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장. 어딘가 달라진 (77/126)

목차

76장. 어딘가 달라진

77장. 2막

78장. 봉인이 풀리다

79장. 새로운 인물

80장. A Guilt Trip

81장. 트랩

82장. Guilty, Honesty, Sympathy

83장. 신의 사자

84장. 꿈 요괴의 숲

85장. 고백

86장. 초대

87장. Andante

88장. Sincerely

89장. 목소리

90장. 접신

91장. 예상치 못한 적

92장. 조력자

93장. 지켜줘

94장. 선전포고

95장. 경거망동

96장. 빼앗긴 영혼의 조각

97장. 주술의 완성

98장. 여기에 있어

99장. 이상 징후

100장. 고백, 그 후

76장. 어딘가 달라진

가을의 기운이 만연한 캠퍼스는 유독 바람이 많이 불어 평균 기온보다 싸늘했다. 학생들은 과 잠바나 두꺼운 코트를 챙겨 입고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막 끝이 난 중간고사 결과에 대해 떠들었다.

“모두 나눠준 자료의 첫 페이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강단에 선 한신후가 입을 열자마자, 어수선하던 강의실 안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한동안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보이던 한신후는 다시 원래의 완벽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일부는 그의 귀환에 기뻐했고, 일부는 아쉬워했다. 그도 똑같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좀 달라졌어.”

여학생들이 수군거렸다.

“너도 느꼈지?”

“응. 처음에는 거역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서 강의에 집중했는데, 요즘에는 그냥 막 끌린달까…. 잘생긴 걸 애초에 몰랐던 것도 아닌데 말이지.”

“맞아. 쳐다보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 설렌다.”

신라는 늘 앉던 자리가 아닌 창가 쪽으로 옮겨 있었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간혹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길 때가 많았다.

늘 신라의 필기를 베끼기만 했던 서영은 은혜라도 갚으려는 듯 신라 대신 열심히 수업에 임했다.

“여러분은 살면서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무리 현대의 문명이 발전했어도, 상당 부분이 고대의 문명과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운을 떼며 교탁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어쩌면 나른하게도 보이는 그 모습에 여학생들은 물론 남학생들도 속으로 감탄하며 넋을 놓았다.

“고대의 문명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뭡니까.”

서영이 손을 들고 대답했다.

“‘종교’입니다, 교수님.”

“맞습니다. 무리를 지어 정착하고 살게 되고부터, 그들은 그들을 하나로 결속시킬 신적인 존재와, 어떨 때는 두려움마저 줄 수 있는 신앙심이 필요했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닌데도, 정말 신을 보고 믿는 자들처럼 그들은 신에게 충성했습니다. 신이 정한 규율에 위배되는 짓을 하면 즉시 처형시킬 정도로 말이죠.”

한 남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그런 야만적인 고대의 문명이 현대의 문명과 어떻게 일맥상통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좋은 지적입니다.”

신후가 작게 미소 짓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고대의 종교와 현대의 종교는 무엇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느냐에서 큰 차이가 나죠. 우리는 교회나 절, 성당에 가서 기도를 드립니다.

신이시여, 제가 이런 죄를 지었으니 부디 죄를 사하시어 이 가엾은 영혼을 고통 없는 내세로 이끌어주소서….”

멍하니 신후의 말을 경청하던 서영이 신라의 가까이에 다가가 속삭였다.

“종교는 없다고 들었는데, 저렇게 섹시하게 기도하면 어떤 죄를 지어도 다 용서해주시겠다. 안 그래?”

“……”

그 말에 신라는 창가에서 시선을 떼고 신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우리 삶은 편리하기 그지없으니, 딱히 신에게 현세의 안녕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가끔 중요한 시험이나 결과를 앞두고 반짝 기도하는 것밖에는요.

하지만 과거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심지어 짐승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었던 그들은 신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 기후를 잠재워 달라, 새로운 제사장을 뽑아달라’, 이런 현세의 삶에 초점을 맞춘 기도들을 많이 했던 거죠.”

