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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장. 균열 (70/126)

69장. 균열

“민우선 그 녀석 일이라면 무조건 나부터 부르라고 했잖아!”

장 형사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핸드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후배 형사에게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사건 현장으로 직접 운전해서 가는 중이었다.

「이미 스토커도 잡혔는데 오셔서 뭐 하시게요!」

“니들이 모르는 그런 게 있다니까! 더 수상한 점이 있는지 내가 봐야 한다고!”

「비번이시면서 참 열성적이기도 하십니다.」

“그 녀석은 지금 어디 있어?”

「공원 서쪽 차도 쪽으로 달려가는 것까지 봤습니다.」

“그것 봐. 니들이 모르는 뭔가가 남았을 거라니까! 알겠어, 끊어!”

장 형사는 신이 난 얼굴로 차의 악셀을 마구 밟았다. 공원에 금방 도착한 그는 차를 내버리다시피 뛰쳐나와 후배 형사가 말한 쪽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공원을 빠져나가자마자 보이는 차도 쪽에 세 명의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 절름발이로 보이는 대머리 남자는 낄낄거리며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다.

“뭐야, 저 미친놈은.”

장 형사는 콧방귀를 뀌고는 익숙한 두 사람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어-이, 귀신 잡는 녀석들! 오늘은 또 무슨 귀신을 쫓으러…”

장난기 가득하던 장 형사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 그는 어두워서 잘못 보이나 싶어 두 눈을 거칠게 비볐다.

“뭐야, 너희…. 지금….”

주변을 지나던 행인들이 노란 중앙선을 적셔나가는 붉은 피를 보고 비명을 내질렀다. 주위의 반응을 보고서야 장 형사는 현실감이 들어 당장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쿨럭….”

우선은 핏기 잃은 입술에서 기어코 검붉은 피를 토해내고 말았다. 동주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것처럼 벌벌 떨리는 손을 검 자루에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우… 우선… 우선… 아….”

우선은 배를 뚫고 지나간 검을 손으로 움켜쥐고 금방이라도 접히려고 하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줬다. 장 형사가 이 광경을 목격했으니, 쓰러지는 순간부터 일이 더 복잡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너… 네가 왜….”

동주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들에게 다다른 장 형사가 사색이 되어 우선의 상태를 살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을 보니 분명 진짜 찔린 것이었다.

“이, 이봐, 너. 당장에 그 손부터 놔.”

“아, 안 돼요…. 이걸 놓으면 상처가 더 벌어진단 말이에요….”

“이게 도대체…! 네가 찌른 거야!?”

우선은 동주를 대신해 고개를 내저었다.

“아저씨… 내가 우리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그랬죠…. 어서 가세요.”

“이 상황을 보고 형사가 어딜 가!”

“제발….”

우선의 몸이 무너져 내리려 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그를 부축했다.

그때 도로 저편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는 승합차가 있었다. 그곳에서 일반인은 볼 수 없는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슈 아 악 - !

“으억!”

칠 것처럼 가까이 지나가는 차에 놀란 장 형사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런데 눈앞에 있던 두 사람이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어…?”

바닥에 흥건했던 피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뭐… 뭐야….”

꿈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도에서 이쪽을 지켜보던 몇몇 사람들은 영화 촬영이라도 하나보다, 쑥덕거리며 자리에서 떠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장 형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머리칼을 쥐었다.

‘분명히 진짜였는데…!’

문득 손에서 축축한 기운이 느껴진 그는 손바닥을 펼쳐봤다. 적지 않은 양의 피가 묻어 있었다. 방금 전 우선을 부축하다가 묻은 피 같았다.

“역시, 그 녀석….”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린 장 형사는 승합차가 사라진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우선이 잠깐이나마 의식을 찾은 건 이틀 뒤인 이른 새벽녘이었다. 대수술을 감행한 환자치고 너무도 빨리 의식을 되찾아, 진료를 보던 의사진들은 해외토픽감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사실 일반인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였다.

