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장. 스토커
시험이 시작되는 주였다. 그래서 연구실 사람들은 신라가 갑자기 얼굴을 비추지 않는 것에 그리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신후만이 평소와 다른 그녀의 행동을 눈치챘다. 필요 이상으로 일찍 등교하고, 밤에는 서영과 함께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거나 그녀의 집에서 잔다고 하는 통에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수업 시간에도 되도록 강의 내용에만 집중하고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처음에는 고백의 여운으로 쑥스러워서 그런가 생각했지만, 그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불안하군….’
슬슬 적이 다시 활동할 시기가 되어 신후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서영은 며칠 전부터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 학교에서나 신라와 함께 있을 때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혼자 길을 걸을 때면 어김없이 기분 나쁜 시선이 느껴졌다. 요사이 신라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여서 아직 얘기는 꺼내지 못한 상태였다.
‘오늘도 따라오려나.’
주위를 경계하며 무사히 자취하는 방까지 들어간 그녀는, 눈에 보이는 광경에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분명히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갔던 방이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마음이 급하니 자꾸 헛손질이 나갔다.
“시, 신라….”
신라의 번호를 찾기 전 전화 한 통이 왔다. 다름 아닌 동주의 전화였다. 서영은 울상을 지으며 당장 그 전화를 받았다.
“서, 선배….”
「서영아. 미안한데, 신라한테 연락 안 되니?」
“시, 신라요? 저, 저도 아까 헤어져서….”
「그런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 말에 서영은 결국 왕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게, 흑흑, 그게, 집에, 집에 와 봤더니, 엉망진창이…”
「뭐? 잠깐 진정하고 얘기해봐.」
“스토킹 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흐엉… 집에 누가 다녀간 것 같아요….”
동주는 대번에 심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문은 잠갔어?」
“네, 일단….”
쾅 쾅 쾅!
그때 서영이 기대고 있던 현관문이 거세게 두드려지기 시작했다. 비명을 내지른 그녀가 핸드폰을 놓치고 방 안쪽으로 기어갔다.
“엄마아….”
「서영아! 서영아, 들려!?」
“선배, 선배 제발 빨리 와주세요…. 으엉….”
서영은 방의 가장 구석까지 기어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라졌는데도 사지가 떨려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문고리를 부수고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발작하듯이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든 서영은,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동주를 발견하고 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엉, 선배….”
동주는 정말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서영의 방을 훑어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도대체 어떤 자식이….”
“몰라요. 며칠 전부터 누가 따라다니는 것 같았는데….”
“안 되겠다. 경찰에 신고해 놓고, 일단 나가자.”
“그런데 다리에 계속 힘이 안 들어가서….”
다리를 툭툭 내려치는 서영을 보고 동주가 다가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업혀.”
“그치만….”
“어서.”
“……”
서영은 빨개진 얼굴을 감추며 동주의 목에 팔을 감았다. 한참을 달려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그의 몸을 느끼고 있으니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신라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동주는 서영을 데리고 일단 혜령의 집에 들어가 있었다. 혜령이 내어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던 서영은, 신라가 나타나자마자 참았던 울음을 또 한 번 터뜨리고 말았다.
“흐엉, 신라야아….”
“서영아!”
신라는 사색이 된 채 서영을 품에 끌어안고 다독거렸다.
“미안, 정말 미안해…. 네가 그런 일을 겪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냥, 기분 탓인 줄 알았어. 전화 받고 많이 놀랐지….”
“놀라긴 네가 더 놀랐겠지! 왜 말 안 했어, 이 바보야….”
서영은 울다가 지쳐 소파에서 선잠에 들었다.
혜령과 동주, 신라는 서로 머리를 모으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의논했다. 동주가 턱을 매만지다가 말했다.
“일단 경찰에 신고는 해놨지만…. 왠지 느낌이 쎄하단 말이야. 신라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게.”
혜령이 말을 받았다.
“영력이 꽤 있는 타입이니, 그런 시선을 남들보다 더 민감하게 눈치챌 수 있었을 거야.”
