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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장. 해(解) (65/126)

64장. 해(解)

신라와 화비는 나태귀를 쫓아 쉼 없이 달렸다. 뒤뜰의 수풀을 뚫고 나가면 시야가 탁 트인 평야가 펼쳐졌다. 나태귀의 손에는 아직 우선의 혼이 갇힌 봉제 인형이 들려 있었다. 소녀는 깔깔깔 웃으며 뒤쫓아 오는 그들을 놀렸다.

“빨리 쫓아오지 않으면 이 예쁜이를 강물에 던져버릴지도 몰라~”

신라는 범인의 정체가 다름 아닌 그녀가 구했던 그 소녀임을 눈치채고 혀를 찼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우선을 안전하게 구해낼지부터 궁리해야 했다.

“자, 헤엄쳐 봐! 예쁜아!”

그때 나태귀가 우선이 갇힌 인형을 강가 쪽으로 있는 힘껏 던졌다.

“안 돼-!”

순간 눈동자를 붉게 빛낸 신라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거의 강물에 빠질 뻔했던 인형이 다시 둥실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화비가 재빨리 달려가 인간으로 둔갑함과 동시에 인형을 낚아채 품에 안았다.

“내가 잡았어!”

순간 인형에 갇힌 채 수장이라도 되는 줄 알았던 우선은 화비의 품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정면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놀라서 사지를 굳히고 말았다. 어느새 넓은 평야에 수백이 넘는 저주 인형들이 나타나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 키키킥!

- 맛있어 보이는 먹이들이다….

빠져나갈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저마다 칼이나 톱 등 무시무시한 무기들을 들고 서 있는 인형들을 보고 신라와 화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 일단 도망쳐, 얘들아! 내가 시간을 벌어볼게!

우선의 목소리를 듣고 신라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강물 말고는 도망칠 곳도 없었다.

나태귀가 신호를 보내자 모든 저주 인형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비가 여우 불로 방어막을 쳤지만, 워낙 수가 많아 소용이 없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개들이 사납게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풀에서 달려 나온 소환견들이 저주 인형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있었다.

“건우 선배…!”

신라가 밝아진 표정으로 외쳤다. 건우는 나무 기둥을 짚고 겨우 선 채로 소환견들을 부렸다. 이미 한계 따위는 극복한 지 오래였다. 반대편 수풀에서도 무사히 정신을 차린 동주와 혜령이 나타나 저주 인형들을 휩쓸고 있었다.

상황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나태귀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약한 놈들부터 해치워버려! 갈기갈기 물어뜯어 버리라고!”

그 말을 듣고 저주 인형들의 시선이 일제히 신라와 화비 쪽으로 향했다.

“흐익!”

겁을 먹고 움츠러든 화비를 뒤쪽에 숨긴 신라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귀력을 모두 소진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서 반드시 빠져나가야 했다.

“내가 길을 뚫어볼 테니까, 화비 너는 우선 선배를 데리고 동주 선배 쪽으로 달려가.”

“뭐? 그게 가능하겠어?”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그럼 준비해.”

신라는 빌려 썼던 귀신의 능력 중에서 가장 파괴력이 셌던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봤다. 그것은 바로 불가살(不可殺)을 불태워 죽였던 불화살이었다.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은 신라가 마치 화살을 쏘는 듯한 동작을 하자, 그녀의 손에 거짓말처럼 불로 만들어진 활과 화살이 나타났다.

“지금이야!”

신라가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거대한 불화살이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저주 인형의 무리를 뚫고 나갔다. 화살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야말로 검은 재밖에 남지 않았다.

“하아…!”

큰 힘을 소진한 신라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침을 꿀꺽 삼킨 화비는 우선의 인형을 손에 쥔 채 화살이 지나간 자리를 무작정 달렸다. 인간의 몸으로는 속도가 더디다고 판단됐는지 여우귀의 모습으로 돌아와 인형을 입에 물고 쏜살같이 달렸다.

- 여우 녀석이 도망친다!

- 어서 붙잡아서 죽이자!

불화살에 놀랐던 저주 인형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공격의 태세를 취했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무기들을 겨우겨우 피해내던 화비는,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끼고 허공으로 높이 날아올라 우선의 인형을 꼬리로 쳐냈다.

- 인형을 붙잡아!

