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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장. 전환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지막 한 숟갈까지 목 뒤로 넘기는 신라를 보고 강 현의 미소가 짙어졌다.
“잘했어요. 역시 노력하니까 되네.”
마치 상이라도 주듯이 강 현은 쟁반 위에서 단도를 거둬갔다. 신라의 눈에 경계심이 어린 것을 보고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달리 먹일 수 있는 방법을 못 찾겠어서. 극약처방을 내린 거예요. 이곳에는 수액 주사도 없으니까.”
“…쉬고 싶어요. 나가줘요.”
“화났어요?”
신라는 이마 근처로 다가오는 남자의 손을 다소 감정이 담긴 손길로 쳐냈다.
“제발요….”
“한신후한테도 그렇게 매정하게 굴었어요?”
한순간 강 현의 눈에서 감정이 메말라버렸다. 신라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매정하게 굴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무슨 일이든 내 의지를 존중해요.”
“의지… 의지라….”
강 현은 턱을 두드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본인이 어떤 것을 강요하고 있는지 떠올려보는 것이리라.
“당신의 운명을 당신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틀어버린 것과 내가 지금 하는 행동들, 뭐가 더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죠?”
신라는 묵묵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강 현에게 결여된 게 무엇인지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정은 질량이 아니에요. 1만큼 불행하다고 2만큼의 행복으로 덮을 수 없어요. 1만큼 불행하다고 2만큼의 불행이 이기는 것도 아니고요.”
“어째서죠?”
“수는 계산해서 사라질 수 있지만, 사람의 감정은 아니잖아요. 잊고 있을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아요.”
“잊혀지지 않는다….”
강 현은 신라의 말을 곱씹으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내 그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 말은 즉, 날 증오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주었던 온기도 아직 그 안에 있고, 한신후에게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에게 향하던 마음도 여전히 그 안에 남아 있다는 말이군요.”
“……”
“복잡하네… 난 당신을 데려오면 그 안에서 녀석을 송두리째 지워버릴 수 있을 줄 알았어.”
다리에 올려둔 손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리는 그의 모습에서 신라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상념에서 벗어난 강 현이 아직 가득 차 있는 음료수 잔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건, 마실 건가요, 마시지 않을 건가요?”
강요하지 않기 위해 선택권을 주는 것일까. 신라는 뜸을 들이다 원하는 바를 나타내기 위해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그럼….”
몸을 일으킨 그가 이번에는 신라의 양옆을 짚고 서서 아까 그 단도를 꺼내 침대에 올려두었다.
“키스할까요?”
뒤의 말은 잇지 않았지만, 필시 ‘아니면 검으로 찌를래요?’라는 말이 생략된 것이었다. 서로의 선을 넘지 않으면서 본인의 존재를 머릿속에 깊이 각인시킬 생각이다.
신라가 고민에 잠겨 있을 동안 강 현은 가까이에서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체념- 어쩌면 허락과도 같은 한숨이 내쉬어졌다.
강 현은 그것을 신호로 고개를 천천히 틀어 신라의 입술을 머금었다. 맞물리지 않는 곳이 없도록 적절한 각도를 찾다가, 머리를 감싸며 입술 새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담백하게 시작한 키스는 서로의 타액이 차오르며 점차 농밀하고 위험한 느낌으로 변해갔다.
그는 신라의 뒷머리를 받친 채 천천히 침대에 눕혔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위를 차지한 그가 깍지 끼운 손을 결박하듯이 내리눌렀다.
“하아….”
인간의 정신은 늘 흥미로웠지만, 육체마저 이렇게 탐이 나기는 처음이었다. 원껏 매만지고 함락하려면 이 밤이 다 가도 모자랄 것 같았다.
바르작거리며 손을 빼낸 신라가 옆으로 웅크리며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것을 보고 강 현의 눈에 가득하던 열기가 천천히 식었다.
“우욱….”
방금 억지로 먹인 죽이 결국 도로 올라와 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혀를 쯧 차며 며칠 새 더 가벼워진 몸을 번쩍 들고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그는 겨우 죽이라도 한 숟갈 입에 넣게 된 여인을 다시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만 자신을 탓했다.
“…싫어….”
다시 극도의 긴장과 불안에 사로잡히려고 하는 여인을 껴안은 강 현은 그녀의 흥분이 잠잠해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들어 안아 침대에 눕혔다.