그때 동주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경찰에게서 온 전화였다. 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마친 동주가 모두에게 말했다.
“CCTV에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다는데.”
더 확실해지고 있었다. 서영을 스토킹하는 게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혜령은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그녀 집에서 묵을 것을 서영에게 권했다. 서영이 어색해할 것을 배려해서 신라도 함께 지내도록 큰 방 쪽을 기꺼이 내어줬다. 덕분에 두 사람은 무사히 시험 기간을 넘길 수 있었다.
이제 범인을 잡는 일만 남았다. 동주를 통해 사실을 알게 된 우선도 범인을 잡는 것을 돕기로 했다.
퇴근 직전, 우선이 가방을 메며 동주에게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범인이 인간이거나 인간의 ‘몸’이면 넌 나서지 마.”
“어째서?”
“보나 마나 눈이 뒤집혀서 묵사발을 내려고 할 테니까.”
“그래도 싼 놈이야. 어디서 더럽게 스토킹 짓을….”
“차동주.”
우선의 심각해진 말투에 동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우선이 왜 자신의 ‘분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영이가 자주 다니는 곳에 진을 쳐 뒀으니까, 곧 덜미가 잡힐 거야.”
“그래.”
“꼭 나한테 먼저 연락해야 돼.”
“알았다니까~ 마누라처럼 잔소리는….”
퍽- 날개뼈를 맞은 동주가 신음을 길게 흘렸다.
해가 완전히 진 어두운 밤, 잠들어 있던 서영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잠결에 전화를 받은 서영은, 상대에게서 말이 없어 고개를 갸웃하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그것은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세요?”
「너… 지금 집에 없구나?」
순간 소름이 돋은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뒤따라 깨어난 신라가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당신, 당신이구나!”
「그럼 오늘은… 속옷이나 가져가 볼까… 흐히히!」
“야!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왜 CCTV에 안 찍히는 거냐고!”
「그야 그 절름발이한테 ‘힘’을 빌렸기 때문이지~」
신라가 서영의 전화를 뺏어 들었다.
“절름발이? 혹시 구슬 같은 걸 삼킨 거야?”
「오~ 절름발이가 되도록 피하라고 했던 그 여자군? 너도 꽤 내 취향인데 말이야…. 큭큭!」
“대답해!”
「삼켰지~ 아주 끝내주던걸? 덕분에 나는 걔가 목욕하는 것까지 다 봤…」
“닥치지 못해!?”
「어휴, 무서워라.」
신라는 재빨리 동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이미 서영의 집으로 달려가고 있는 그였다.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서영이나 잘 다독이고 있어. 알았지?」
“네, 선배. 조심하세요. 추병귀가 꾸민 짓 같아요.”
「제길, 끈질긴 자식…!」
동주는 건물 계단을 서너 개씩 거침없이 뛰어 올라가 순식간에 서영의 집에 다다랐다.
“허억, 허억…!”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녀의 집 안을 둘러봤지만, 육안으로 보기로는 아무도 없었다.
‘이러면 어떠냐.’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어 허공에 부적을 던지고 그것을 꿰뚫었다. 그러자 한차례 미풍이 불면서 방 안에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
“…어?”
그 짧은 목소리는 동주가 낸 것이 아니었다. 방구석에 기대 서 있던 남자의 모습이 부적의 기운으로 점차 드러난 것이다.
“쳇!”
일이 수틀린 것을 눈치챈 스토커는 그대로 열린 창문을 통해 뛰어내렸다. 동주도 단숨에 그를 따라 창문을 넘었다. 바닥에 제대로 착지하지 못한 스토커는 다리뼈가 부러지기라도 한 듯이 발을 절었다. 덕분에 여유를 찾은 동주는 가까스로 화를 진정시켰다. 마침 우선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차동주!」
“나 잘 참고 있어. 서영이 집 앞이니까 경찰이나 불러줘.”