동주는 연구실 사람들 중 유일하게 밤낮으로 우선의 곁을 지켰다. 죄인처럼 앉지도 않고 우두커니 선 채로 병실을 지키는 동주를 보고 신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가장 괴로울 사람이 그일 테니 말이다.

그날 밤 그들을 그 장소에서 태우고 온 것은 신후였다.

- 이번에도 차동주를 못 막을지도 몰라요! 교수님, 빨리 와주세요!

우선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되도록 빨리 다다르려고 노력했지만, 이것이 최선의 결과였다.

덕분에 신후는 꽤 오랜만에 신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병실에 찾아온 그녀는 그에게 작은 목례만 하고 지나쳐 우선의 상태부터 살폈다.

산소호흡기를 떼어낸 우선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에 더 핏기가 없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선배, 이제 제가 지킬 테니까 조금만 쉬다 와요.”

“…아니. 괜찮아.”

마치 본인이 칼에 찔린 것처럼 동주의 목소리는 다 쉬어 있었다.

“선배….”

“내 걱정은 하지 마. 제발 하지 말아줘. 나 같은 건….”

“……”

신후는 신라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그리고 함께 병실을 나갔다.

그는 복도에 기대서서 동주의 과거에 대해 짧게 얘기해주었다. 성인이 되기 전, 그는 잠시 소년원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우선과 함께 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이었다.

그의 분노를 유발했던 건 같은 반 학생이었다. 반에서 약한 학생들만 골라 괴롭히던 질 나쁜 녀석은 결국 한 아이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그때 난생처음 감당 못 할 분노에 휩싸인 동주는 등교하자마자 눈에 보인 가해 학생의 멱살을 쥐어 내동댕이치고 피 칠갑이 될 때까지 후려쳤다. 온몸으로 막아낸 우선의 몸에도 온통 피멍이 들 정도였다.

결국 동주에게 맞은 그 학생은 중태에 빠졌고, 동주는 소년원에 수감됐었다.

“이번에도 비슷하네요….”

신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 모든 일이 그들의 전생에서 비롯됐음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말했잖아. 속죄의 삶이 순탄할 리가 없다고.”

신후의 말을 듣고 신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신후가 그녀의 표정을 보기 위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걷어냈다.

탁-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을 쳐낸 신라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 죄송해요.”

“……”

신후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신라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피곤…한가 봐요. 요새 잠을 통 못 자거든요.”

“…알아.”

“……”

잠에 제대로 들지 못하는 걸 안다는 건, 그녀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신후도 깨어 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신라는 끝내 신후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네 입으로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어. 서두르지 않아도 좋아.”

“……”

“그저, 내가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지만 않으면 돼.”

그때, 무거운 분위기를 비집고 들어오는 발걸음이 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쪽을 돌아봤다.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이는 다름 아닌 장 형사였다.

“역시 진짜였군.”

장 형사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신라가 나서서 일단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병문안을 오신 거면 들어가도 좋고, 뭔가를 조사하러 오신 거면 돌아가 주세요.”

“조사해봤자 아무것도 안 나올 텐데, 이 이상 더 미친놈 취급을 당하라고?”

“……”

“어디야?”

장 형사는 신라가 가리키는 병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아직 침대맡에 서 있던 동주가 천천히 그를 돌아봤다.

“…왜 오셨어요.”

“가해자가 더 죽어가네.”

가해자라는 말에 동주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내가 봤던 게 환각인지 아닌지 확인하러 온 것뿐이야.”

“그래서, 진짜인 걸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 하려고요?”

“그야….”

“나만 붙잡아 가면 돼요. 우선이는 피해자일 뿐이니까. 내가 바로 이 녀석을 찔…”

“스읍!”

잇새로 숨을 들이켠 장 형사가 동주를 향해 검지를 들어 보였다.

“책임지지 못 할 말이면 내 앞에서 안 하는 게 좋아. 그게 저 녀석이 쓰러지기 직전까지 바라던 거 아니었나?”

“……”

“그렇게 어려서, 원. 그러니까 이 녀석이 잠들어서도 이렇게 표정에 근심 걱정이 가득하지.”

