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장. 보고 싶어
“이봐!”
냄새 나는 절름발이가 말을 걸어 기분이 상한 나주연은 콧방귀를 뀌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자 절름발이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왔다.
“이봐! 재물귀!”
“이게 어디서 내 정체를 함부로-!”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화려한 옷차림의 여인이 절름발이를 발로 내리누르고 있는 모습은 부유층의 ‘갑질’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지 몰랐다.
“이제 보니 우리 주군이 키우는 벼룩이었군? 없는 것처럼 잊은 채 살고 있으면 가끔은 꿈틀해서 재미를 주는.”
“크윽….”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추병귀는 그녀의 발에서 벗어나 옷을 털어낸 다음 가지고 있는 정보를 비밀스레 공유했다. 그것을 듣고 나주연의 표정이 흥미를 담았다.
“그래서, 네가 다 쳐놓은 그물을 나는 건져내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지?”
“어때. 이만하면 쓸 만하지 않아? 주군께 내 얘기 좀 잘…”
“그야 결과가 잘 되면~”
비릿한 웃음을 남기고 미련 없이 떠나는 나주연의 뒤를, 그녀의 요기의 본체인 애완귀가 졸졸 따랐다.
그녀는 곧 근방에 있던 작은 병원에 다다랐다. 추병귀가 준 정보대로, 어둑시니의 연구실에 가끔 훼방을 놓는 중년의 형사가 병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장 형사가 도착한 병실에는 그의 어린 딸이 누워 있었다. 병명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잃어가, 비싼 치료비를 주고 온갖 종류의 검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정신 좀 차려…. 이 아빠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잖아.”
일할 때는 ‘미친개’로 불릴 만큼 거침없는 그였지만 가족들에게만큼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그 광경에 나주연은 혀를 쯧쯧 찼다.
“어디, 한번 ‘희망’을 줘 볼까?”
그녀의 눈짓에, 애완귀가 형체 없는 연기가 되어 장 형사에게로 날아갔다. 재물귀의 본체를 몸에 들인 장 형사의 눈빛이 순간 표독스럽게 바뀌고 말았다.
* * *
“교… 교수님!?”
이른 아침, 연구실로 들어선 신후를 보고 혜령을 비롯한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유령이라도 본 얼굴이지?”
“벼, 병가는 어떻게 하시고요?”
동주의 물음에 신후는 짧게 답하며 교수실로 들어갔다.
“철회했어.”
그 말에 가장 기뻐한 건 더이상 수업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건우였다. 혜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신후를 따라 교수실로 들어갔다.
“그래서 신라는요? 구하러… 가실 거죠? 그러려고 나오신 거죠?”
애가 타는 혜령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후가 피식 웃어버렸다.
“신라를 구하러 가는 게 출근이랑 무슨 상관이지?”
“농담하지 마시고요. 바로 어제까지 어떤 몰골이셨는지 제가 알거든요?”
“장소는 이미 알아냈어.”
“네에!?”
드디어 한신후가 한신후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혜령은 감동에 북받친 얼굴로 눈물마저 그렁거렸다. 밖에서 얘기를 들은 나머지 조교들도 비장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어디인지 좌표만 알려주세요. 저희가 목숨 걸고…”
신후가 고개를 저으며 건우의 말을 끊었다.
“아니. 이번에는 나 혼자 다녀온다.”
“예?”
“너희는 연구실을 지키고 있어.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니까.”
다들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신후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누구보다 그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신후는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책상을 정리하고 중요한 서류들을 랩장인 우선에게 건넸다. 마지막으로 덤덤하게 코트를 걸치는 그의 모습은 단순히 출장을 떠나려는 사람의 모습 같았다.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 말에 모두의 눈빛이 한층 가라앉았다.
우선이 나지막이 말했다.
“걱정 말고 신라를 데려오는 것에만 집중하세요. 이곳은 저희가 잘 지켜낼 겁니다.”
“…그래.”
신후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홀로 교수실을 나섰다. 힘을 아끼기 위해 될 수 있는 데까지는 자가용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그는, 조수석에 미리 탑승해 있는 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에게 용건이 있어서 온 건가?”
