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장. 어긋나다
단풍으로 물든 뒤뜰이 잘 내려다보이는 1인 특실에는, 한 여인이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만 2년이 좀 넘었다고 했다. 부잣집에서 태어났기에 이만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족들은 이미 그녀를 마음에서 떠나보낸 뒤였다.
신후는 핏기없는 그 여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참 많은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됐지만, 이런 모습으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다 내 탓이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여인의 손을 붙잡았다. 전생의 그녀가 은애하던 사내를 죽게 만들었다. 그자는 미명귀가 되었고, 복수하기 위해 중간에서 서찰의 내용을 조작해 여인의 후생에 대한 설계를 어긋나게 만들었다. 그 결과가 이러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랐지만, 식물인간이 되어 젊음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단 한 번 저지른 과오에 대한 대가가 너무도 크군….’
그는 이를 꾹 깨문 채 힘겹게 여인을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돌아서 떠나려 했다. 그런데 똑같이 생긴 여인이 어느새 병실에 들어와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본인이 맞았다.
- 낯선 남자가 내 몸을 병문안 왔는데, 되게 미남이라길래 슬쩍 와봤어요.
신후는 잠시 굳어 서 있었다. 오늘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것일 뿐, 영혼을 마주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 게다가 영혼을 볼 줄 아네요. 누구…세요?
“왜… 몸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 돌아갈 필요를 못 느꼈거든요.
“삶이 불행…”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멈춘 신후는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물었다.
“삶이 불행했던 겁니까?”
- 그래 보여요?
여인이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가 뒤뜰을 내려다봤다.
-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어요. 부잣집에 태어났고, 머리도 좋았고, 외모도…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편?
신후는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 하지만 늘 뭔가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었죠. 이유는 몰라요. 어떤 남자를 만나도 마음이 채워지지를 않았어요. 성향이 그런가 싶어서 여자도 만나봤죠. 소용없더라고요.
“……”
- 의사는 내 어딘가가 결여돼 있다고 했어요. 감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랑 같은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 자체를 수용하지 못하는 몸이라고 했던가… 웃기죠.
신후는 착잡한 감정으로 버무려지는 심장 언저리를 움켜쥐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괴로워하고 있는 그를 돌아본 여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 왜 그런 얼굴이에요? 이상하네요. 날 알아요?
“예전에… 알았었지.”
- 예전이라면?
“아주 오래전에.”
- 흐음….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동자를 굴리던 여인이, 어느 순간 놀란 얼굴로 눈가를 매만졌다.
- 어라…?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당황해서 눈가를 훔쳤다.
- 이상하다. 사고가 나기 전에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
- 당신이 괴로워하는데, 왜 내가 덩달아 이렇게 괴롭지? 이상하다….
신후는 돌아서서 병실을 나가려 했다. 눈물을 훔치던 여인이 물었다.
- 혹시 당신인가요? 내 꿈에 나와서, 날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은 사람이.
“…아마도.”
- 왜 그냥 가요? 바라는 게 있었던 거 아닌가요?
“지금은… 찾은 걸로 만족하려고. 이 이상 내 욕심을 부리면 당신에게 더 큰 죄를 짓는 것 같으니까.”
여인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신후를 눈에 담았다. 낯선 남자는 병실을 떠났지만, 왠지 모르게 아릿하게 남은 감정이 그녀로 하여금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 * *
한신후 교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사학과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었다. 가족 중에 누군가 죽었다, 애인이 있었는데 차였다, 학교에서 퇴출되게 됐다… 그에 대한 수많은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그 원인은 수업 중 내비치는 그의 달라진 면모 때문이었다. 언제나 실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무리하던 완벽주의자가 수업 자료를 빠뜨린다든지, 설명했던 내용을 또 슬라이드에 넣는다든지…. 아마 다른 교수가 그랬다면 그렇겠거니- 하고 넘겼겠지만, 한신후가 그러니까 학생들은 충격 아닌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 왜 그러셔? 뭐 아는 거 없어?”