그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숙이는 동주를 보고, 괜시리 민망한 기분이 든 장 형사는 짐짓 큰기침을 토해냈다.

“난 간다! 또 정신없이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기 전에 눈 좀 붙이든지!”

장 형사가 나가고, 조용해진 병실에서 동주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살다 살다 저 형사에게 잔소리를 듣는 날이 올 줄 몰랐던 것이다.

버석하게 말라 있던 우선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그 목소리에 눈을 부릅뜬 동주가 곧바로 우선에게 달려갔다.

“저, 정신이 들어? 안 아파? 의사 부를까?”

“네가 찔렀다고 자수하려고 할 때, 열이 받아서 깼다….”

“우… 우선아… 난….”

동주는 울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감쌌다. 다시금 눈도 제대로 마주칠 수 없을 만큼의 죄책감이 그를 휩싸고 있었다.

“난 어쩔 수 없는 놈인가 봐. 그때도 널 피멍이 들 정도로 때렸잖아…. 네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분노도 조절 못 하고.”

“그런데 힘은 더럽게 세지….”

“친구를 칼로 찌르기나 하고, 맨날 사고만 치고….”

“수습은 내가 하고….”

“난 친구 자격도 없어…. 미안해… 미안하다….”

우선은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기분이 홀가분한 건, 동주가 범죄자가 되는 걸 막아냈다는 안도감 때문이리라.

“내가 지금 힘이 많이 없으니까, 대신 때려줄래?”

“누, 누구! 누구를!”

“너.”

반농담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 있는 힘껏 본인의 콧등을 주먹으로 내려치는 동주를 보고 우선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얼마나 세게 때렸으면 소리를 듣고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 들어왔을 정도였다.

“더, 더 때릴까?”

쌍코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다시 주먹을 움켜쥐는 동주를 보고 우선이 수술 자국을 움켜쥐며 다급히 외쳤다.

“이 미친놈 좀 제발 말려봐요…!”

마침 병실에 도착한 건우와 혜령에게 양팔이 붙들린 동주가 억울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네가 때리라며…!”

“장난이지, 이 멍청아….”

이걸 화해했다고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넋을 놓고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추병귀의 행방은.”

신후의 물음에 건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일단은 소환견들을 풀어놨어요. 요기(妖氣)를 잃은 놈이라 잘 찾아질지는 모르겠지만.”

“비형랑이 놈을 죽이지 않는 이유가 있군. 번번이 이렇게 당하니까 말이야.”

“우리의 약점을 너무 많이 파악하고 있는 거죠.”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화비가 인간의 모습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신후에게 할 말이 있다며 불러냈다. 신라를 한 번 돌아본 신후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일단 화비를 따라 나갔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니? 나한테 시킨 일 기억 못 해?”

“…뭔가 찾아낸 건가?”

그 말에 화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콧구멍 평수가 넓어진 뿌듯한 표정을 내지었다.

“당신이 후보로 꼽은 몇몇 병원들을 밤낮없이 순방한 결과, 그 노리개에 반응하는 영혼 하나를 찾아냈어.”

“정말이야?”

심각하게 묻는 신후를 보고 화비는 조금 기가 죽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지….”

“지금 어디에 있지?”

문을 열고 나오려던 신라는 잠시 멈춰 서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영혼은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라 붙잡아둘 수가 없는데, 몸이 있는 곳은 확실히 찾아냈어. 당신 예상대로 식물인간 상태더라고.”

“그래…. 찾았구나.”

안도의 숨을 내쉬며 편안한 표정을 짓는 신후를 보고, 신라는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 여인을 찾은 거구나.’

어둑시니에게 처음 사랑의 감정을 가르쳐준 여인. 그가 속죄의 생을 거듭하며 다시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여인. 그녀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잘 됐다….’

신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감정이 누구를 향하게 되든, 한신후의 비어 있는 심장이 채워지기를 누구보다도 바랐었으니까.

‘그래, 잘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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