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장. 바다의 귀인
신라는 손등에 키스한 사내를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용왕의 아들이니, 잃어버린 바다의 보물을 찾으러 왔느니, 그가 길게 늘어놓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줘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나와 함께 바다 구경을 가지 않으련?”
그 바다 구경이라는 게 보통 인간들이 생각하는 수면 위 구경이 아닐 것 같아서 신라는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이 작은 보석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로운 보물들로 가득한 곳이지.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주마.”
“왜 저에게….”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다.”
사내는 신라의 머리칼을 쥐어 입술에 대었다. 그의 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신라는 설렘과는 다른 부끄러움으로 뺨을 붉히고 말았다.
“저는…”
“왜, 이미 정인이 있더냐?”
신라를 찬찬히 살펴보던 태용의 눈에, 그녀의 귓불에서 반짝이고 있는 귀걸이가 보였다.
“인면조의 일부를 가공한 보석이군. 이걸 준 남자가 너의 정인인가?”
“……”
태용은 아쉬움에 신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민망함에 시선을 내리고 있어 긴 속눈썹이 뺨 위로 가지런히 드리워진 것이 청초하고 아련한 느낌을 주었다.
그의 손이 홀린 것처럼 뻗어져 보드라운 뺨을 매만졌다. 당황한 그녀가 물러서려 하자, 다른 손으로 허리를 감아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살면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해인(海人)의 몽환적인 체향에 잠시 어지러움을 느끼는 사이, 태용이 턱을 그러쥐며 키스할 듯이 다가왔다. 미처 피하지 못한 신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챙그랑-
사학과 건물의 창문 하나가 요란스레 깨지며 그 파편들이 그들의 지척으로 떨어져 내렸다. 옷깃으로 신라를 보호한 태용이 깨진 창가를 날카로운 눈으로 올려다봤다.
“아무래도 길 잃은 아이를 찾은 모양이군.”
우선은 귀찮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연구실 앞까지 끈질기게 쫓아오는 묘령의 여인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비록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는 존재이지만 말이다.
그는 결국 한마디 하기 위해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엄청난 수의 장정들이 그들의 주위를 둘러쌌다. 창과 방패를 들고 전투적인 모습을 보이는 그들을 보고 우선은 재빨리 여인을 끌어당겨 품 안에 넣고 보호했다. 덕분에 머릿속이 새하얘진 여인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들 사이의 오해를 풀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여인과 비슷하게 바다 내음을 풍기는 장정들을 보고 우선은 그들이 이 여인을 노리고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한 장정이 내던진 창을 팔로 가볍게 쳐낸 그는 손을 뻗어 반격할 준비를 했다.
“그만.”
상황을 종료시킨 것은 의외로 짧은 한마디였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교수실에서 나온 신후가 우선의 뒤에 서 있었다.
“교수님….”
“저들은 용궁의 사자들이야.”
“바다사자들이 왜 지상까지….”
마침 신라와 함께 반대편 복도로 올라오는 이를 발견한 신후가 그에게 경계 어린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그들이 모셔야 할 존재가 멋대로 외출을 했나 보지….”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우선의 손을 야무지게 쳐낸 여인이 볼을 불린 채 그를 째려보고는 태용에게로 달려갔다.
“오라버니-!”
태용과 그의 여동생 태인은 연구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혜령이 향이 좋은 차를 따라 그들에게 대접했다.
장차 동해 용왕의 뒤를 이을 태용에게서는 그에 버금가는 카리스마와 위용이 느껴졌다. 반면 여동생은 호기심 많은 말괄량이 느낌이었다.
그들 맞은편에 앉은 신후가 깍지 낀 손을 다리 위에 올려놓은 채 태용에게 물었다.
“바다의 귀인께서 지상에는 어쩐 일로.”
“날 살뜰히 안내해 준 그 여인에게 이미 모두 말했다.”
신후는 옆에 앉아 있는 신라를 돌아봤다. 다른 조교들의 시선도 그녀에게 집중됐다. 마치 태용을 대변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 민망한 기분이 든 신라가 괜히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동해에 깊은 동굴이 있는데, 그곳에 옛날부터 용왕을 모시던 사당이 있대요. 그곳에 바다의 으뜸가는 보물을 숨겨놨었는데, 최근에 도둑맞았다고 해요.”