“잠드는 게 좋아.”
한 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가린 강 현이 문가에 대기하고 있던 나태귀를 조용히 불렀다. 새로운 소녀의 몸을 차지한 나태귀는 손을 뻗어 신라에게서 불필요한 의지와 감정들을 사그라지게 만들었다.
잠시 후 신라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을 확인한 강 현은 침대에 놓인 단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챙기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 행동을 이상하게 쳐다본 나태귀가 그의 뒤를 졸졸 쫓았다.
* * *
한신후는 건강상의 이유라고 밝히고 한동안 휴직계를 냈다. 그가 담당하던 수업은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연구교수 자격이 있는 건우가 대신했다.
신라가 그렇게 사라지고 연구실의 분위기는 많이 우울해졌다. 그나마 우선이 병상에서 일어나 다시 출근하게 되어 다들 일상인 ‘것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혜령이 몇 번이나 신후를 찾아가 신라를 구하러 가자고 설득해봤지만, 신후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본인에게 그녀를 구할 자격조차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바쁘다, 바빠….”
본인 연구하랴, 강의 준비하랴, 바쁘다는 말이 입에 붙어버리고 만 건우는 오늘도 급하게 자료를 챙겨 연구실을 나서려 했다.
“건우우-!”
혜령이 참다못해 아이처럼 떼를 쓰며 그를 불러 세웠다.
“왜?”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신라를 구해올 생각이 다들 없는 거야?”
“누군들 없겠냐?”
“근데 왜 다른 일로 다들 바쁜 거냐고!”
“하아….”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거린 건우가 대답했다.
“바쁘지 않고선 열불이 터져서 못 살겠어서 그런다!”
“비형랑이야…. 신라를 데려간 게 다름 아닌 그 비형랑이라고! 걱정 안 돼?”
“걱정이 왜 안 돼! 그 자식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왜 걱정이 안 되겠냐고! 그런데 한신후가 저 모양이잖아!”
“……” 한 차례 언성이 높아지고 난 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안 그래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선은 조용히 연구실 밖으로 나갔고, 심각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던 건우도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향했다. 동주가 혜령에게 다가와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건우 선배도 요새 밤새도록 소환견을 풀어서 신라를 찾고 있어요. 우리도 누나와 같은 마음이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신라, 신라가 너무 걱정돼. 교수님도 저러니까 걱정이야. 다들 무너져버리고 있는 것 같아.”
“그런 거 아니에요. 신라는 금방 돌아올 거예요. 강한 아이니까.”
“응….”
혜령은 젖은 눈가를 훔치며 비어 있는 신라의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정신없이 수업을 마친 건우는 자료를 챙겨 들고 강의실을 나왔다. 안경을 벗어 셔츠에 꽂아 넣고 있는데, 그의 뒤로 웬 번쩍거리는 여인이 다가왔다. 불길함을 느낀 그가 천천히 뒤쪽을 돌아봤다.
“…당신!”
“안녕하세요. 수업 잘 들었어요.”
며칠 전 선을 봤던 상대인 나주연이었다.
‘도대체 강의실은 어떻게 알아낸 거야.’
그는 아연실색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져서, 그는 일단 그녀를 데리고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두 사람은 캠퍼스 내 카페테리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본의 아니게 애프터로 이어진 상황이었다. 나주연은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나 당신한테 관심 있어’라는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처리하기 힘든 일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아 건우의 다크 서클이 뺨까지 내려왔다.
“저런. 얼굴이 많이 안 좋네요.”
주연의 말에 건우가 억지로 미소 지었다.
‘네 탓도 있어, 이 여자야….’
“요새 주변에 사건 사고가 많아서요.”
“어머. 어떤 사고가?”
“말하자면 너무 길어서… 아무튼, 우리 이쯤에서 정리합시다. 나주연 씨가 아니더라도 제가 지금 연애를 할 여유가 조금도 없어요. 갑자기 상황이 그렇게 돼버려서, 미안하지만 그만 만났으면 좋겠어요.”
“상처받았어요….”
“전혀 안 받은 것 같지만 그런 걸로 합시다.”
주연은 쿡쿡 웃었다. 건우의 직설적인 화법이 마음에 든 것이다.
그들은 헤어지기 전 가볍게 악수했다.
