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장. 2막 (78/126)

77장. 2막

“소식… 들었어요.”

신라가 어렵게 운을 뗐다.

필시, 스스로의 결말을 결정짓고 떠나간 그 여인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신후는 나지막이 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렸다.

“둘이 만났다는 얘기는 들었어.”

“왜 그분을 붙잡지 않았어요?”

신후에게서는 오래도록 답이 없었다. 신라가 대답을 재촉하기 전, 겨우 그의 입이 열렸다.

“…나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신라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화가 차올랐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온 여인인데, 마지막 삶에서 저토록 아무런 의지 없이 앉아만 있는 남자가 바보 같고 답답했다.

“이제 못 만나잖아요! 그냥 그렇게 가버렸는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이제 어떻게 하냐고요!”

“그 여인에 대한 얘기라면 더는 할 필요 없어. 네가 그렇게 감정 소모할 이유 없으니까.”

“…뭐라고요?”

신라의 눈에 짙은 배신감이 차올랐다. 신후는 그녀의 감정을 못 본 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집에 가자. 좀 피곤하군.”

그가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손에 들 때까지, 신라는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돌리고 서 있었다. 나갈 채비를 모두 마친 신후가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깨물고 있는 입술을 매만져 그러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상처 나.”

“나한테 왜 감정 소모할 이유가 없어요?”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과오야. 너까지 괴로워할 필요 없다는 뜻이야.”

“그러면 내 상처는요? 당신 과오로 생긴 내 상처에 대해서는 괴로워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소리죠?”

신후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뱉어진 말이 그를 얼마나 할퀴어낼지 잘 알지만, 신라는 한 번 봇물 터지듯 흘러나와버린 감정의 폭포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 화가 난 감정을 빌려서라도 그 일에 대한 탓을 해야겠어요.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 여인을 왜 그렇게 손 한 번 못 써보고 떠나보냈어요?”

“애초에 뭘 부탁하기 위해 찾았던 게 아니야.”

“그러면요.”

“그녀가 나에게 소중한 추억을 줬던 건 맞지만,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이 아니었어. 만약 그런 감정이 둘 사이에 존재했다면 그건 나에게서 비롯된 일방적인 거였을 거야. 다시 만나기를 바랐던 이유는, 그 박복한 삶이 후생에서는 조금 더 나아졌는지 멀리서나마 확인하고자… 그리고…”

‘맡겨뒀던 것을 되찾기 위해서.’

신후는 마지막 말을 삼켜냈다.

그를 바라보는 신라의 눈가가 사그라지지 않는 감정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러면, 마지막 남은 그 감정은요. 완전히 포기한 거예요?”

아직도 그 여인과 함께해야만 사랑의 감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 신라의 착각이 씁쓸했지만, 신후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부터 이 감정은 주체할 수 없어질 테고, 아직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신라에게 그 감정은 독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더는 엇갈리기 싫었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

입을 다물어버린 신후를 보고 신라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요. 대답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신경이 곤두섰었나 봐요. 당신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그분을 떠나보낸 게 나를 향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봐.”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됐어요. 가요.”

“그게 다야? 화내는 거.”

많은 감정이 담긴 신라의 눈빛이 신후에게 닿았다.

“화내면 뭐가 달라지나요?”

“……”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은, 뱉어내야 사그라질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속으로 꾹꾹 눌러서 없는 것처럼 만들어야 견뎌질 때도 있어요. 또 토해내서 스스로 상처 입기 싫어요.”

먼저 교수실을 나서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이기적으로 애정을 갈구했으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번에는 그녀에게 분노를 종용하고 있었다.

겨우 솔직한 화를 이끌어냈지만, 그 이유는 그녀를 위해서가 아닌 그를 위해서였다. 이기적인 척해도 상대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 하는 그녀의 이타성이 너무 잘 보여서, 신후는 그와 대비되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짙어지고 말았다.

‘언제쯤 네 삶을 망가뜨린 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원망해줄 거야?’

