현 또한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소중한 것을 대하는 방법이 다른가 봐. 난 내 사람이 희생하는 걸 싫어해서 말이야.”

“물론 이쪽도 그렇게 만들지 않아. 정신 나간 동업자를 찾는 거라면 딴 데 가서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가장 잔인한 상처를 준 네 곁에 있는 게, 과연 신라 씨에게 더 나은 길일까?”

“내가 저지른 일은 내가 수습해. 더는 상처 줄 일 없으니까 신경 끄고 꺼져.”

존재감 가득한 두 남자가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으니, 하나둘 학생들의 시선이 몰리고 있었다. 사이가 안 좋게 보인다고, 정말 죽이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사이라는 것까지는 모를 테지만 말이다.

중간에서 그들의 살기를 오롯이 느끼고 있던 신라는 이 일촉즉발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신후의 손이 그런 신라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걱정 마. 이런 곳에서 소란을 피우진 않을 테니까. 나나, 이놈이나.”

강 현은 동의라도 표하듯 신라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사실 ‘귀혼’ 쪽은 안전한 곳에서 요양 중이거든요. 아무래도 그런 격한 싸움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캠퍼스를 둘러보며 뜻밖의 말을 했다.

“사실 이 학교 의과대에서 잠시 강의를 하게 됐어요.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겁니다.”

기가 찬 듯이 신후의 입이 비틀렸다.

“사람을 죽이는 궁리를 하는 놈이 의대에서 강의라….”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들의 내면을 관찰할 뿐입니다.”

강 현은 마지막으로 신라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카페에서 빠져나갔다. 신후와 마찬가지로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신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오른팔이 정말 다시 돌아온 모양이에요.”

신후가 그녀의 곁에 선 채로 대답했다.

“또 무슨 말을 했지?”

“외로움을 직면하기로 했다고….”

“널 회유하기 위한 입에 발린 소리일 뿐이야. 저놈에게 외로움이 있을 리가.”

“어째서요?”

“어째서라니?”

“인간으로 태어났잖아요.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아예 없을까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신라는 시선을 내린 채 상념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저자의 곁에 내가 있으면, 검집 역할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라.”

“알아요, 미친 소리인 거. 하지만 주변에 정상인 사람이 있다면, 저 행동을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후는 긴 한숨을 내쉬며 강 현이 앉았던 자리에 걸터앉았다.

“네가 저자를 동정하는 이유가 운명의 굴레가 사라진 비슷한 신세라는 생각이 들어서라면, 그 원인이 나이니까 할 말은 없어.”

“…그건….”

“하지만 저자는 환생이 아니더라도 혼을 옮겨 다닐 수 있는 금지된 주술을 쓰는 자야. 곁에 있다간 너에게도 그 주술을 써서 영생을 살게 하겠지.”

“……”

“그렇게 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어져.”

신라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어려운 생각은 안 해요. 아직 저 사람에게서 조금의 망설임이 보이기 때문에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뿐이에요.”

신후는 신라가 강 현을 일컬어 ‘사람’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그저 속으로 담담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네 운명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때까지 난 너에게 무엇 하나 강요할 수 없겠지.’

* * *

점심을 먹으러 학교 밖으로 나가는 도중, 멍하니 걷는 신라를 보고 서영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제 만난 그 남자한테 역시 뭔가 있는 게 분명해.’

그와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던 것 하며, 혹시 몰라서 한 교수에게 찾아가 말하니 그답지 않게 벌떡 일어서 외투도 걸치지 않고 뛰쳐나갔던 것 하며….

‘설마… 셋이서 삼각관계!?’

혼자 결론지은 생각에 그녀가 뺨을 붉히며 입을 틀어막을 때였다. 신라가 빨간 신호인 횡단보도를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나가고 있었다.

“어? 신라야!”

“응?”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신라가 서영을 돌아봤다.

“빨간 불이잖아!”

“초록 불인데?”

“얘가 넋을 놓았네!”

서영이 신라를 잡아끌려고 할 때였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던 스포츠카 한 대가 신라의 코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아 간발의 차로 멈추었다.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난 신라는 다시 신호등의 신호를 확인했다. 분명히 초록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어느새 빨간 불이 선명하게 켜져 있는 것이다.

‘또 누가 장난을 쳤구나.’

스포츠카의 운전석이 열리고, 심각한 표정을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여차하면 신라의 편이 되어주기 위해 기합을 잔뜩 넣고 있던 서영의 표정이 멍해졌다.

“자, 잘생겼… 어라?”

잘생긴 것뿐만이 아니었다. 이질적이지만 익숙한 느낌. 그는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배우였다. 일류 스타급은 아니지만, 최근 급부상하고 있어 곧 주연 자리도 꿰찰 것이라고 기대되는 신예 배우.

“괜찮아요?”

그런데 신라는 서영과 다른 이유로 넋을 놓고 있었다. 남자에게서 어딘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외모도 체격도 많이 다르지만, 이 온화하고 이지적인 분위기는 분명….

“아이참, 안 괜찮은가 보네.”

남자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서영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배, 배우 최준성 씨 아니세요?”

“아아, 네. 맞아요.”

그는 호쾌한 미소와 함께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 멍한 표정인 신라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흔들었다.

“신호는 그쪽이 위반했지만, 속도제한 무시하고 달린 제 탓도 있으니, 식사 한 끼 대접해드릴까 하는데. 어떠세요?”

서영은 신라의 옆구리를 찌르며 어서 승낙하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에 얼결에 고개를 끄덕여버린 신라였다.

“아… 사고 날 뻔한 건 제 탓이니까 식사는 제가 살게요.”

“그럴래요? 뭐, 그쪽 탓이 아닌 걸 수도 있지만.”

“네?”

“아닙니다.”

왠지 의미 모를 소리를 한 준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내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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