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장. 감춰두었던 것 (76/126)

75장. 감춰두었던 것

신후가 신라를 무사히 구출한 사실은 이미 다들 연락을 받아 알고 있었다. 신라뿐만 아니라 신후도 생각보다 큰 상처 없이 돌아왔고, 비형랑은 기운이 쇠약해져 잠시 모습을 감추게 됐다. 다행인 일이었다.

조교들은 덕분에 연구실이 다시금 활력을 되찾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신라가 없었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신후와 신라, 이 두 사람 사이에 말이다.

“조별 과제를 해야 해서 오늘은 자리를 비울 거예요.”

“알았어.”

할 말만 딱 하고, 그 외의 잡담은 없었다.

“여기 준비하라고 하신 자료요.”

“고마워. 거기에 두고 가.”

보는 이가 더 간질거릴 정도로 서로를 향하던 시선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두 사람….”

혜령이 둘 사이의 일을 가장 궁금해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출퇴근을 같이했다. 그러니까 달라진 점은 마치 싸운 사람들처럼 말수가 줄어들었다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필요하겠지.’

신후는 신라의 속도에 맞추기로 했다. 그녀의 오해를 억지로 푼다고 해도 응어리진 저 배신감이 사그라들지 않는 한 무엇도 전할 수 없을 테니까. 다만 혜령에게, 신라의 건강 상태를 체크해 줄 것을 부탁했다. 불면증은 그렇다 쳐도 핼쑥해진 것은 영양상의 문제 같았기 때문이다.

하루 중 마지막 강의를 들은 신라는 연구실에 들르지 않고 곧장 오피스텔로 향했다. 하늘 저편으로 아름답지만 서글픈 노을이 져 있었다.

가방을 고쳐 매며 터덜터덜 걷고 있는 그녀의 앞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상념에 빠져 있던 신라는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굴다리 아래에 서 있는 그를 지나쳐버렸다.

“요새도 커피는 자주 마시니?”

우뚝, 그녀의 다리가 멈췄다.

굴다리 위에서는 어딘가에서부터 귀가하는 차들이 빠르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신라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주…, 준호 오…빠?”

지금은 물론 시각장애도 없고 나약함보다 강인함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지만, 신라에게 저 미소는 언제나 똑같은, 따뜻한 동네 오빠의 웃음일 뿐이었다. 왈칵 울음을 터뜨린 그녀는 달려가서 그를 세게 끌어안았다.

“오빠… 준호 오빠….”

“못 본 새 많이 약해졌네, 우리 신라.”

“흑….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

“잠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뿐이니, 오래 있을 수는 없어.”

신라는 눈물을 참아내며 그의 손을 꼭 그러쥐었다.

“힘들어 보이네.”

지국천왕은 손을 뻗어 신라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 자상함에 한동안 혼자만 끙끙 앓았던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못 미더웠지만, 지금 널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는 건 어둑시니 그 자임이 틀림없어.”

“그 사람은… 지금 날 보는 것만으로 힘들 거예요.”

“어째서지?”

“나는 그가 저지른 과오니까.”

“죄는 그 자가 저질렀는데, 왜 너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는 건데?”

“그야…!”

신라는 고개를 들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국천왕이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가서 화를 내. 때리고 소리치라고.”

“안 돼요…. 겨우 찾아 헤매던 걸 찾은 사람인걸요. 방해할 수 없어요. 그래서 먼저 빠져주려고요. 난 어차피 ‘나머지’일 뿐이…”

“신라.”

진중해진 목소리로 부른 지국천왕이 다가와 신라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어디에서든 중요하지 않은 영혼은 없어. 질서를 맞추기 위해 튕겨 나왔다 해도, 너 또한 우리가 지켜보는 소중한 영혼 중 하나야.”

“……”

“너에게는 죄가 없어. 그러니 스스로가 아닌 남을 탓해. 모든 걸 알고도 함구했던 날 원망해도 좋고, 네 굴레를 그렇게 만든 어둑시니를 원망해도 좋아. 한신후를 향한 사랑을 접는 것…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게 누군가를 위해 양보하는 것이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애초에 상대방의 마음도 모르는데 왜 지레짐작해서 스스로를 상처 주려고 하는 거야?”

