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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장. 때로는 진실이 가장 괴롭다 (68/126)

67장. 때로는 진실이 가장 괴롭다

“모두 방해하지 말아 주겠어? 이 여인에게 오롯이 선택권을 주고 싶군.”

태용의 말에 누구도 반박할 생각 없이 서로의 눈치만 봤다. 사실 그 말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신후는 태용과 마주 본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방해되는 게 없다고 판단한 태용은 곧 신라의 손을 붙잡고 연구실에서 나갔다.

발끈한 혜령이 신후에게 외쳤다.

“안 쫓아가고 뭐 하세요!”

“선택권을 준다잖아. 억지로 데려가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억지로 데려가도 상관은 없어.”

‘다 뒤집어엎고 다시 데려오면 되니까.’

뒷말은 삼킨 신후에게서 검은 기운이 스물스물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걸 보고 식겁한 동주가 서둘러 박수를 치며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있지! 태인 님도 사실 용건이 있어서 지상에 왔다더라고~ 우리 여동생 쪽 이유도 뭔지 한 번 들어나 볼까?”

신후는 말없이 교수실로 들어가 버렸다. 눈치가 제로인 태인은 모두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린 것에 만족했는지 에헴, 크게 목을 가다듬으며 나섰다.

“나는 사람을 하나 찾고 있어! 정확히는 사내지.”

“사내?”

건우가 눈썹을 비틀며 물었다.

“그래!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상의 시간으로 치면 고려 말 즈음, 은혜를 입은 자를 찾고 있단다.”

“사람한테 은혜를 입었다고?”

“뭐,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요괴였을 수도 있어. 처음 물 위로 올라왔던 때라서 정신이 없었거든.”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처음 아가미를 없애고 물 위로 올라왔던 태인은 지상의 풍경을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처음 겪는 질식의 고통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수면이 낮아지더니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니 모래사장에 서서 걱정스레 지켜보는 사내가 있었다.

- 위험하니 놀려거든 물 밖에서 노시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내지어 보이고는 그곳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 뒤로 몇 번을 같은 모래사장에 찾아가 봤지만, 사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계속 생각이 나서, 만약 아직 살아있다면 그 사내를 내 정인으로 삼고 혼인할 생각이야.”

태인은 뺨을 붉히며 다리를 베베 꼬았다. 그런데 태인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우선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입가를 매만지며 애써 표정을 숨기고 있는 우선을 보고 동주가 눈치 없이 물었다.

“우선아, 왜 그래?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응? 아, 아니….”

“그럼 어디 아파?”

잠시 우선의 상태를 살피던 혜령과 건우가 뭔가를 눈치채고 음흉하게 웃기 시작했다. 건우가 짐짓 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이것 참, 내가 오래돼서 기억은 자세히 안 나는데, 그렇게 물을 없앨 줄 아는 요괴를 알았던 것 같기도 하고~”

“저, 정말!?”

태인이 반색하며 외쳤다. 동주도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물을 없애는 요괴? 서, 설마 우선-”

우선의 손이 동주의 입을 때리듯이 덮었다.

“맞아. ‘우선’다 함께 조용히 생각해볼까? 차 조교…?”

“읍읍-”

‘날 용궁에 팔아넘기고 다시는 못 볼 참이야?’

우선이 표정으로 다급히 말했다. 태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살아있을까? 요괴일 확률이 크지만, 사실 생긴 것도 잘 기억나지 않아서….”

우선의 손을 떼어낸 동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생각나는 것 같아. 전생에 그런 요괴를 알았었는데, 고려 말 이후로 죽었다고 들었어.”

“그, 그래?”

태인의 눈꼬리가 슬프게 내려갔다. 그걸 보고 우선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복병이 있었다. 태인이 울상을 짓는 걸 보고 뭉클한 혜령이 다가가 그녀를 품에 넣고 다독이며 말했다.

“환생이라는 게 있잖아? 덕을 쌓은 요괴라면 분명 인간으로 잘 환생했을 거야.”

“그렇겠지?”

“그럼~ 지금 이 주위에 있을지도 모르고.”

덕분에 태인의 눈에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혜령은 우선을 향해 사과의 표시로 윙크를 보냈다. ‘불쌍하잖아~’ 입 모양으로 말하며. 그에 우선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한편, 태용은 아까 봐둔 학교의 뒤뜰로 신라를 데리고 갔다. 벤치에 앉으니 적당히 선선한 공기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지상의 공기는 솜털 같군. 계속 피부를 간질이고 있어.”

“그런 표현은 처음 듣네요.”

“바다에는 공기와 바람이 없으니까.”

“그런 곳에서 인간은 살 수 없어요.”

신라는 먼저 선을 그었다. 더는 그에게 기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태용이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네가 원한다면 바다 근처에 누각을 짓고 지상에서 너와 살 수도 있어.”

“만난 지 몇 시간 지난 사람한테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꿈을 꾸는 것 같네요.”

“살아온 시간이 억겁이니, 사람을 판단하는 건 단 몇 초면 충분해. 처음 너와 마주쳤을 때 한눈에 내 정인(情人)임을 알아봤다.”

“……”

“신라…. 날 봐.”

태용은 신라의 손을 들어 그 손바닥에 가볍게 입 맞췄다. 그리고 그의 뺨을 감싸도록 만들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참 두려움이 없는 남자였다. 어떻게 보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감정이 그 누구보다 부러울 한 남자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울 것 같은 눈이군.”

태용이 신라의 감정을 눈치채고 말했다.

“태용 님은 참 따뜻한 분이시네요. 한낱 인간의 감정도 그렇게 빨리 알아채시니.”

“……”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해요. 당신이 주는 만큼 그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 말에 태용은 쓰게 웃었다.

