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장. 감금
신라는 조용히 눈을 떴다. 밝은 아침 햇살이 따사롭게 침대맡을 비추고 있었다.
적의 소굴에서 맞는 아침은 의외로 별다를 게 없었다.
“일어났네요.”
문턱에 기대 서 있던 강 현이 햇살과 닮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신라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무감정한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뭔가 필요해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화장실도 말하고 가야 하나요?”
“아.”
실례했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 올리는 그를 싸늘하게 지나친 신라는 방 안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차가워졌네.”
어깨를 으쓱하며 혼잣말을 한 강 현은, 하인들을 시켜 신라의 방에 먹을거리들을 들여놓았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신라는 넓은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들을 보고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예요?”
“신라 씨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다 준비하라고 시켰어요.”
“……”
“감동한 거 아니까 어서 앉아요.”
강 현은 신라를 억지로 식탁 의자에 앉히고 본인도 맞은편에 앉았다. 우아하게 고기를 썰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라는 가장 근처에 있는 빵부터 집어 입에 넣었다.
“욱-”
하지만 몇 입 씹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신라 씨…?”
강 현이 걱정스레 그녀를 불렀다. 불면증에 신경쇠약증까지, 이미 정신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으니 거식증까지 찾아왔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신라는 내색하지 않았다.
“빵이 속에 안 받나 봐요. 다른 걸 먹어봐야겠어요.”
“……”
그녀는 이번에는 숟가락을 들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미역국을 떠 마셨다. 하지만 빵을 먹을 때와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우욱….”
“……”
“이것도 아닌가….”
식탁에서 헤매는 손이 다급해졌다. 다음으로 선택한 것은 구운 닭고기였다. 하지만 강 현의 손이 그것을 빼앗아 다시 내려놓았다. 어느새 신라의 곁으로 다가온 그가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요?”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는데 식사를 어떻게 하겠어요. 이제 그만 해요.”
“먹으면 되죠. 억지로 먹는데 안 내려가고 배기겠어요? 욱여넣을 거예요. 토해도 또 집어넣고, 또 집어넣고…. 그래야 살아지는 거잖아요. 아닌가요?”
“……”
“이거 놔요.”
신라는 손목을 붙잡고 있는 강 현의 손을 떨쳐낸 다음 아까 먹던 빵을 입에 욱여넣었다. 구역질이 계속 났지만, 끝끝내 욱여넣고 씹지도 않은 상태로 삼켜버렸다. 닭고기를 허겁지겁 뜯어 먹고, 또 구역질이 나기 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윽….”
입을 틀어막은 채 버티던 그녀는 결국 그 자리에서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콜록, 콜록!”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쉰 강 현은 바깥에 신호해 그녀의 토사물을 치우게 시켰다. 식사도 당장에 물리라고 했다. 생리적인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신라는 벌떡 몸을 일으켜 식탁을 치우는 이들을 밀쳐냈다.
“하지 마…. 먹을 수 있어. 먹을 수 있다고!”
“신라 씨!”
강 현은 발작적으로 행동하는 신라의 몸을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쉬이… 진정해요.”
“놔요…!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알겠어요. 아무것도 억지로 시키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괴롭지 않아… 살 수 있어! 이대로도… 괜찮다고….”
이제는 감정에 북받친 눈물이 그녀의 뺨을 적시고 있었다. 강 현은 그녀를 돌려세워 정면에서 더욱 꽉 끌어안아 주었다.
“그래… 괜찮게 만들어 줄게. 다 잊게 해줄게.”
“흑….”
“나 의사잖아. 이제 당신 주치의로 살게. 나한테 기대. 그러면 돼.”
“살고 싶어… 나도….”
“살게 해줄게.”
빠르게 뛰던 신라의 심장이 강 현의 품에서 점차 정상적인 고동을 찾았다. 신라는 두 눈을 꾹 감은 채 그의 셔츠 밑단을 구겨질 때까지 그러쥐고 있었다.