「…알았어. 곧 갈게.」
우선과 통화를 마친 동주는 스토커의 몸에서 구슬부터 빼냈다. 그리고 귀력을 담은 검을 휘둘러 귀신을 그 자리에서 제령시켜버렸다.
“후우.”
그가 홀가분한 숨을 토해내며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을 때였다. 그의 시야에 정면으로 들어오는 어두운 공원가에, 다리를 절며 몸을 숨기는 검은 인영이 있었다.
“저 자식…”
겨우 잠잠해졌던 동주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분노로 휩싸여버린 순간이었다.
스토커가 경찰에 붙잡히는 것을 확인한 우선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동주의 모습을 찾았다.
“이 녀석, 어디를 간 거야….”
그는 일단 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라야, 범인 잡혔어. 서영이한테 알려줘.”
「네, 선배. 감사합니다.」
“그럼 끊을…”
「추병귀는요?」
우선의 입이 뚝 멈췄다.
“…뭐?”
「못 들으셨어요? 그 스토커한테 힘을 빌려준 게 추병귀 같아요.」
“그걸… 동주가 아니?”
「네, 아까 조심하라고 말했었는데….」
우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는 횡설수설하며 전화를 끊은 다음 다시 동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상대는 받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안 돼….”
우선은 과거의 한 사건을 떠올리며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동주가 소년원에 갔었던 옛날의 사건을 말이다.
추병귀는 미친 사람처럼 낄낄거리며 어두운 공원을 지나 차도 쪽으로 달려 나갔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그를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며 피해갔다.
“거기 서-!”
동주는 분노 서린 얼굴로 그를 무서운 속도로 쫓았다. 그간 추병귀에게 당한 일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저 간악한 녀석은 쌍둥이 형인 동욱의 영혼을 납치해 갔었고, 우선을 함정에 빠뜨려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아가려고도 했었다. 이번에는 신라의 친한 친구마저 해치려 한 것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징벌의 사자의 본능이 그의 온몸을 지배했다.
“끄악!”
결국 다리를 접질린 추병귀는 차도 한가운데에서 나뒹굴고 말았다. 그를 쫓아 중앙선까지 달려온 동주는 고민할 것도 없이 허리춤에서 긴 검을 뽑아 들었다.
“히익!”
두려움에 숨을 집어삼킨 추병귀가 당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빌었다.
“미, 미안! 미안해! 그냥 나는 놀려줄 생각이었다고!”
“사과하기엔 이미 늦었어. 네가 한 짓들을 떠올려봐.”
“네, 네 동료인 강철도, 네 동생도, 모두, 모두…!”
두려움에 질렸던 추병귀의 얼굴이, 순간 쫙 펴지며 음흉한 미소를 담았다.
“모두 놀려줄 생각이었다니까~ 낄낄낄!”
“크윽….”
결국 동주의 눈이 뒤집혀버리고 말았다. 일부러 그의 화를 유도한 추병귀는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중앙선을 밟고 뒷걸음질 쳤다. 검을 쥔 손에 푸른 핏줄이 불거져 나올 정도로 동주의 화는 극에 치달아있었다. 그가 힘주어 내딛는 도로에 균열이 일어날 정도였다.
“너… 이 자식… 절대로… 용서 못 해….”
“용서를 못 한다고, 네놈이 뭘 할 수 있는데? 고작 화를 참는 것뿐이잖아!”
“넌… 선을 넘었어.”
“킥킥킥! 그래서 뭘 어쩔 거냐고~!”
긴 숨을 내뱉은 뒤 천천히 떠진 동주의 눈동자에는, 살기(殺氣)- 그 외에 아무런 감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죽어.”
그의 검이 빠르게 내찔러졌다. 너무도 빨라 절름발이가 아니더라도 결코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푸욱-!
그러니,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자도 몇 없었다.
동주는 추병귀의 앞을 가로막고 대신 그 검에 찔린 이를 떨리는 눈동자로 올려다봤다. 절망감으로 물드는 동주의 눈동자에, 고통을 참느라 새하얗게 질려 가는 우선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