“누구도 아닌 네 자신을 탓하면서 거절하면, 내가 더 밀어붙일 수가 없잖아.”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당신의 진짜 정인이. 그러길 기도할게요.”

“너는 진짜 정인을 만난 건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신라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손을 매만지며 아쉬움을 견뎌내던 태용은 잠시 후 품에서 진실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의 모서리 쪽을 세게 힘주어 깨뜨렸다.

“분실한 걸 찾는 과정에서 손상을 입었다고 적당히 둘러대면 되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진실경의 파편을 신라에게 건넸다.

“증표로 남길 것이 마땅히 없어 이거라도 주마. 네가 보고 싶은 과거의 한순간을 명백히 보여줄 거야.”

“……”

“생각이 바뀌면 언제라도 찾아오도록 해. 이 마음은 수십, 수백 년이 지난다고 해서 지워져 있지 않을 테니.”

할머니가 돼서 찾아가도 과연 받아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신라는 작게 웃었다.

용왕의 자제들은 연구실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바다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자 은은하게 풍기던 바다 향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다들 귀가하지.”

신후의 말에 조교들은 모두 홀가분한 모습으로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벌써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평소보다도 더 말수가 줄어든 신후를 보고 신라도 별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보냈냐고 안 물어봐?”

결국 신후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뜸을 들이던 신라가 되물었다.

“왜 따라갔냐고 안 물어봐요?”

“교수의 질문에 반문을 하다니….”

신라는 작게 웃었다.

“먼저 말씀하셨으니까 물어볼게요. 왜 보냈어요?”

“알려주고 싶었어. 이번이 아니더라도, 내 곁에 있는 게 힘들어지면 언제든 그렇게 떠나가도 된다는 걸.”

“……”

생각보다 슬프게 들리는 그 말에 신라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내가 힘들어 보여요?”

“가끔.”

“……”

“이게 내 본심이니, 나중에 널 붙잡고 늘어져도 매몰차게 떠나가도 돼.”

정적이 흐르는 동안 차는 오피스텔 주차장에 다다랐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두 사람은 말없이 서 있었다. 신라는 그녀가 사는 층만 눌려 있는 버튼을 보고 위층을 더 눌렀다.

“오늘은 바로 올라가세요. 피곤하실 테니까.”

“…그래.”

사실 신라가 사는 층에 내려봤자 그가 하는 일이라곤 문밖에서 그녀가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신라는 그에게 목례한 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딱 잘라서 거절하러 간 거예요. 이미 나한테는 정인이 있으니까.”

그녀의 손가락이 귀에 꽂힌 귀걸이를 톡톡 건드렸다. 신후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단번에 심각해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신라는 쑥스러운 듯 웃어버렸다.

“잘 가요…”

그녀의 인사가 끝나기 전, 신후는 닫히기 시작한 엘리베이터의 문을 힘으로 열어낸 다음 급하게 걸어 나왔다.

“너….”

“왜요?”

“진심…이야?”

한신후라는 남자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마음으로 조금씩 전해지고 있을 줄 알았건만, 이제 와서 이렇게 충격을 받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신라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인가요?”

“내가… 억지로 널 붙잡고 있기 때문에….”

신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는 게 당신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참았던 적도 있어. 하지만 그게 당신을 더 괴롭히는 짓 같아서… 앞으로는 더 솔직해지려고.”

“하아….”

신후는 눈을 덮으며 많은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뱉어냈다. 그것은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본인에 대한 질책과 그녀를 향한 안타까움이었다.

“내가 미…”

그가 ‘미안’이라는 단어를 담기 전에 신라는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먼저 입술을 훔쳤다. 늘 참지 못하고 먼저 키스를 시작했을 때도, 마음이 아닌 몸의 흥분에 지배된 본인을 보고 죄책감에 시달렸겠지.

“이제 미안할 필요 없어요. 알았죠?”

“……”

“사랑…”

이번에는 신후가 신라의 입을 막았다. 소중한 보물처럼 조심스럽게 아랫입술, 윗입술을 차례로 머금다가, 곧 입술 사이로 혀를 넣어 달콤한 타액을 맛봤다.

능숙하게 입안 곳곳을 부드럽게 헤집으며 감미로운 키스를 선물한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은, 조금만 아껴둘래? 내가 먼저 하게 해줘.”

“…알겠어요.”

신후는 흥분한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분히 눈을 감고 신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들어가. 좋은 꿈 꾸고.”

“당신도요.”

신라는 하루 종일 몸에 배어 있던 바다 내음을 깨끗이 씻어내고 나왔다. 피곤하긴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태용에게 받았던 진실경의 파편을 손에 쥐었다.

- 증표로 남길 것이 마땅히 없어 이거라도 주마. 네가 보고 싶은 과거의 한순간을 명백히 보여줄 거야.

심호흡을 한차례 한 그녀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왜 귀력의 화수분으로 태어나게 됐는지, 왜 운명의 굴레가 끊겨버렸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보여줄 수 있겠니?”

잠시 후 거울에 미세한 진동이 일면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신라의 얼굴을 비추고 있던 거울의 면에 희미하게 풍경 같은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진짜였어….’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문 채 긴장한 모습으로 거울이 보여주는 장면에 집중했다.

‘보여줘… 왜 내가 이런 힘든 삶을 살게 됐는지. 가족도, 친구들도, 소중히 여기는 존재들은 모두 다치거나 영영 떠나버리는 외로운 삶을 살게 됐는지.’

진실의 시작과 끝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것을 보는 동안 신라의 얼굴에는 놀람과 슬픔, 허망함… 그리고 배신감이 차올랐다.

‘왜… 왜 하필 당신이….’

그녀의 손에서 진실경의 파편이 허무하게 떨어져 내렸다.

파편 속에는, 지금보다 더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전생의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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