그가 용서하지 못할 적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자기 자신이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아예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강 현은 그 마음을 이해했다. 그녀가 왜 이토록 바들바들 떨고 있는지,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있는지. 그의 운명 또한 굴레에서 벗어나 있음을 최근에 알게 됐다. 더 이상의 정상적인 환생은 힘들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금지된 술법이 있었다. 한 몸이 늙어 죽으면, 다른 몸으로 옮겨가면 되었다.
“우리는 같은 처지야. 왜 당신에게 처음부터 끌렸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그건 동질감이었던 거야. 세상에 우리 둘뿐인.”
“입에 발린 소리… 듣기 싫어….”
“훗, 미안.”
강 현은 순순히 사과하며 신라의 머리를 더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을 문틈으로 엿본 나주연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저건 드라마에서나 보던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이잖아?’
신라를 자상하게 바라보던 강 현의 눈빛이 한순간 살기를 담아 주연에게로 쏘아졌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으며 재빨리 문가에서 모습을 감췄다.
‘죽을 뻔했어…. 저 여자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되겠군.’
그녀는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강 현의 이번 거처지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동해의 어느 해변가임은 확실했다. 해가 뜨는 방향도 그렇고, 지형도 가파른 절벽이 많았다.
강 현은 신라를 데리고 자주 산책을 나갔다. 자연 속에서 햇빛을 쐬며 편안한 기분을 유지해야 신경쇠약증이 어느 정도 치유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그런 강 현의 뜻을 파악했는지 불필요한 거부권은 행사하지 않았다.
“손… 잡을래요?”
“……”
모래사장을 거닐던 강 현이 돌아서서 신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무런 강요의 느낌도 없어 보이는 그 손을 딱히 피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아서, 신라는 그 손을 붙잡았다. 그녀가 그렇게 얌전히 따르는 것을 보고 강 현의 입가에 환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바람 참 좋죠? 더 쌀쌀해지기 전에 산책하면 좋을 것 같아서.”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정리하며 신라는 바다 저편을 바라봤다. 쾌청한 날씨 속에 탁 트인 풍경을 보고 있자니 며칠간 물에 잠긴 듯이 더디게 돌아가던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강 현과 붙잡은 손에서 뭔가가 걸리적거리는 걸 느낀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의 중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 때문이었다.
“아아, 이 반지요.”
“이제 늘 끼고 있는 건가요?”
“더는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그곳에 당신의 귀혼이 있는 거죠?”
“맞아요. 또 재미있는 사실이 있어요.”
그는 신라와 손을 바꿔 잡은 다음 반지 낀 손을 눈앞에 들어 보였다.
“여기 보석 보이죠?”
“네.”
“그건 당신이 인간이라서 보이는 거예요. 아마 자라경을 비췄을 때 본모습이 인간이 아닌 자들은 볼 수 없는 걸 테죠. 그래서 굳이 혼을 두 개로 쪼갠 거예요. 인간으로 살아야, 내 귀혼을 감춘 보석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을 테니까.”
처음 듣는 얘기에 신라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주는 거예요? 그럼 그 보석이 당신 약점 아닌가요?”
강 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을 뿐이었다.
“글쎄요. 내가 왜 이런 중요한 사실을 당신에게 말하고 있을까.”
“……”
“만약에 나에게도 끝이라는 게 오면, 그때 날 죽이는 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기를 바라서?”
무겁게 내려앉는 신라의 감정을 눈치채고 강 현이 모래사장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는 살짝 숙여져 있는 신라의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날 후회하게 만들어준다면서요. 그렇게 풀이 죽어버리면 내가 기대하게 되는데.”
“죽이고 죽는 게… 당신한테는 그렇게 쉬워요?”
“…쉽진 않죠.”
“아무리 원수라도 세상을 떠나면 마음에 아픈 여운이 남는 거예요. 그게 사람의 감정이에요.”
“그래요.”
담담히 수긍하는 강 현을 보고 신라는 어깨에 올라와 있는 그의 양손을 세게 밀쳐냈다. 그리고 원망이 깃든 눈으로 쳐다봤다.