“……”

“가서 화내. 죽기 직전까지 때리고 와. 왜 널 그렇게 만들었느냐고 울부짖어. 그래야 그 미련한 남자도 감추고 있던 속마음을 얘기할 거야.”

“하지만….”

‘무서워.’

신라는 속으로 외치며 가슴팍 옷깃을 그러쥐었다.

사실은 그의 변명을 듣기가 무서운 것이다. 죄책감에 시달린 그가 다 포기해 버릴까 봐. 영원히 숨어버리려고 할까 봐.

지국천왕은 신라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품에서 기다란 향 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회귀향(回歸香)이야. 십장생 중 ‘구름’의 기운을 가졌다는 보물이지.”

“이런 걸 왜….”

“이제 이런 모습으로 네 앞에 나타나는 건 마지막이 될 거야. 되돌아오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때, 이 향을 피우도록 해.”

“……”

신라는 멍해진 얼굴로 회귀향이 든 향 갑을 건네받았다.

“오빠는…”

다른 얘기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든 신라는, 지국천왕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서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준… 준호 오빠!”

하지만 그 애타는 부름은 대답 없는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그때 굴다리 벽에 기대 서 있던 또 다른 이가 신라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한 화비였다.

“널 데리고 곧장 가보라고 하신 데가 있어. 따라와.”

“……”

화비가 신라를 데리고 간 곳은 식물인간으로 살고 있는 여인의 병실이었다. 신라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이 여인이 바로 신후로 하여금 인간의 명운을 건드리는 죄를 짓게 만든 여인의 환생일 것이라고.

“얼마나… 됐대?”

병석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묻는 신라에게 화비가 대답했다.

“거진 2년.”

“왜 깨어나지 못하는 거야?”

“원하지 않아서. 항상 감정에서 뭔가 결여된 듯한 느낌을 끌어안고 살고 싶지가 않댔나….”

“…그래서 교수님은? 어떻게 설득하셨어?”

“설득? 그런 거 안 했어. 그냥 만날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만 하던데.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건지….”

“……”

“그래서 그토록 애타게 찾은 영혼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고.”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에 신라의 눈가가 의문을 담으며 살짝 찌푸려졌다.

그때 창가에 걸터앉은 여인이 발장구를 치며 끼어들었다.

- 정확히, 내 감정이 그래요.

신라가 놀란 눈으로 그쪽을 쳐다봤다. 어느새 병실에 나타난 여인의 영혼이 생글거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 그 남자 좀 그만 오게 해줄 수 없어요? 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자꾸 미안하다는 소리만 반복하고…. 떠나지 못하도록 멀리에서 끈질기게 붙잡았으면서, 나에게서 정작 아무것도 얻어가지 않아요. 그 남자가 바라는 게 뭐죠?

신라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에게 증표를 남겨놨고, 당신을 찾게 되는 대로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고 했어요.”

- 어떤 기억이죠?

“사랑…했던 기억이요.”

여인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 그쪽이 기억을 되찾은들 뭐가 달라지죠?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그건….”

- 애초에 그 사람은 날 사랑하는 느낌으로 바라보지 않았어요. 눈이라도 제대로 마주치면 다행이었죠.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났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달콤한 시간들을 선물했던 남자다. 만약 사랑했던 기억을 되찾았다면 이 여인을 애틋하게 바라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한 거야? 왜…?’

신라는 여인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당신이 지금 몸에서 나와 있는 지 오래됐기 때문에, 계속 뭔가 결여됐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요?”

- 아뇨. 확신할 수 있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늘 그랬는걸요.

“그럼 그 결여된 것을 다른 사람이 채우게 하면 되잖아요.”

지끈-

스스로의 말이 심장을 할퀴는 것을 느꼈지만 신라는 꾹 참아냈다.