그때가 되면 솔직하게 이 감정을 말할 수 있을 텐데.

죽음으로 사죄하게 된다고 해도….

* * *

한적한 분위기의 바다 마을에서 휠체어를 타고 해안가 제방을 산책하던 노인이, 멀리서 걸어오는 이를 발견하고 반갑게 웃었다.

“아아, 강 선생님. 와주셨군요.”

붉은 등대를 등지고 걸어오는 남자는 이런 외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도회적인 분위기의 미남이었다. 그의 몸에 둘러진 트렌치코트와 값비싼 구두가 아니어도 그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것을 알아채기에는 충분했다.

“변한 게 없으시군요.”

강 현은 노인의 앞에 다다라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악수를 건넸다. 노인은 양손으로 그 손을 덥석 붙들고 흔들었다.

“정말 이렇게 찾아와주실 줄은….”

“윤 선생님은 저의 첫 환자나 다름없으셨으니까, 제게는 추억과도 같으신 분이죠.”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노인은 힘없는 모습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는 강 현의 말대로 정신과 의사로서 첫 진료를 시작했을 무렵 맞았던 환자들 중 하나였다.

증상은 치매 비슷했는데, 다른 노인들에 비해 진행 속도가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가족들에게 버려지고 병원에서 쫓겨날 신세가 된 것을 강 현이 이곳 요양 병원으로 옮겨준 것이었다. 윤 선생의 원래 직업은 고등학교 음악 교사였다.

“바닷바람이 너무 세지요? 안으로 들어가서 따뜻한 차 한잔하고 가세요.”

윤 노인은 강 현을 이끌고 요양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 풍경이 내다보이는 1층 휴게실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강 현에게서 무언가 달라진 것을 눈치챈 윤 노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겝니까?”

강 현이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되물었다.

“뭔가 보이시나 봅니다.”

“원래도 이유 없이 쓸쓸해 보이는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더 선명하게 그 감정에 사로잡히신 것 같군요.”

“쓸쓸하다….”

“외로움 말입니다. 그 감정은 지독한 열병처럼 사그라들지는 않고 점점 크기만 더해 가죠.”

“그럼 이것도 병이군요.”

강 현이 덤덤하게 내뱉는 말에 윤 노인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병이라니요! 오히려 더 좋은 거지요.”

“더 좋다…?”

“외로움은 내가 여기에 있다고 외치는 감정과도 같습니다. 스스로의 외로움을 인정한 다음에야 비로소 상대도 나를 볼 수 있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가 있는 것이죠.”

윤 노인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보던 강 현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손안에 들어왔다가 모래처럼 빠져나가 버린 여인이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 왜 당신이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잘해줬고, 깊이 이해해줬는지 알 것 같아요. 당신은 나에게서 당신의 모습을 본 거예요. 동정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당신의 모습을.

당신은… 외로웠던 거예요.

“외로움을 인정하면, 그 사람이 나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소리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던 윤 노인이,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깍지 낀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 외로움에 잡아먹혀 버리면, 저처럼 아무것도 남는 것 없이 일생을 마무리하는 것이겠지요.”

“……”

강 현은 조용히 시계를 확인했다. 윤 노인이 부탁했던 일을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대였다.

“정말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강 현의 물음에, 윤 노인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은 윤 노인의 1인 병실로 갔다. 아무도 강 현이 그의 병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윤 노인은 잠을 자는 것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가 강 현에게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안락사(安樂死)’였다. 본인 말대로 외로움에 잡아먹혀 버린 노인은 삶을 영위할 의지와 용기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강 현은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노인의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약물을 투여하기 전, 윤 노인의 손이 황급히 강 현의 손목을 붙들었다.

“두려우십니까?”

그간 유일하게 의지했던 젊은 의사의 얼굴에서 유난히 사람 같지 않은 차가움을 느낀 윤 노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선생님은… 저를 보내시는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강 현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게 윤 선생님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길이 분명하니, 어쩔 수 없죠.”