서영의 물음에도 신라는 조용히 고개만 내저었다. 사실 신라의 상태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입맛도 사라지고, 몸에 힘이 없으니 모든 의욕이 사라져버렸다.
‘잘 된 거야. 잘된 일….’
마치 주문처럼 외우게 된 말이었다.
한신후가 행복해지면 된다.
한신후가 잃었던 감정을 잃고 진정한 인간으로 살게 되면 된다.
그걸로 되었다….
하지만 왜 늘 마지막에는 짙은 배신감이 솟구쳐 올라오는지 알 수 없었다.
빠앙 -
넋을 놓고 한참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낯선 풍경을 보니 그랬다. 인도 쪽에 바짝 대어진 익숙한 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정신을 놓고 다니는 거야?”
한신후가 질책하며 운전석에서 걸어 나왔다. 신라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여기 있는지.”
“무슨 소리야. 그 귀걸이가 익숙해진 건 좋지만 왜 차고 있는지는 잊어버리지 마.”
“…아, 귀걸이….”
신라는 귀걸이를 찬찬히 매만졌다.
- 그런 건 빼버려….
- 그 남자는 이미 너에게 마음이 없어.
- 이미 식물인간인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한신후가 지척에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잡귀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그 또한 정신이 없는 것일 거다.
신후가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타. 집에 가자.”
“아뇨…. 약속이 있어서 가는 중이었…” “유신라!”
결국 신후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차 문에 몸을 기댔다.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넌 그날 이후로 한 발자국도 다가오려고 하질 않아. 내가 뭘 더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태용이 다녀간 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갑자기 날 피하기 시작한 거냐고. 아직도 말할 기분이 안 드는 거야?”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신라가 대답했다.
“네. 아마,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이 몰랐으면 해서요. 당신도 모르는 것 같은 그 진실을, 나만 알고 나만 끌어안고 가려고 했어요.”
“도대체 그 진실이 뭔데! 혹시 진실경을 본 건가? 태용이 준 거야?”
“네…. 그 파편을 선물해줬어요.”
겨우 실마리를 붙잡은 신후가 답답함이 조금 풀린 모습으로 신라에게 다가왔다.
“그래, 거기서 뭘 봤어?”
눈가를 가린 신라가 힘겹게 내뱉었다.
“말… 안 할 거라니까요?”
“제발 이러지 마…. 네가 그러면 난 세상에서 가장 나약해져 버려. 널 지킬 수 없게 된다고.”
“아니요. 안 그럴 거예요.”
“제발 나 좀 봐.”
“싫…!”
신후는 신라의 고개를 억지로 쥐어 들었다.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있는 여인의 얼굴을 보고 그는 이를 악물었다.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
“번지수가 틀렸어요, 교수님.”
“뭐?”
신라가 눈물 젖은 얼굴로 슬프게 웃었다.
“그 여자… 찾았잖아요.”
“……”
“당신이 그 오랜 세월을 찾아 헤맸던 여인이요. 그래서 고민 중인 거잖아요. 당신답지 않게 정신을 빼놓고 다닐 만큼.”
잠시 할 말을 잃은 신후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것이 아니라고,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제대로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네가 날 피하기 시작한 건 그보다 전의 일이야. 진실경이 보여준, 나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도대체 뭐야.”
“안 말할래요.”
“유신라!”
“이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에요. 난 당신이 누구보다 행복해지길 바라요.”
‘그게 날 불행으로 떨어뜨린다 하더라도.’
신라는 눈물을 훔치고 돌아서 미련 없이 걸었다. 진실경에서 보았던 아픈 진실이 계속해서 그녀의 심장을 할퀴었다. 눈물이 났지만, 한신후의 행복한 결말을 생각하면 웃음도 났다. 그녀는 이미 익숙해져 버리고 만 귀걸이를 빼내 바닥에 미련 없이 떨어뜨렸다.
“유신…!”
콰직 -
갑작스런 통증이 심장을 덮쳤다. 신후는 가슴팍을 그러쥐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완 전 한 끝
없는 감정을 쥐어 짜낼 때의 고통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 대상이 영영 떠나가 버림에, 심장이 격노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신… 라….”