- 비어 있는 감정을 채우기 위해 두 배로 그 감정을 퍼붓는 쪽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괜찮아요… 그런 것쯤. 곁에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여인이 신라를 깊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신라가 본인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 나도 온전치 못하고, 보아하니 그 남자도 온전치 못해요. 왜 행복하지 않은 길로 우리 둘을 밀어 넣으려고 하죠?

“……”

- 당신이 해요.

여인이 신라의 어깨를 쥐었다.

- 나는 지금에 만족해요. 그리고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여태 떠나지 못했던 건 오직 그 남자 때문이었어…. 그러니까 당신이 그 남자를 책임져요. 그래야 내가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지.

“난…”

- 가엽고, 예쁜 사람들.

여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신라의 뺨을 쓰다듬었다.

- 당신들은 닮았어요. 차가운 내 심장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 줘. 만약 내 존재가 당신에게 상처가 됐었다면 미안해요.

신라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입을 열지 못했다. 과거에 어둑시니가 이 여인에게서 어떻게 따뜻하게 위로를 받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이 여인도, 그 따뜻함의 흔적마저 이렇듯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여인은 잠시 후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신라는 한동안 여운에 잠겨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늦은 새벽녘, 신후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요 며칠 새 자주 들락거렸던 병실로 급히 찾아갔다. 여인의 몸에서 결국 생명력이 급격히 꺼져가고 있다는 비보였다. 무언가를 계기로 몸이 스스로 작동하기를 멈췄고, 의사 말로는 그녀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다.

여인의 가족들이 눈물을 훔치며 병상에 둘러 서 있을 때, 신후만이 물끄러미 병실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의 주인인 여인이 많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 한 여자분이 다녀갔는데요, 참 예쁘더라고요. 어딘가 가엽고…. 하지만 강해 보이고. 당신과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

- 당신은 전생에 내 행복을 원했다고 했었죠. 그래서 나, 다음 생에는 당신이 바랐던 만큼 정말로 행복한 사랑 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 거예요. 그 정도는 들어주시겠죠?

신후는 초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인이 해맑게 미소 지었다.

잠시 후 이 근방을 담당하는 지하 사자가 회중시계를 든 채 병실에 찾아왔다. 지하 사자는 신후를 발견하고 잠시 그를 경계했다. 그걸 보고 신후가 역시나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었다는 걸 깨달은 여인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어깨 근처를 더듬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환자복 아래에 숨어 있던 새하얀 비단옷이 그녀의 손에 걸려 사라락, 벗겨졌다.

- 이거였구나…. 당신이 나에게 남겼다는 증표. 너무 오래 입고 있었던 거라서 익숙해졌었나 봐. 아주 가끔 느낄 수 있었던 따뜻한 감정은 이 옷 때문이었어.

그것은 그녀가 전생에 숨을 거두었던 날, 신후가 그녀의 집 툇마루에 직접 놓아두고 갔던 비단 수의(壽衣)였다.

- 미안해서 망설였군요. 당신의 감정을 이 수의에 숨겨놓았는데, 찾아와보니 내가 이런 꼴을 하고 있었던 거야. 차마 되찾아갈 수가 없었겠지.

“…그래.”

- 바보 같은 사람….

여인은 웃으며 신후에게 그 수의를 건넸다. 신후는 그것을 받아들고 먹먹해진 모습으로 여인을 다시 눈에 담았다. 정해진 시간이 됐음을 확인하고 지하 사자가 다가오자, 여인의 혼이 반짝거림 속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 찾아와줘서 고마웠어요.

신후는 수의를 품에 넣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신이 내린 벌로 자세한 기억은 되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조차 모르게,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숨겨두었던 감정에는 아득하게나마 기억의 일부가 스며들어 있었다.

- 이름 모를 귀신님….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 뭐지?

- 내가 죽어 묻히게 되면… 가끔 보러 와주세요. 내가 당신을 보러 갔듯이…. 이리 조용히 짧게 살다 가는 것이… 금방 잊혀질까 두려우니….

- 알겠다.

다음 생에는 부디, 진정한 사랑을 만나기를.

-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