“당신은… 참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강 현의 손이 천천히 주사기의 밀대를 밀어냈다. 그 안에 든 약물이 서서히 노인의 몸 안으로 침투했다. 잠이 오는 모양인지 눈꺼풀을 무겁게 끔뻑거리던 윤 노인이, 마지막으로 강 현의 얼굴을 시야에 담았다.

“부디 외로움에… 잡아먹히지 마십시오….”

강 현은 윤 노인의 얼굴을 차분히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약 십여 분이 지나도록 노인의 숨소리는 끊기기는커녕 고르게 내쉬어졌다.

강 현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모두 치고 문 또한 안에서 잠갔다. 그리고 다시 침대맡으로 걸어가 주머니에서 꺼낸 손바닥만 한 금속제의 함을 꺼내놨다. 작은 부적들이 곳곳에 붙어 있는 함은 마치 그 안에 뭔가 든 것처럼 스스로 덜그럭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쉬이… 곧 해방시켜 줄 테니 가만히 있어.”

작게 중얼거린 그는 윤 노인의 위로 양손을 뻗었다.

“이곳에 살기를 포기한 육신이 있으니, 오랜 세월 억울하게 어둠에 갇혀 있던 이는 빛으로 나와 기쁘게 새 육신을 차지하도록 하라….”

그 뒤로는 알 수 없는 언어로 된 주문이 이어졌다. 금속제 함에 붙어 있던 부적이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덜그럭거리던 함의 문이 열리며 엄청난 요기의 소용돌이가 뿜어져 나와 병실 안을 휘저어놓기 시작했다. 천장이며 창문이며 가리지 않고 마구 부딪히던 요괴는 강 현의 앞에 다다라 적대감을 표출했다.

강 현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영혼을 내리눌러 윤 노인의 몸에 빙의하게 만들었다.

- 키익…!

“끄윽…!”

발버둥 치는 요괴의 모습과 노인의 모습이 점차 겹쳐 갔다. 그리고 드디어, 완전히 육체에 동화된 귀혼이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겉모습은 윤 노인과 다를 바 없었으나, 생기 없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이채가 가득했다.

“이것 참…. 간만에 세상에 나왔는데 또 이런 늙은 몸이라니요. 주군….”

그가 하는 말을 듣고 강 현은 한쪽 입가를 당겨 웃었다.

“가장 오래된 신하에게 하사하기에 걸맞은 육신이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세상에 나온 것이 기분 좋은 모양인지 윤 노인 속 ‘무언가’는 웃는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잠시 후 간호사 하나가 노크한 뒤 얼굴을 들이밀었다.

“윤 쌤, 큰 소리가 나던디 뭔 일이라도 났답니꺼?”

윤 노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내지으며 대답했다.

“여기 내 친척 아이가 날 퇴원시키고 데려가겠다고 하는구나.”

“어? 저분은 친척이 아니라 서울서 윤 쌤 데리고 오신 정신과 의사 쌤 아니셨는교?”

“……”

미소를 지우지 않은 윤 노인은 간호사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다독거렸다.

“힘든 환경에서 일하느라 고생이 많구나. 그 좋은 기억력이 때로는 쓸모가 있지만, 때로는 널 많이 괴롭혔을 게야…. 그렇지?”

“예…?”

“쉬이…. 네 상념을 지울 만한 기억이 뭐가 있나 보자.”

어리둥절하게 윤 노인을 바라보던 간호사는, 갑자기 얼굴빛이 파래지면서 입가를 가렸다. 초점 잃은 눈동자가 무언가 괴로운 장면을 바라보는 것처럼 정처 없이 떨렸다.

“흐익…! 싫어! 그만둬!”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만! 그만해-!”

간호사는 윤 노인의 손이 떨어진 후에도 바닥에 주저앉아 쉴 새 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본 그는, 강 현에게 돌아서서 바깥으로 안내하듯이 손을 들어 보였다.

그들은 비명을 듣고 달려온 의사진들을 지나쳐, 유유히 병원 복도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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