털썩, 그가 무릎을 꿇으며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 신라가 걸음을 멈췄다.
“교수님…?”
“허억….”
그녀는 당장에 그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그런데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가 있었다. 단단한 몸에 부딪혀 멈춰선 신라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부릅떴다.
“…당신….”
“많이 울었네요, 신라 씨.”
딱- 강 현이 손가락을 튕기자,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정신을 잃은 신라가 그의 품으로 축 늘어졌다.
“비… 형…! 허억….”
신후는 눈에 살기를 가득 담았으나 쓰러진 몸을 끝내 일으키지 못했다. 신라를 양팔에 들쳐 안은 강 현이 신후를 향해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유신라가 진실경에서 본 게 뭔지 알고 싶어?”
강 현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신후의 앞에 떨어뜨렸다. 그것은 신라의 방에서 가져온 듯한 진실경의 파편이었다.
“덕분에 내가 환생한 이 몸뚱이에도 왜 운명의 굴레가 없는지 잘 알게 됐지. 결국 모든 건 네가 초래한 결과라는 뜻이야. 이 착한 여인은 네 행복을 바랄지언정 용서까지는 힘들었던 모양이군.”
“크윽….”
“천천히 잘 감상해보도록 해. 속죄 속죄 운운하더니, 정작 책임져야 될 과거는 하나도 몰랐더군.”
강 현은 신라를 안은 채로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숨을 헐떡이던 신후는 가까스로 손을 뻗어 강 현이 던지고 간 진실경의 파편을 그러쥐었다.
“저 여인이… 봤던 걸… 똑같이 보여줘….”
- 나는… 내가 왜 귀력의 화수분으로 태어나게 됐는지, 왜 운명의 굴레가 끊겨버렸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보여줄 수 있겠니?
그 대답으로 진실경이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전생의 그, 어둑시니의 모습이었다. 신후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처럼 사색이 되었다.
병든 여인에게 받은 사랑을 되갚기 위해, 어리석은 인간들의 수명을 빼앗아 그녀의 생을 조금이나마 늘렸다. 덕분에 여인은 이듬해 봄, 아름답게 꽃피운 산의 풍경까지 보고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문제는 거기에서 시작됐다.
- 여기에 이유 없이 늘어난 생이 있군.
그것은 운명을 관장하는 신들의 대화였다.
- 너무 뒤늦게 발견해서 어디에도 끼워 맞출 수가 없겠어.
- 사천왕들이 주시하고 있는 영혼이니, ‘나머지’를 만들어서라도 끼워 맞추어야지.
- 긴 것과 짧은 것, 두 개의 매듭을 풀 수밖에 없겠군.
그들은 수많은 운명의 실 중 두 개의 매듭을 풀어내고 그들을 원래부터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중 짧은 운명의 실은 신라의 것이었다.
“하….”
신후는 허탈한 웃음을 토해내며 바닥에 머리를 댔다.
“네 삶도… 내가 그렇게 만든 거였구나.”
그는 이제야 신라가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겠다고 한 이유를 알게 됐다. 그녀는 그 배신감 속에서도, 신후가 겪게 될 이 끝도 없는 죄책감을 걱정한 것이다.
- 오늘따라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 네 생일이잖아.
- 제 생일인데 왜 교수님이 기분 좋으세요?
- 네가 이날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만난 거나 다름없으니까. 특별한 날이지.
‘난 네가 저주하던 네 슬픔을 특별하다며 치켜세웠어.’
- 기분이 이상해서요. 여태까지는 내가 이런 날에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졌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시고, 귀신이 들러붙고…. 외롭게 혼자 살아가게 되고.
‘그런데 심지어 네 불행의 시작은 다름 아닌 나였던 거야.’
신후는 참담한 심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실성한 듯한 그의 웃음은, 곧 구슬픈 울음으로 바뀌었다.
애(愛)-사랑의 감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 말이 맞았네…. 도저히 안 돼…. 도저히….’
신후는 신을 저주하며, 점차 아득해지는 정신을 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