“그 보물을 지상에 와서 찾는 이유는?”
신후의 물음에, 태용은 이번에도 신라를 가리켰다.
“그 또한 저 여인에게 말했다.”
“……”
건우가 ‘두 번 말하면 배라도 아픈가 보지?’ 하며 투덜거렸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쉰 신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닥에 찍힌 신발 자국과 범인이 놓고 간 듯한 패물 때문이에요. 후에 저주를 받을 게 두려워서 갖고 있던 패물을 대신 놓아두고 보물을 가져간 것 같다고….”
태용은 품에서 꺼낸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오랜 가보(家寶)로 보이는 작은 패물 단지에는 ‘함’이라는 흔치 않은 성씨가 적혀 있었다.
“그 바다의 보물이라는 게 뭐지?”
신후의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은 태인이 했다.
“진실경(鏡)이다! 보고자 하는 과거의 순간을 무엇이든 보여준다는 귀한 보물이지. 십장생 중 ‘물’을 본뜬 태초의 거울이야.”
“그걸 찾아주면 얌전히 바다로 돌아갈 건가?”
“그래! 그런 귀한 것을 구경도 못 해본 너희가 과연 찾을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말이야.”
신후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교들은 그가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신후가 사당이 있는 동굴에 다녀오기로 하고, 그 사이 건우는 소환견을 시켜 서울 안에 패물의 주인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저도…”
신후를 따라 일어나려던 신라가 태용의 손에 붙잡혀 다시 앉고 말았다. 모두가 나가고 세 사람만이 연구실에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느낌이 달라진 신후의 눈빛을 보고 태용은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이 귀걸이의 주인이시군. 잘하면 덤비겠어.”
“지상 나들이를 왔으면 얌전히 구경만 하다가 돌아가길 권하지. 이렇게 귀찮은 일을 대신 처리해주고 있으니까.”
“네 곁에 있으면 이 여인이 과연 행복한가?”
“……”
“내가 데려가면 평생 왕족 대접을 받으며 호화롭게 살게 해줄 수 있다.”
신후의 무감정한 시선이 태용에게서 신라에게로 옮겨 갔다. 신라는 곤란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행복…. 장담할 수는 없지. 나조차 진정한 행복이 뭔지 모르거든.”
신후의 말에 태용이 작게 조소했다. 신후는 신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만 내 행복이 그 여인에게 달린 건 확실해. 그래서 이기적으로 곁에 붙잡고 있지.”
솔직하기 그지없는 사내의 말에 태용은 할 말을 잃었다.
신후는 교수실로 돌아와 옷걸이에서 코트를 챙겨 입었다. 가라앉은 모습으로 문을 열고 나간 그는 앞을 막아서는 여인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신라가 마치 오늘 처음 만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따라간다고 하면… 혼내실 거죠?”
“평소라면 그랬겠지.”
신후는 입꼬리를 당기며 신라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구두가 바닥을 세게 내리치자마자 두 사람의 모습이 검은 연기와 함께 그곳에서 사라졌다.
파도가 넘실대는 어두운 동굴은 잘못해서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금방 허벅지까지 젖고 마는 위험한 곳이었다.
신후는 신라의 손을 꽉 붙잡은 채 익숙한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신라는 핸드폰의 불빛으로 겨우 시야를 밝히며 그를 따라갔다.
“앗-”
미끄러운 바위에 발을 접질린 신라가 결국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말았다. 신후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몸을 한 팔로 안아 들었다.
“제가 걸을 수 있…”
“더 이상 네가 바다 냄새에 젖는 게 싫어서.”
“……”
태용의 체취가 어느새 몸에 배어 있는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에 신라는 얌전히 그에게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십여 분을 더 들어가니 나무로 지어진 작은 사당이 보였다. 이런 깊은 곳까지 들어와서 영물(靈物)을 알아보고 가져갔을 정도라면 보통 인간은 아니라는 짐작이 들었다.
신후는 가만히 서서 사당을 관찰했다. 신라는 그 틈에 그에게서 내려와 제 발로 섰다.
“진실경은 정확히 어떤 물건이에요?”
“인생에 단 한 번, 과거의 한순간을 보여주는 물건이야. 보통 사람에게는 단순한 거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보이지. 나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어.”
