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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장. 스쳐 가다 (66/126)

65장. 스쳐 가다

요새 화비의 주된 일과는 요괴의 모습으로 서울의 병원 곳곳을 탐색하는 일이었다. 작은 여우가 가방을 사선으로 멘 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은 어린 환자 영혼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그럼에도 화비가 이렇듯 직접 팔방으로 뛰어다니는 이유는, 신후가 찾고자 하는 인물의 단서가 몇 없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찾아지려나…. 그 사람이 유체 이탈 중이라는 확신도 딱히 없고 말이야.”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병원 내 잔디밭에 잠시 몸을 뉘었다. 가을 공기가 기분 좋게 귀를 간질이고 지나갔다.

- 안녕, 여우야.

깜빡 잠에 빠져들 뻔한 화비가 그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환자복을 입은 여인이 잔디밭에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환자복을 입은 ‘영혼’이었다.

“어…. 안녕.”

- 너 참 귀엽게 생겼다.

젊은 여인은 해맑은 미소를 갖고 있었다. 그 미소에 화비는 자기도 모르게 무장해제 되고 말았다.

“내가 좀, 귀엽긴 하지. 크흠.”

- 후훗. 이곳에 사니?

“아니, 찾을 사람이 있어서. 그러는 당신은 이곳에 살아?”

- 응. 몇 년 됐어. 정확히는 내 몸이 이곳에 묶여 있지.

“왜 기억이 있는데 육신으로 돌아가지 않아?”

- 돌아가 봤자 즐겁게 살 자신이 없어서. 그렇다고 떠나자니, 날 붙잡는 것들이 많고….

“뭐가 당신을 붙잡는데?”

- 잘은 모르겠어. 그래서 이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지.

“그렇구나.”

- 네가 찾는 사람은 누군데?

“그게….”

화비는 작은 가방에 머리를 넣고 뒤적거리다, 신후가 맡긴 노리개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노리개의 매듭 부분이 마치 공명하듯이 다른 색깔로 변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라?”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리둥절한 채 고개를 든 화비는,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진 여인에 다급히 몸을 일으키고 두리번거렸다.

“이, 이봐! 이봐-! 어디로 갔어!”

한차례 강한 바람이 병원 뜰을 훑고 지나갔다. 화비는 허망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 *

혜령은 출근한 건우를 보자마자 그만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그럴 줄 예상했다는 듯이 표정만 불퉁하게 만든 건우는 빨개진 얼굴로 자리에 걸어가 착석했다.

건물 바깥 자판기에 들렀다 온 우선과 동주도 평소와 다른 건우의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얼음, 그 후로는 혜령처럼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그만 웃어라….”

이 순간 가장 민망할 건우를 배려한 그들은 최대한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신후와 신라가 연구실로 들어오자마자 무산되고 말았다. 신후가 건우를 보자마자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한 말 때문이었다.

“뭐야. 이번 생에는 결혼 안 하기로 한 건가?”

“푸하하하!”

혜령을 필두로 다시 웃음바다가 됐다. 신라만 유일하게 신후를 질책하듯이 째려본 다음 건우에게 다가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건우 선배, 오늘 멋져요.”

신라의 진지한 태도는 의도와 달리 사태를 더 악화시키기만 했다. 건우는 이제 모든 걸 포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고맙다.”

검은 정장에 푸른색 체크 넥타이, 올백으로 부담스럽게 올린 머리는 선을 보러 나가는 남자라기보다 면접을 처음 보는 갓 졸업한 학생 느낌이었다. 건우의 모친이 워낙 며느리 욕심이 많아서 종종 이런 선 자리에 그를 억지로 내보내곤 했다. 신라가 건우의 머리칼을 간단히 손보며 말했다.

“선배는 어머니한테 약하신가 봐요.”

“모든 아들들이 그렇지.”

“옷은 깔끔하니까, 머리만 이렇게 좀 힘을 빼면 훨씬 나을 것 같아요.”

촌스러운 올백 머리에서 앞머리가 조금 떨어져 내리니 훨씬 외모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웃고 있던 혜령도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였다.

“그런 고로, 오후에는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건우가 넌지시 한 말에 신후는 짧은 웃음으로 답하며 교수실로 들어갔다.