- 주인님께 돌려드리자!

저주 인형들이 저마다 우선의 인형을 손에 넣기 위해 여기저기서 튀어 올랐다. 한 저주 인형의 손에 우선이 붙잡히기 전, 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검날이 놈의 몸을 두 동강 냈다.

“어딜….”

동주는 우선의 인형을 안전하게 낚아챈 다음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잘했어, 화비!”

저주 인형들을 바쁘게 피해 다니던 화비가 동주의 칭찬에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하지만 다른 쪽은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신라의 지척으로 수많은 저주 인형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 소문으로만 듣던 귀력의 화수분이군….

- 내가 먼저 먹게 해줘….

- 내가 먼저… 한 입만!

신라는 입술을 꾹 깨문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신라, 도망쳐!”

혜령이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신라는 포기하고 두 눈을 감았다.

“제길-!”

나무 기둥에 미끄러져 앉은 건우가 분함에 소리쳤을 때, 한 남자가 조용히 그를 지나쳐 평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스읍, 숨을 들이쉰 다음 눈을 부릅뜨며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쳤다.

슈 아 아 악 -- !

신후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칼바람이 눈 깜짝할 새에 평야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가 적이라고 판단한 존재는 어느 하나 그 칼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

- 키아악-!

- 키이익…!

- 끄아악!

저주 인형들이 칼바람에 베여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들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종이짝처럼 찢겨 먼지로 변해버렸다. 허공을 가득 메우며 흩날리는 검은 재들이 마치 검은 나비처럼 보이는 착시를 일으켰다.

“……”

신라는 현실감 없는 그 광경을 멍하니 눈에 담았다.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재가 춤을 추고 있는 사이로 어둠과 어울리는 남자가 달빛을 받으며 걸어왔다. 그는 신라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녀의 턱을 쥐고 안색을 살폈다.

방금 전 지옥을 방불케 했던 상황과 너무도 대비되는 광경에 조교들은 혀를 내둘렀다.

“이 타이밍, 어째 노리신 것 같은데….”

동주의 중얼거림에 혜령이 웃으며 동의했다.

“그림이네….”

그들은 환한 달빛 아래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남녀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봤다. 그밖에 얻어갈 수 있는 승리의 훈장은 없었으니까.

그때, 어디선가 요란하게 쇠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조교들이 달려가 보니, 숨어 있던 저주 인형 하나가 우선의 몸이 눕혀져 있는 승합차의 액셀을 밟아 절벽 아래 강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미 차의 반이 기울어 있는 것을 보고 다들 경악했다.

- 차동주!

우선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동주는 서둘러 흙바닥에 ‘解’를 적고 봉제 인형을 그 위에 내려놨다. 검으로 글자를 내리찍자, 인형에 갇혀 있던 우선의 혼이 빠져나왔다.

첨벙 - !

그와 동시에 승합차가 강물에 빠지는 소리가 났다.

“민우선!”

그들은 일제히 절벽 쪽으로 달려갔다. 승합차가 빠른 속도로 강물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돼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우선의 능력이 주위의 물을 모두 증발시켜버린 것이다.

강물이 바닥을 보이고서야, 차 문이 열리고 우선이 흠뻑 젖은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절뚝이는 다리는 인형에 갇혔을 때 바늘에 여러 차례 찔렸던 탓이었다.

반가움과 안도감에 당장에 그의 이름을 외치려던 조교들은 움찔해서 입을 다물었다. 우선이 물기를 털어내지도 않은 채 운전석의 문을 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저주 인형을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 히익!

“덕분에 정신이 확 들었네? 고마워.”

우선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소름이 돋은 조교들은 알아서 뒤를 돌았다.

- 끄아아아아악…!

그 비명은 간밤에 들렸던 것 중 가장 고통스럽게 울려 퍼졌다.

인형에 갇혔던 수많은 영혼들이 연구실 사람들의 힘으로 무사히 풀려났다. 그중에는 의뢰가 들어왔던 다섯 명의 영혼도 포함돼 있었다.

수풀에 숨어 달아나던 나태귀는 화비와 건우의 소환견들에게 붙잡혀 끌려왔다. 하지만 약삭빠른 귀혼은 소녀의 몸을 버리고 금세 달아나버렸다.