한신후가 종교에 대해 이렇게 길게 강의를 하는 모습이 사뭇 낯설었다. 그래서 신라는 턱을 괸 채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인류의 지식의 폭과 깊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행동 양식에는 그 고대 종교의 패턴이 종종 드러납니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연예인들과 그들을 응원하는 팬들이 그 일례입니다. 그들은 대개 우리보다 말을 잘하거나,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유머러스하거나, 뛰어나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말에 학생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보다 뛰어난 외모를 가진 연예인은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과거 고대인들이 그들보다 오래 살거나 힘이 센 동물들을 신적인 존재로 숭배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 본능을 아직 따르고 있다는 증거죠. 자주 접촉할 수 있으면서도 초월적인 존재를 지도자로 세우고 숭배하는 것…. 그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인 겁니다. 과연 신이 정말로 있다면, 이런 현대인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교탁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운 신후는, 그 위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두드리다가 자연스럽게 신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학생들은 그가 창가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 줄 알고 그 모습을 멍하니 구경했다. 일부는 핸드폰으로 몰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아마도 신은 괘씸하게 생각할 겁니다. 본인이 아닌 동일한 인간을 숭배하는 그 양상에 참을 수 없이 질투가 나겠죠. 또한 나태해질 겁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된 인간들에게 딱히 해줄 수 있는 일도 없으니까요. 고작 자신들을 다시 경외하게 만들도록 커다란 재해를 입히거나, 죄에 대한 ‘비뚤어진 형벌’을 내리는 것밖에는….”

신라는 오랜만에 신후와 긴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노을 지던 저녁 찾아왔던 지국천왕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신후를 못마땅하게만 여기는 줄 알았던 그가 가장 신뢰하라고 떠민 것은 다름 아닌 신후였다.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신의 미움을 산 남자를 어떻게든 보듬어주고, 그가 되고픈 모습이 되도록 도와주리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해버렸다. 인간의 감정을 먹고 사는 어둑시니의 운명 같은 것일까, 미움마저 가져가 버린 남자는 결국 원망할 것이 신밖에 없을 것이다.

신라는 서영에게 인사를 남기고 먼저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나섰다. 비슷한 타이밍에 강의실에서 나온 신후는 신라와 마주쳐 우뚝 멈춰 섰다. 출퇴근을 같이하고 연구실에서 종종 보는 사이인데도, 이렇게 예기치 못한 마주침에 어색할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되었다.

“몸은…”

그가 겨우 입을 열었을 때, 신라의 뒤쪽에서 걸어오던 배 교수가 들뜬 모습으로 외쳤다.

“한 교수님~!”

덕분에 자리를 떠날 명분이 생긴 신라는 신후와 배 교수에게 번갈아 목례를 하고는 돌아서서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미련이 잔뜩 남은 신후의 시선이 신라의 뒷모습을 쫓았다.

‘어라?’

신후의 근처까지 다다랐던 배 교수는 신후의 그런 눈빛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본인을 향한 눈빛이 아님에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애절하고 간질거렸다.

“교, 교수님. 점심에 약속 있으세요?”

“…예?”

뒤늦게 상념에서 빠져나온 신후가 배 교수를 쳐다봤다. 짙은 감정의 여운에 젖어 있는 신후의 시선이 닿자, 얼굴마저 새빨갛게 달아오른 배 교수가 겨우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점심 약속 있으시냐고요.”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만….”

“그럼 저녁은요?”

“유감이지만 저녁이라고 생각이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그러면-”

이기적인 성격 속에 제법 소녀다운 순정을 품고 있는 여자. 신후는 그녀가 열심히 애쓰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힘 빠진 웃음을 내뱉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잠깐 차 한잔할 시간 정도는 있습니다. 근처 카페로 나가시겠습니까?”

“…네? 아, 네! 좋죠, 차!”

“자료만 두고 나오겠습니다. 건물 밖에서 뵙도록 하죠.”

“네!”

교수실로 향하는 신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 교수는 꿈을 꾸는 것 같은 얼굴로 뺨을 꼬집어보았다. 그런 그녀의 뒤로 신후의 강의를 듣는 여학생들이 음흉한 웃음을 달고 몰려들었다.

“교수님, 꿈 깨세요!”

“얘, 얘들이 뭐래니!”

“요즘 한신후 교수님, 작정한 사람처럼 페로몬 뿌리고 다니는 게 장난 아니라니까요. 교수님 아니고도, 차 얻어 마신 학생들 짱짱 많아요~”

“우씨… 신경 끄고 가서 공부들 해!”

