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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장. 봉인이 풀리다 (79/126)

78장. 봉인이 풀리다

동해 용왕의 장자(長子)인 태용은 수비대의 보고를 받고 동해의 가장 깊은 땅으로 급히 찾아갔다. 그곳은 바다에서 태어난 사악한 요괴가 오랜 세월 봉인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를 봉인시켜 놓은 녹슬지 않는 함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곳을 지키고 있던 수비대는 끔찍한 몰골로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다.

“좋지 않군….”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함을 느낀 태용은 혀를 차며 해수면 쪽을 바라봤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동해 전체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 그의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점심때가 지난 선선한 오후, 건우는 논문을 쓰느라 전날 밤샘 작업을 한 탓에 잠시 책상에 엎드려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이 온통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그의 꿈에, 도깨비로 살았던 때의 기억이 단편적으로 스쳐 가고 있었다.

- 아무래도 널 그냥 보내는 게 아쉬우니, 명줄이 끊길 때까지 너를 위한 성대한 연회를 열어 주마.

- 저런, 말할 수 있는 혀도 뽑혀버렸군.

혀가 뽑히고 난 뒤로는 고통에 울부짖을 수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육체적인 고통 외에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이 따로 있었다.

- 가여운 도깨비야. 어찌하여 주군 곁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예를 버리고 하찮은 배신자로 전락하려 하느냐?

길달이 비형랑의 수족이었다면, 그자는 비형랑의 곁을 지키는 오른팔이었다. 비형랑에게는 비뚤어진 애정이라도 있었지만, 그자에게는 그마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상대의 타락뿐이었다.

그가 길달의 머리에 손을 얹어 답을 들었다.

- ‘이게 나의 신념일 뿐이다.’

- 값싼 신념으로 그 고통을 다 이겨낼 수 있느냐?

- ‘네놈은 이해하지 못해.’

- 그럼 난 이해하는 쪽보다 널 무너뜨리는 쉬운 쪽을 택할 수밖에.

그자는 길달로 하여금 가장 괴롭고 절망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에서 그쳤다면 정신이라도 온전했을 것이다.

그의 진짜 능력은, 그 기억을 더 괴롭게 변질시켜 상대의 마음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 …!! …!!!

길달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은 그는 근처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던 요괴들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볼 정도로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만… 그만해!”

탕-!

책상을 내리치며 벌떡 몸을 일으킨 건우는 잠시 현실로 돌아온 것을 깨닫지 못하고 숨을 헐떡거렸다. 근처에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던 조교들이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악몽이라도 꿨어요?”

우선이 걱정스레 물었다. 건우는 얼굴에서 땀을 닦아내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 너무 생생해서 꿈같지도 않아.”

건우를 놀리기 위해 다가왔던 혜령은 그의 새파래진 낯빛을 보고 놀라서 멈춰버렸다.

“너, 정말 괜찮아?”

“아니… 토할 것 같아….”

신라가 손수건에 물을 묻혀 가져와, 건우는 그것으로 땀을 닦아내고 조금이나마 정신을 추슬렀다.

교수실 문 쪽에서 신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로부터 도깨비의 꿈에는 예지력이 있었지. 어떤 꿈을 꿨는지 얘기해봐.”

건우가 문가에 기대서 있는 그를 퀭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슨대’…. 그놈을 봤어요.”

“비형랑을 처치할 때 먼저 봉인시켜서 동해 용왕에게 넘겼던 놈 말인가?”

“네.”

신라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건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공기가 바뀐 것을 느끼고 주위를 돌아봤다. 맡아본 적이 있는 냄새… 이 세상 것이 아닌 바다 내음이 연구실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예지몽이 맞았나 보군.”

신후가 말하자마자, 그들 가운데로 미풍이 일면서 화려한 차림의 사내가 나타났다. 상황을 따라가기 바쁘던 신라는 갑자기 눈앞을 가로막는 큰 몸집에 얼떨떨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얼마 전 인연을 만들었던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신라… 이런 일로 다시 보게 돼서 유감이구나.”

그는 다가와 신라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그녀가 미처 물러서기도 전이었다.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군.”

“…무슨 일, 있으셨던 건가요?”