건우는 긴장한 모습으로 호텔 레스토랑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분위기 있는 음악이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한몫했다. 푸른 넥타이는 어느새 벗어버리고 대신 단추를 하나 끄르고 있었다. 사실 전문직도 아닌데 굳이 양복을 입을 필요까지 없다고 생각했었다.

‘좀 늦네.’

그는 손목시계를 한 번 봤다. 약속된 시간보다 10분이 늦어 있었다. 본인도 원래 약속 장소에 제때제때 도착하지 않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약 20여 분이 흘렀을 때, 사람들의 이목을 확 끄는 화려한 외양의 여인이 입구로 들어섰다. 혜령이 세련된 패셔니스타 느낌이라면, 저 여인은 대놓고 명품으로 휘감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설마….’

건우의 바람과 달리 그 여인은 싱긋 웃으며 그의 맞은편 의자에 요염하게 앉았다.

“조건우 씨?”

“아, 네….”

“반가워요. 나주연이라고 해요.”

건우는 곤란한 표정을 감추며 뒷머리를 긁었다. 딱 봐도 부잣집 여식에, 기가 센 스타일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딱 질색으로 여기는 스타일이었다.

‘후훗. 감정을 못 숨기는 게 귀엽네.’

주연은 속으로 생각하며 테이블에 턱을 괴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생각보다 귀여운데….’

그의 눈코입을 자세히 뜯어보던 그녀는 먼저 웨이터를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건우 씨는 사학과 전공이라고 했었죠?”

“그렇습니다. 미리 편견을 갖고 싶지 않아서 주연…씨 프로필은 일부러 듣지 않았습니다.”

“어머, 마음에 드네요. 그런 사고관. 저는 패션 쪽 일 해요. 나중에 부모님 사업을 이을 생각이죠.”

“그… 괜찮겠습니까? 그런 화려한 직종과… 역사 쪽 공부하는 사람이 서로 좀….”

“안 어울릴까 봐요?”

“…네.”

건우는 솔직하게 답하며 목을 가다듬다가, 마침 웨이터가 내온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주연이 웃으면서 말했다.

“왜요? 난 인텔리한 사람 끌리던데. 나중에는 교수도 될 수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건우 씨는 나 어떤데요?”

슥- 주연의 손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건우의 팔을 쓰다듬었다. 그에 화들짝 놀란 건우가 자리에서 솟구쳤다.

“그,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저랑 그쪽은 너무, 뭐랄까…”

건우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는 동안 주연은 푹 빠진 얼굴로 그를 눈에 담고 있었다.

‘아아, 어떡하지. 진짜 내 취향이었네?’

사실 조건우, 그러니까 길달에 대해서는 비형랑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저택에 붙잡혀 왔을 때 정신을 잃고 있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구경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피 칠갑이 되어서 제대로 못 봤었는데.’

그녀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열심히 말을 끝마친 건우는 짧은 목례를 남기고 먼저 레스토랑에서 나가버렸다.

“아아, 바람맞았네….”

하지만 주연은 실망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 표정으로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그녀의 말에, 요기를 가득 지닌 그녀의 애완귀(鬼)가 소환돼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가을바람을 맞아, 어느덧 캠퍼스에는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신라는 점심시간을 쪼개서 단풍나무 그늘에 앉아 정리한 내용들을 읽고 있었다. 시원하고 쾌청한 가을 공기가 더 집중이 잘 되게 만들어 주었다.

‘응?’

그런데 웬 긴 머리의 여인 한 명이 캠퍼스 안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뜯어보니 여자라기에는 이목구비가 굵직하고 피부가 구릿빛인 것이 외국인 남자 같기도 했다. 워낙 너풀거리는 옷에 화려한 장신구를 두르고 있어 성별이 긴가민가 한 것이다.

‘영혼이구나.’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랬다. 신라는 바지를 털고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길을 잃었나 봐요.”

정체불명의 사람이 두리번대던 것을 멈추고 신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넌 누구지?”

목소리를 들으니 남자임이 확실해졌다. 검은 머리칼 아래의 청아한 푸른색 눈동자가 굉장히 인상적인 이였다.