“신기하네요.”
“용왕이 죄를 숨기는 자를 처단하기 위해 쓴다고 알려져 있어. 가져간 사람은 아마도 그게 얼마나 중요한 영물인지 모르고 가져갔을 거야.”
“그랬을 거예요….”
사당 근처를 둘러보던 신라는, 뭔가 발에 걸려 그것을 주워들었다. 핸드폰 불빛으로 비춰보니 중학교 학생증처럼 보였다.
“교수님?”
신후가 다가와 그것을 같이 들여다봤다.
“와보길 잘했군.”
“일이 빠르게 끝날 것 같은데요.”
“아쉬워?”
그의 장난 섞인 물음에 어이없는 웃음을 흘린 신라는 학생증에 적힌 학교 이름을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았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 있는 학교였다.
신후는 조교들에게 범인을 찾은 것 같으니 연구실에서 기다리라는 연락을 보냈다. 중학교 수업이 끝나려면 아직 반 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 두 사람은 근처의 카페에서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손에 쥔 채 학교 문 앞에 기대 있었다.
“저기 오네요.”
신라가 먼저 학생증의 이름과 똑같은 ‘함수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을 발견했다. 짧은 단발머리의 소녀가 하품을 하며 터덜터덜 교문을 통과해 나왔다.
“안녕.”
신라가 인사하며 다가가자, 낯선 얼굴에 경계심을 끌어올린 소녀가 이어폰을 빼내며 물었다.
“누구세요?”
경계심 어렸던 얼굴은 신라의 뒤로 다가오는 미남을 발견하고 금방 풀어져 버렸다. 하지만 이내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다시 두 사람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호, 혹시 그걸 되찾으러 온 거야?”
신후가 눈썹을 들썩였다.
“역시 괜히 호기심에 가져간 건 아닌 모양이군. 양심상 집안의 가보를 두고 엿 바꿔먹듯이 거울을 가져간 건가?”
신후의 시니컬한 말투에 소녀의 표정이 금방 두려움에 질렸다. 신라는 신후를 질책하듯이 밀쳐낸 다음 소녀에게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 사실 그 거울이 우리 건 아니지만, 주인이 애타게 찾고 있어서 대신 찾으러 온 거야.”
“나, 나는 단지 그 거울이 너무 예뻐서… 신기해서….”
“그랬구나. 그럼 이제 돌려줄 수 있겠니? 너희 집 가보도 안전하게 돌려줄게.”
“네….”
소녀가 그들을 안내해 데려간 곳은 신점을 보는 점집이었다. 모친이 이곳을 운영한다고 했다.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예사롭지 않은 영력이 간단히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소녀는 그들에게 순순히 보자기에 싸인 얼굴만 한 거울을 꺼내줬다. 그것을 받아든 신후는 부러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또 한 번 주인 있는 물건을 훔쳐 가면 다음에는 염라대왕이 찾아와서 널 붙잡아 갈지도 몰라.”
“흐익!”
신라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교수님….”
“거짓말은 아니잖아.”
쿡쿡대며 웃은 신후는 신라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코앞에서 애정 표현 비슷한 것을 목격한 소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장소를 떠나기 전, 신후는 소녀를 향해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중에 크면 한국대 사학과에 지원하도록 해. 그 정도면 면접은 바로 통과시켜 줄 테니까.”
그가 발을 구르자, 검은 연기와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소녀는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한국대… 사학과….”
두 사람이 찾아온 진실경을 세심하게 살펴본 태용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것이 맞다. 빨리 찾았군.”
“쉽게 훔쳐 갈 수 있도록 해놨으니, 찾아오는 것도 쉬웠을 뿐이야.”
“……”
신후와 태용의 눈싸움에 조교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되어 열심히 딴청을 부렸다. 신후에게서 시선을 거둔 태용이 그의 옆에 있는 신라에게 다가가 손을 쥐어 들었다.
“너에게는 참 신세를 많이 지는구나.”
“아니에요.”
“신라. 다시 한번 물으마. 나와 함께 바다에 가지 않겠어?”
진지한 눈에는 장난기라곤 단 한 점도 없었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분위기를 초 칠 궁리를 하던 건우도 차마 입을 열지 못했을 정도였다.
신라는 곤란하게 태용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