태용은 신라를 품에서 놓아주고 돌아서서 신후를 쳐다봤다.

“오해하지 말게. 이번에는 결코 가져가기 쉽지 않은 물건을 도둑맞았어.”

신후가 무덤덤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슨대를 봉인한 함이 사라진 모양이군.”

“어떻게 알았지?”

타이밍 안 좋게 건우가 허리를 접으며 근처의 쓰레기통으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꿈이 현실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 순간 치밀어오른 구역질을 참아내지 못한 것이다.

신라는 재빨리 달려가 건우의 몸을 감싸고 귀력을 전해주었다. 따뜻하면서도 강한 그 기운을 받고 건우의 불안정했던 심장 고동이 조금이나마 규칙적으로 뛰게 됐다.

“고, 고맙다, 신라….”

“잠깐 소파에 눕는 게 좋겠어요, 선배.”

우선과 동주가 건우를 부축해 소파에 눕혔다.

신후는 모두에게 ‘그슨대’라는 요괴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는 바다의 어둠이 뭉쳐 태어난 요괴로, 상대의 정신을 망가뜨려 타락하게 만드는 질 나쁜 자였다. 비형랑이 그토록 잔혹한 요괴의 수장이 된 것은 그자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태용이 그의 설명에 덧붙였다.

“누구든 어두운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그 녀석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좋다. 여기 있는 어둑시니의 환생이 어둠으로 상대의 육체를 집어삼킨다면, 그자는 상대의 내면의 어둠을 증폭시켜 스스로를 몰락하게 만드니까.”

어느새 나타나 그들이 하는 얘기를 경청하고 있던 화비가 폴짝 뛰며 외쳤다.

“그 말은, 그 힘에 홀리기 전에 힘으로 밀어붙이면 물리칠 수 있다는 소리 아니야?”

태용이 화비를 하찮은 눈길로 쳐다보며 일갈했다.

“어리석군.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여기 있는 자들이 그자를 죽이지 않고 겨우 봉인만 해 놓았을 리가 있는가?”

“…그건 그렇지만…”

동주가 화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에 괴로운 기억이 없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화비의 말이 틀린 게 아닐지도 몰라요. 도망치기만 해선 그 녀석을 잡을 수 없을 테니까.”

우선도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봉인이 아니라 아예 제령시켜 버리도록 하죠. 그러니 동해의 귀인께서는 이만 안심하고 돌아가십시오.”

모두를 둘러본 태용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신라에게 머물렀다.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많이 상한 듯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근심 어린 표정을 내지은 그는 손을 뻗어 그 수척한 얼굴을 만지려고 했다. 하지만 중간에서 그 손을 붙잡아 내린 이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예전과 달리 태용의 행동을 확실히 차단하는 신후를 보고 혜령의 표정이 밝아졌다. 신라도 놀란 눈으로 신후를 바라봤다.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듯이 쳐다보는 동안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 차였어. 시작도 못 해보고.

그때 신후가 했던 말이 떠오른 우선은 서둘러 이 정적을 깰 필요성을 느꼈다.

“그…! 여동생분은, 오늘 안 보이시네요.”

덕분에 모두의 관심이 우선에게로 돌려졌다. 스스로 지뢰를 밟은 꼴이 된 우선은 당황해서 귓불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걸 보고 신후가 피식 웃었다.

‘내가 무너지지만 않으면 큰일도 아니라더니.’

태용이 떨떠름한 모습으로 우선을 향해 대답했다.

“아직 아무런 직책도 맡고 있지 않은 그 아이가 이런 일로 이곳에 올 필요는 없지.”

“그…렇군요.”

“안 그래도 호시탐탐 이곳에 놀러 올 생각을 해서 애를 먹고 있다만. 왜, 설마 관심 있는 건가?”

“아, 아뇨!”

붉게 물들었던 우선의 얼굴이 이번에는 사색이 되었다. 그의 다이나믹한 표정 변화를 보고 조교들은 졸지에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웃음을 참아내야 했다.

태용이 바다로 돌아가고, 모두 퇴근할 준비를 했다.

신후는 여느 때처럼 신라를 태우고 오피스텔로 향했다.