“당신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그거야. 사람의 마음을 어느 요괴보다도 더 잘 이해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밑바닥으로 떨어뜨릴지 궁리하잖아.”
“왜 무섭다고 생각하죠? 난 그들이 숨김없이 스스로의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을 좋아할 뿐이에요.”
“그게 그 사람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하더라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조차, 인간이기에 가치가 있어요.”
강 현은 바다 저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신라의 손을 쥐었다.
“걱정 말아요. 당신만큼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해줄 테니까.”
“……”
“그리고 나도 안 죽어요.”
나지막하지만 힘이 담긴 목소리에는 확신마저 들어 있었다. 그 말은 마냥 좋게 들을 수만은 없었다. 그가 죽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죽을 테니까.
그날 밤은 폭우가 내렸다. 침대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천둥번개가 치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어 둠
두 글자를 떠올리면 늘 덩달아 눈앞에 그려지게 된 남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하필 못 견디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라서, 계속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내가 떠나가려 해서, 그렇게 괴로워한 걸까?’
어째서-?
이제는 그의 맹목적인 갈구에 의문부터 떠오르고 말았다. 어차피 이생은 그가 찾던 여인의 운명을 안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나머지’로 튀어나온 보잘것없는 것인데. 그에게 끝까지 숨기고 싶어서 말하지 않았지만, 진실경이 있는 한 언제 알아내 올지 몰랐다.
그래… 이건 마지막 자존심이다.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당신을 버리는 거야. 그럴 뿐이야….’
똑 똑.
그녀가 있는 방의 문이 두드려졌다. 천둥소리가 크게 울리고,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면서 넉넉한 셔츠에 배기팬츠를 입은 강 현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그릇과 컵이 올려진 쟁반이 들려 있었다.
“날씨가 갑자기 이래서, 또 어두운 생각을 하고 있을까 봐 왔어요.”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하는 듯하면서도, 진짜 속내는 숨기고 있을 것 같은 위험한 남자. 잔혹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따뜻한 일면도 가지고 있어 더욱 위험한 남자.
신라는 사실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를 계속 파고들다 보면 헤집을 수 있는 상처나 약점이 보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좋네.”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뭐가요.”
“지금 당신 눈빛이, 나에 대해 고민하는 눈빛이었거든. 당신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꽤 좋았어.”
“……”
“어둑시니는 늘 이런 기분이었겠지.”
신후의 얘기가 나오자 신라의 눈빛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 반응에 강 현의 입꼬리가 작게나마 더 당겨졌다.
“먹어요. 남은 재료로 직접 죽을 만들어봤어요. 역하면 마시라고 탄산음료도 챙겨왔어요.”
“환자가 된 기분이네.”
“좀 다르죠. 환자한테 내가 직접 죽을 끓여준 적은 없었거든.”
“……”
신라는 쟁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그릇과 숟가락을 들고 죽을 한 입 떠먹어보았다. 간도 적당하고 향도 고소해서 맛있는 죽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맛이 확 동하지는 않았다. 이건 몸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표정 없는 얼굴로 신라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강 현이, 허리 뒤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쟁반 위에 올려놨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단도였다.
“이걸 왜 꺼내는 거예요?”
신라가 손을 멈춘 채로 물었다. 강 현은 마치 포크라도 올려놓은 듯이 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번에도 당신이 그 죽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하면, 그 칼로 날 찌르라고 하려고요.”
소꿉장난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 서슬 퍼런 칼날을 지닌 단도였다.
바로 얼마 전이다. 우선이 검에 찔려서 대수술을 받고 겨우 깨어났던 것이.
얼굴빛이 새파래지는 신라를 보고 강 현은 손을 뻗어 칼날을 덮었다.
“겁먹을 거 없어요. 찔리는 건 나고, 그 죽을 다 비우면 그럴 일도 없을 테니까.”
뭐든 억지로 시키지 않겠다고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검으로 협박을 하다니. 신라는 굳은 얼굴로 죽 그릇을 내려다봤다.
“천천히 해도 돼요.”
신라의 모습을 오롯이 담은 강 현의 눈에 즐거움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