나태귀가 빠져나가자마자 그 안에 존재하던 소녀의 정신이 깨어났다. 아직 어린 몸은 딱히 혼의 매개체가 없어도 빼앗기 쉬운 모양이었다. 혜령이 소녀에게 주소를 물어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물에 빠졌던 승합차는 내일 견인하기로 하고, 그들은 각자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신후는 긴장이 풀리자마자 잠에 빠져든 신라를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다. 아까 전 그녀가 불화살로 만들어낸 불길이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점점 강해지는군….’

그것이 어쩐지 달갑지만은 않게 느껴져,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월요일 아침,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동주가 가장 먼저 연구실의 불을 켰고, 그다음으로 우선이 출근 도장을 찍었다.

“어라? 웬일로 일찍 출근했어?”

농담조로 말하는 동주를 보고 우선은 허탈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다리는 괜찮아?”

“많이 나아졌어.”

출근하는 사람들마다 우선을 똑같이 놀렸다. 우선의 게을렀던 며칠간의 모습이 여간 기억에 남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민 조교, 나 좀 보지.”

신후의 부름에 우선은 이때다 싶어 교수실로 냉큼 들어갔다. 하지만 잠시 후 연구실로 돌아온 우선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져 있었다.

“우선아, 왜 그래?”

혜령의 물음에, 우선은 신후에게 선물(?) 받은 것을 모두에게 들어 보였다. 그것은 그의 영혼이 갇혀 있었던 바로 그 봉제 인형이었다.

“교수님이 친절하게도 이걸 거기에서 주워 오셨더라고. 누구든 나태해지지 않도록 이걸 연구실 벽에 걸어놓으래.”

그 말을 듣고 웃음을 끝까지 참아낸 사람은 없었다.

* * *

만신창이가 되어 갈 곳이 없어진 나태귀는 결국 비형랑의 근거지로 돌아왔다. 그녀가 저택에 다다랐을 때 강 현은 마침 서재에서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며 쉬고 있었다.

- 주, 주군….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강 현의 눈이 조용히 떠졌다.

“누구?”

- 몸… 몸을 잃었습니다. 새 몸이 필요합니다!

강 현은 무감정한 시선으로 나태귀의 몰골을 훑어봤다.

“가관이군.”

- 거의 다 해치웠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둑시니가 나타나는 바람에….

“거의 다 해치웠었다…. 결론은 한 명도 뜻대로 하지 못했다는 소리네.”

- ……

“예전에 웃기는 얘기를 하던 잡귀가 있었어. 어둑시니의 손에 죽어 미명귀로 살게 된 가엾은 자였지. 뭐랬더라…. 본인은 과정을 즐기지만, 나더러는 결과주의자라고 했던가.”

감히 비형랑에게 그런 소리를 지껄이다니. 나태귀는 그 미명귀라는 녀석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관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 시간 낭비까지 ‘과정을 즐긴다’라고 표현할 줄은 몰랐거든.”

- ……

“넌 어떻게 생각해? 네가 지금 하고 온 짓이 ‘과정’일까, ‘시간 낭비’일까?”

나태귀는 벌벌 떨다가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 그 미명귀는… 지금 어떻게….

“죽었어.”

강 현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 미소에서 다른 답까지 읽어낸 나태귀는 차마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

“반응을 보니 답이 뭔지 파악한 것 같군.”

- 예, 주군….

“몸은 추후 전달할 테니 나가봐.”

나태귀가 재빨리 모습을 감췄다.

강 현은 다시 흔들의자에 몸을 한껏 기댔다.

“재미없네….”

그가 중얼거리는 사이, 문이 두드려지고 한 여인이 서재로 걸어 들어왔다. 머리부터 끝까지 값비싼 옷가지와 장신구를 휘감은 그녀의 옆에는 하마처럼 생긴 검은 요괴 한 마리가 애완동물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

“자비가 넘치시기도 하지.”

“그러려고 노력 중이지.”

“주군께선 화를 참는 모습이 가장 섹시해요.”

여인이 흔들의자에 요염하게 몸을 기댄 채 강 현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강 현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슬슬 지루해지려고 하는데.”

“안 그래도 나들이를 나가볼까 생각하고 있었죠.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여인은 쿡쿡 소리 죽여 웃었다. 검은 요괴가 거대한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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