그는 예전에 신후와 모종의 거래를 했던 지하 사자였다.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
지하 사자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바닥만 한 검은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지하 사자들에게 전해지는 ‘지령’ 종이였다.
- 단 한 번. 먼저 받아봤으면 하는데.
“당신이 바랐던 게, 바로 이 한 장이었죠. 이걸로 우리 거래는 끝입니다.”
신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카드를 받아들었다. 지하 사자는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하….”
그의 입에서 허무한 숨이 터져 나왔다. 시계의 시각을 확인한 그는 당장 차에서 박차고 나왔다.
- 때를 놓치고 후회하지 마.
지국천왕이 남긴 말이 선명하게 귓가를 울린다.
그는 코트 자락을 휘두르며 어둠 속으로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나주연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현 비형랑의 거처지를 알아낸 추병귀는 마치 금의환향한 자의 얼굴로 저택에 멋대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저녁이라 그의 존재를 눈치챈 이는 별로 없었다.
“이렇게 넓은 대저택에, 내가 묵을 곳이 한 공간도 없단 말이야…?”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며 1층부터 3층까지 샅샅이 돌아다니던 그의 눈에, 믿기지 않는 실루엣이 포착됐다.
“유신라…?”
그는 조금 열린 방 문틈으로 신라의 모습을 엿봤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여인이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귀력이 다 내 것이었으면….’
추병귀의 이가 절로 갈렸다. 솜털처럼 자라 있던 머리칼이 저 귀력에 반응해 바짝 곤두선 상태였다. 하지만 마약 같은 그 힘은 동시에 트라우마이기도 했다. 저 힘을 억지로 취하려다가 무슨 짓까지 당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그래…. 차라리 없애버리면 속이 시원할지도. 어차피 내가 갖지 못할 힘이라면 없어져 버리는 게 낫지.’
그때 기척을 눈치챈 신라가 문가를 돌아봤다. 강 현인가 싶어 천천히 문을 당겨 나가본 그녀는 예상치 못한 자가 서 있어 싸늘한 표정이 되었다.
“너는…!”
“그 반응 섭섭한걸! 이제 미운 정이 들 때도 되지 않았나?”
“그걸 말이라고 해?”
신라가 추병귀의 멱살을 거칠게 쥐었다.
“으억!?”
“너 때문에 선배들이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알기나 해? 우선 선배는 가장 친한 친구의 손에 죽을 뻔했다고!”
“이, 이 계집이…!”
“절대 용서 못 해.”
신라의 두 눈동자가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귀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대로 가다간 없애긴커녕 거꾸로 당할 지경이라서, 추병귀는 미꾸라지처럼 급하게 빠져나와 저택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기 서!”
신라는 추병귀를 따라 저택의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잠시 눈이라도 붙이고 있는 건지, 평소라면 귀신처럼 나타났을 강 현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저런 자를 수족처럼 부리는 남자였어.’
신라는 뒤늦게 깨달았다. 추병귀가 저지른 모든 만행이 결국 강 현이 바라는 일이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찬물로 끼얹은 듯 모든 감정이 식었다.
‘추병귀를 붙잡고 이곳에서 나가야겠어.’
신라는 귀력으로 요괴의 힘을 빌려, 추병귀의 다리를 꼬이게 만들었다. 바닥에 나뒹군 추병귀는 기어서라도 절벽 끝까지 이동하려 했다.
“그만 포기해. 널 붙잡아 가서 경찰에 넘길 거야. 여태 했던 짓을 조사하게 만들면 뭐라도 실마리가 나오겠지.”
“경찰? 경찰이라…. 큭큭! 꼭 그 장 형사라는 놈에게 데려다 달라고!”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기분 나쁘게 웃는 추병귀를 보고 신라는 화를 참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요괴의 힘을 빌려 이번에는 추병귀의 몸을 허공 높이 띄웠다.
“끄악-!”
그때 신라의 뒤로 다가온 나태귀가 소심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모든 의지를 빨아들였다. 무릎을 접으며 주저앉고 만 신라가 힘겹게 뒤를 돌아봤다.
“너…!”
“넌 저택 밖으로 나가거나 도망치면 안 돼. 주군의 명이니까.”
“그만… 둬!”