“……”

“……”

오늘도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지만, 왠지 그 분위기가 다른 날과 달랐다. 신라의 머릿속에, 태용의 손을 중간에서 막아냈던 신후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언제고 곁에 있는 게 힘들어지면 떠나도 된다고 했던 그가 이번에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 행동에는 단호함마저 묻어 있었다.

‘뭔가 달라….’

그 여인을 떠나보내고 나서, 어딘가 달라진 그를 느낄 수 있었다. 그에 대해 고민하기를 무의식적으로 꺼렸기 때문에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

잠깐잠깐 닿아가는 신라의 시선을 느꼈는지 신후가 입을 열었다.

“…네?”

“내가 막았잖아. 태용이 너에게 다가가려는 걸.”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신라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미안한 거 맞아요?”

“……”

무언이 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차를 오피스텔 주차장에 세운 신후는 바로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가지 않았다. 때문에 신라도 나가지 못하고 그를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돌아봤다.

“왜 안 내리세요?”

“정말 미안한 걸 아직 얘기 안 한 것 같아서.”

그가 먼저 얘기를 꺼낼 줄 몰랐던 신라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가방을 그러쥐고 아래를 쳐다봤다. 신후는 주차장 쪽을 바라본 채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네가 나에게 물었던 적이 있어.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적이 있느냐고. 난 그 질문에, 아직 없다고 답했었지.”

“……”

“불과 수개월이 지났는데 참 많은 일이 생겼어. 대부분 몰랐던 사실들이 뒤늦게 드러난 것일 뿐이지만…. 내 과오가 낳은 결과들을 보니, 난 속죄의 삶을 살 자격도 없는 놈이더군.”

그렇게 자조적으로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신라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신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더 용서가 안 되는 건, 그로 인해 가장 상처받은 사람이 다름 아닌 너라는 사실이야. 난 너에게 늘 뭔가를 종용하기만 했어. 학부생으로 들어오길 종용했고, 귀력을 다루는 법을 배우기를 종용했고, 그다음에는 나를 향한 관심을, 그리고 사랑까지….

위태로운 널 쥐고 흔든 건 비형랑도, 다른 귀신들도 아닌 바로 나야. 종적에는 원망마저 네 쪽에서 먼저 뱉어내기를 바랐지. 참 구제 불가한…”

“그만 해요!”

더는 듣고 있기 힘들어진 신라가 일그러진 눈을 가리며 외쳤다. 신후가 그녀를 돌아본 채 초연하게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먼저 말할게. 네 운명이 그렇게 길을 잃게 만들어버려서 미안해. 모든 게 아둔하고 건방졌던 내가 저지른 잘못이야. 그러니 속으로 꾹꾹 눌러 없애려고 하지 말고 날 원망해. 그런다고 그 원망과 배신감이 사라지진 않을 테니까.”

“배신감….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내 삶이 이렇게 된 게 당신 탓인 걸 알았다고 해서 되돌려지는 게 아니잖아. 내가 당신을 헐뜯으면 내 운명의 굴레가 온전해져? 당신이 내 원망을 듣는다고 해서 그 죄책감이 덜어지냐고.”

“……”

“그 여인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잖아…!”

신라의 눈에서 결국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턱에 맺혀 뚝뚝 떨어지는 것을 신후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넌 또 네가 아닌 나를 위해 우는구나.’

그는 결국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품에 넣었다. 그의 어깨 치에 얼굴을 묻은 신라가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비로소 감정을 토해낸 그녀를 보고 신후는 안도함과 동시에 더 깊은 죄책감으로 빠져들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에 우는 거라면 계속 울어도 좋아. 이 밤이 샐 때까지.”

“…흑…. 으윽….”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든, 두 사람 다 똑같이 안타까웠다. 신라는 둘 모두를 위해 서럽게 울음을 토해냈다.

“네 운명의 굴레는 반드시 내가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겠어.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렇게 만들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우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젓는 신라를 느낀 신후는 미소가 지어진 입술로 그 이마에 짧게 입 맞췄다.

“약속할게. 그동안 네가 불행했던 과거마저 지울 순 없겠지만, 앞으로의 불행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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