“이 학교 학생이에요.”

“난 무언가를 찾으러 왔다. 넌 내가 보이는군?”

“원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을 잘 봐서요.”

남자는 신라를 다시 자세히 뜯어봤다.

“넌 다른 인간들과 좀 다르구나. 너에게서 끝없이 샘솟는 귀기가 느껴진다.”

“…맞아요.”

“그간 많이 힘들었겠군.”

난생처음 보는 이가 하는 말에 왜 가슴마저 뭉클해지는지 신라는 알 수 없었다. 놀란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고 피식 웃은 남자가 그녀의 손을 대뜸 붙잡았다.

“천천히 이곳 구경을 시켜주련? 안 그래도 함께 온 아이가 이곳에서 길을 잃은 모양이니 천천히 찾을 겸 해서 말이야.”

“아….”

“어서.”

남자가 하는 말에는 거역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악한 기운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신라는 어쩔 수 없이 잠시 짐을 버려두고 그에게 캠퍼스를 구경시켜주기로 했다.

그 시각, 우선은 사학과 건물 밖에 있는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무엇을 마실지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조용히 다가온 누군가가 불시에 오렌지 주스 버튼을 눌러버렸다.

덜컹-

“……”

그는 황당함에 눈을 깜빡거리며 옆에 서 있는 이를 쳐다봤다. 긴 머리를 반묶음 해서 화려한 장식의 비녀로 꽂은 작은 머리통이 자판기를 요리조리 관찰하고 있었다.

“저기….”

우선의 부름에 여인이 그를 샐쭉 쳐다봤다.

“무엇이냐!”

“왜… 내 음료수를 그쪽이….”

“음료수? 그게 뭔데?”

“……”

은은하게 풍기는 바다 내음, 높은 신분을 상징하는 옛 장신구들까지…. 왠지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은 우선은 조용히 음료수를 꺼내 여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너 마셔. 그럼 난 이만.”

“……”

싱긋 웃으며 건물로 들어가 버리는 우선을 보고, 여인의 표정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곧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손에 들린 오렌지 주스를 관찰했다.

“이제 웬만한 곳은 다 둘러봤네요.”

신라는 바다 내음이 나는 정체불명의 사내를 데리고 다시 처음 만났던 장소로 돌아왔다. 공기를 한번 깊이 들이마신 남자가 손바닥을 벌리며 그 위에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그곳에 반짝거리는 보석이 나타났다.

“이건 날 안내해준 데에 대한 답례다.”

신라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받을 수 없어요.”

“어째서지?”

“이걸 받을 만큼 해드린 게 없는걸요.”

“…넌 참 수수하고 정이 많군.”

신라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넌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보지?”

“글쎄요. 바다에서 오신 분이라는 건 알 것 같아요. 향긋한 바다 내음이 나거든요.”

신라는 예전에 십장생의 현신 중 하나인 자라귀가 연구실로 들이닥쳤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에는 이것보다 더 묵직하고 깊은 바다 내음이 났지만 말이다.

“너에게서도 향긋한 육지의 향기가 난다.”

“풋, 그런 말 난생처음 들었어요.”

신라가 편안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남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두 손을 꼭 붙들었다.

“네 이름이 뭐지?”

“아…. 전 유신라라고 해요.”

“유신라…. 유씨 성에 신라라는 이름을 가졌군. 신라…. 예쁜 이름이다.”

신라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는 신라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신라. 나는 사실-”

그때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신라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아니었다. 창과 방패를 손에 든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들의 주위를 둘러쌌다. 바다의 내음이 온 캠퍼스 안에 진동했다. 장정들 중 하나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인간 계집! 어서 그분에게서 물러나지 못할까!”

남자는 한숨을 쉬며 신라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허공에 옷깃을 펄럭여 한차례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장정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저 멀리 날아가 모습을 감췄다.

남자는 신라의 눈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느끼고 신라는 조심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떠보았다. 아직 그들 주위를 맴도는 미풍에 남자의 화려한 옷단이 마치 구름처럼 펄럭거리고 있었다.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신라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는 동해를 다스리는 용왕(龍王)의 첫째 아들, 태용(太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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