어느새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쓰러져 있던 추병귀가, 이때다 싶어 신라의 목덜미를 붙잡고 절벽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 우악스러운 힘에 신라의 가녀린 몸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뭐, 뭐 하는 거야, 너! 주군한테 죽고 싶어!?”
나태귀가 당황해서 발을 굴렀다. 하지만 추병귀는 낄낄대며 웃을 뿐이었다. 이미 그에게서 공포라고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비형랑에게 전해…. 이게 날 얕보고 개만도 못하게 다룬 대가라고!”
추병귀의 몸이 먼저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신라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다가 손이 미끄러진 그는 그녀의 팔 옷깃을 찢으며 좀 더 아래로 떨어졌다.
‘못 버티겠어….’
이미 기운이 다해버린 신라는 추병귀의 무게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의 몸도 흙바닥에서 미끄러지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두 개의 인영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절벽을 때리는 검은 파도를 향해 추락했다.
‘죽을 거야.’
그 순간 왈칵 눈물이 난 신라는 입을 틀어막았다.
‘죽으면 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겠지.’
환생조차 할 수 없으니 이대로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지막에 웃는 얼굴로 헤어질 걸 그랬다. 체온은 차갑지만 늘 따뜻하기만 했던 그의 손길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보고 싶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그에게 닿을 리 만무했다.
“정말이야?”
그런데 거짓말처럼 대답이 들렸다.
신라는 꾹 감고 있던 눈물 젖은 눈을 천천히 떴다. 남자의 팔에 단단히 휘어 감긴 몸은 더이상 추락하지 않고 있었다.
“한신후…?”
신후는 나머지 손으로는 절벽을 붙잡고 있었다. 꽤 버거워 보였지만 신라를 바라보는 얼굴에만큼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나한테 한 말 맞아?”
“…지금 제일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예요?”
“난 내가 차인 줄 알았거든.”
“맞아요. 찬 거.”
“그런데도 보고 싶었다는 거지?”
강하게 보이고 싶었는데 눈물이 먼저 흘러버렸다. 신라는 결국 울상이 지어진 얼굴을 감췄다.
“그래요…. 그게 이상해요?”
“아니.”
신후는 어둠의 힘을 빌려 신라와 함께 무사히 절벽 위로 올라섰다. 추병귀의 몸은 이미 검은 파도에 먹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네가 하고 떠난 오해들부터 풀어주고 싶지만, 일단은 저쪽이 더 시급할 것 같군.”
신후가 바라보는 쪽을 함께 쳐다본 신라의 표정이 굳었다. 어느새 강 현이 저택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서 있었던 것이다. 아무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있는 강 현의 손에는 언제라도 귀력을 내뿜을 수 있는 귀혼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신라 씨.”
강 현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신라는 고개를 저으며 신후의 뒤로 물러났다.
“당신이 환생할 수 없도록 굴레를 끊어놓은 남자예요. 정말 그를 따라가도 후회하지 않겠어요?”
강 현의 말을 듣고도 담담해 보이는 신후를 보고 신라는 그가 모든 걸 알게 된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강 현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대답이 됐겠지.”
신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의 태세를 취했다. 강 현도 더는 신라에게 매달리지 않고 신후에게 대적할 준비를 했다.
푸른 안개의 기운과 검은 어둠의 기운,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자 주변 공기가 스산하게 요동쳤다. 맑았던 하늘에는 천둥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
“신라, 물러나 있어.”
망설이던 신라가 신후에게 작게 말했다.
“반지. 위험해지면 저 반지를 노려요.”
“…알겠어.”
신라를 향해 있던 강 현의 눈에 잠시 슬픔이 스쳐 가는 듯했다. 그는 먼저 발을 내디디며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푸른빛의 회오리가 나타나 신후의 몸을 단숨에 덮쳤다.
신후는 짧은 날숨을 토해내며 꽉 쥐었던 주먹을 탁 펼쳤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온 어둠이 그의 발아래를 시작으로 평야 지대를 뒤덮으며 무서운 기세로 뻗어나갔다.
신들마저 그들의 싸움에 주목하듯 먹구름 사이로 쪼개져 나온 달빛이 그들을 오롯이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