“그 사건 사고들이 하루빨리 해결되길 바랄게요.”
“고맙습니다. 그쪽도 좋은 인연 만나요.”
건우가 먼저 카페를 빠져나갔다. 뒷모습마저 피곤해 보이는 그를 바라보며, 주연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이러면 병 주고 약 주는 꼴이 된 건가? 그런데 지금보다 더 바빠질 텐데 어떡해? 조건우 씨….”
그녀의 말끝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 *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창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모습은 암울 그 자체였다. 늘 단정하게 이마를 드러내고 있던 머리칼은 물을 먹은 것처럼 힘없이 축 늘어졌고, 턱에는 거뭇한 수염이 자리했다. 그의 한 손에는 이미 반쯤 사라진 독한 양주가 들려 있었다.
한신후는 삶의 이유를 잃었다.
왜 인생의 굴레를 짊어지기로 했었는가. 그를 실컷 이용하고 버린 신들을 저주하며, 그들이 불가능하다 한 것을 보란 듯이 성공해 보이고 싶었다.
마지막 생에 어렵사리 만난 것이 유신라다. 그녀는 마치 혜성처럼 자신에게 날아와 파란을 일으켰다. 찾지 못하고 죽는다 하더라도 딱히 아쉬움이 없을 것 같았던, 마지막-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느새 미친 사람처럼 찾고 있게 만들었다.
‘진짜 속죄는 너를 향해 했어야 했는데.’
그는 지난 생을 돌아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알고 보면 감정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 쳤던 지난 시간들이 지금의 불행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서막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까지 계산했나 보지?”
그가 소리 내어 물은 질문에는 빗소리만이 대답해주었다. 느리게 돌아선 그는 양주병을 탁자에 올려놓고 생기 없는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누군가가 집에 들어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타나’ 있었다.
신라가 보았다면 아마 기뻐서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꼴이 가관이군.
준호… 아니, 지국천왕이 본래의 성스러움을 뿜어내며 서 있었다.
신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피곤한 눈을 가렸다.
- 왜 신라를 구하러 가지 않지?
“본인이 바라지 않을 테니까.”
- 비형랑에게 고통받고 있으면 어떻게 할 건데?
“지금 그 애한테 가장 괴로운 건 다름 아닌 나라는 존재야. 내 과오가 그 애의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으니까. 당신은 알고 있었겠지?”
- ……
“그런데 왜 막지 않았어?”
이를 악물고도 제어되지 않는 분노에, 신후는 양주병을 내던져 깨뜨려버렸다.
“왜 그 애가 날 사랑하게 될 때까지 가만히 놔두었냐고-!”
지국천왕은 조용히 신후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벌을 받는 건 나 하나면 족하잖아…. 왜 나와 연관된 여인들은 다 그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지?”
- 모든 게 신의 뜻은 아니야. 가끔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 일들에서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
- 유신라는 강해. 강한 여인이라서, 함께 불행해지기보다 홀로 불행해지기를 택한 거야. 바보 같은 아이지.
“결과는 그렇지 않잖아.”
- 네가 전생에 은애했던 그 여인과 다시 이루어질 운명이라고 믿고 있어. 그래서 둘 사이에서 알아서 빠져주기로 한 거야. 자신의 인생 자체가 신들마저 버려버린 ‘나머지’일 뿐이라고 여긴 채 말이지.
신후는 굳은 얼굴로 신라가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 번지수가 틀렸어요, 교수님.
“아니야…. 틀렸던 적 없어. 처음부터 유신라였어.”
지국천왕이 말했다.
- 그걸 본인에게 알려줘야지.
“아직은 증명할 방법이 없어.”
- 때를 놓치고 후회하지 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지국천왕의 모습이 점차 흐릿해지다가 사라졌다.
신후는 눈가를 슬프게 일그러뜨렸다. 혼자 모든 불행을 끌어안고 떠나버린 여인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적어도 그 오해를 풀어야만 했다. 이렇게 자책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그녀의 불행은 스스로를 끝없이 잡아먹고 있을 테니까.
‘차라리 내 앞에 와서 나를 헐뜯고 원망해. 네가 원한다면 이 사지조차 기꺼이 잘라내 내어놓을 수 있으니까.’
며칠간 흐리멍덩하게 우울함만을 담고 있던 그의 눈에, 날카로운 의지가 나타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