신후는 해가 질 때까지 교수실에서 논문 작업을 했다.

연구실과 통하는 문이 두드려지고, 우선이 조용히 들어왔다.

“다들 퇴근해보려고요.”

“그래. 들어가 봐.”

다시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내리는 신후를 보고, 우선은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어 발을 떼지 못하고 서 있었다. 신후가 그런 우선을 한 번 더 쳐다봤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으셨던 건 아니죠?”

조교들 중 누구도 먼저 묻지 못했던 말을 결국 우선이 꺼낸 것이다. 신후는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으며 잠시 눈을 비볐다.

“그걸 이제야 묻는 건, 다들 필요 이상으로 걱정했기 때문이겠지?”

“비형랑이 잠시 꼬리를 감춘 건 반길 만한 일이지만, 신라와는 왜 갑자기 그렇게 어색해지신 거예요?”

“의외네…. 그 애를 무사히 구해오기만 한다면 너희가 안심하고 평소처럼 지낼 줄 알았어.”

“…일단은 인간이거든요. 분위기 파악 정도는 할 줄 아는.”

“그래…. 알지.”

신후의 힘 빠진 웃음을 보고, 우선은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더욱 짙어지는 걸 느꼈다. 그것은 그를 바라볼 때 늘 느꼈던 불안함과 비슷한 종류였다.

‘뭔가 달라졌어….’

우선이 계속 나가지 못하고 서 있자, 신후는 모니터를 끄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우선이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대답했다.

“차였어. 시작도 못 해보고.”

“…네?”

우선의 표정이 볼만해져, 신후가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그거… 실성한 웃음 아니시죠?”

“실성이라… 했을지도 모르지.”

“…비형랑과 싸우기 직전이었군요. 그래서 신라를 구해오는 데에 그렇게 뜸을 들이신 거예요.”

“차인 이유가 너무 확실해서.”

“……”

신라가 괜히 그를 밀어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당사자와 달리 우선은 심각한 얼굴이 됐다. 한때 폐인이 되었던 신후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렇게 웃어넘길 주제가 아님이 분명했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마. 네가 그러면 정말 큰 일인 것 같거든.”

“…당신이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무엇도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고. 상처 자리는 이제 완전히 아물었나?”

“덕분에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안 했지만, 일전에 차동주한테 일어났던 일이 단순히 우연으로 벌어진 게 아니라는 건 잘 알지?”

“……”

그들의 삶은 속죄의 시작이었다. 때문에 일생에 한 번은 그렇게 큰 고비가 찾아올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차 조교의 비극은 네 힘으로 막은 거나 다름없어. 하지만 네 비극도 그 녀석이 막아내 줄 수 있을지 의문이군.”

“만약에 저의 끝이 안 좋게 난다고 해도, 그 녀석을 원망하지는 마세요.”

“네가 그렇게 된다면 차 조교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지독하게 원망할 거야. 널 지켜내지 못했으니까.”

가라앉아 있던 우선의 눈빛에 잔잔한 일렁임이 생겼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일어날 법한 일에 대해 덤덤히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저 말들에서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 애정 같은 낯간지러운 게 느껴지는 것이다.

“교수님, 혹시…”

우선이 긴가민가한 얼굴로 입을 열었을 때, 연구실 문이 다시 한번 두드려졌다. 두 남자는 그것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나가볼게요. 남은 일 없을 테니 데리고 퇴근하세요.”

“그래.”

우선은 그에게 인사를 남기고 다른 쪽 문으로 걸어 나갔다.

신후의 들어오라는 소리에 연구실 문이 열리고 신라가 걸어 들어왔다. 신후는 일부러 일어나지 않고 책상에 깍지 끼운 손을 올려놓은 채 물었다.

“퇴근, 준비됐어?”

“…우선 선배가 방금 나갔나 봐요. 목소리가 들리던데….”

“응. 퇴근한다고 해서 보냈어.”

“……”

무언가 뜸을 들이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드디어 그녀가 그들 사이에 대해 할 말이 생겼음을 눈치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편하게 해.”

그는 모든 걸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초연한 얼굴로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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