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장. 나태(懶怠)
정체불명의 인형의 출처를 찾아내는 데는 서영의 도움이 컸다. 신라와 다섯 가구 중 하나를 다시 찾아간 그녀가 환자의 개인 컴퓨터에서 인터넷 기록을 뒤져 인형을 파는 사이트를 알아낸 것이다.
동주와 우선이 사이트에 기재된 주소지에 직접 찾아갔다. 하지만 부지 자체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고, 건진 것은 흙바닥에 떨어져 있는 봉제 인형 하나뿐이었다.
“이건 내가 보관할게.”
우선의 말에 동주는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인형과 우선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지만 별달리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쓸데없는 의심은 접기로 했다.
그들이 차를 타고 떠난 자리에, 어린 소녀 하나가 조용히 나타났다. 우선이 가져간 인형과 똑같이 생긴 인형을 품에 안은 소녀는 쿡쿡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또 예쁜 인형이 생기겠네.’
다음 날은 연구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랩 미팅 날이었다. 늘 지각하는 건우는 오늘도 눈치를 보며 강의실에 조용히 착석했다. 혜령이 빔프로젝터 앞에서 발표를 하는 중이었다.
“어라? 랩장 어디 있어?”
건우가 옆자리에 있는 동주에게 조용히 물었다.
“전화해 보니까 늦잠 잤대요.”
“뭐?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혜령의 발표가 끝날 무렵에야 강의실 문이 열리고 우선이 들어왔다. 그는 신후를 향해 작게 고개 숙여 늦은 것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하품을 길게 하며 동주의 오른편 자리에 앉았다. 동주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다음 네 차례야.”
“응?”
“발표 말이야.”
“아…. 발표 준비 안 했는데 어쩌지?”
“뭐?”
“어제 집에 들어가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잤어. 갑자기 너무 피곤하더라고.”
평소에 성실하게 잘하는 우선이기에 신후는 별말 없이 미팅을 일찍 끝마쳤다. 그런데 연구실로 돌아와서도 우선의 상태는 왠지 모르게 이상했다. 창가를 바라본 채 멍을 때리는가 하면, 질문하러 온 학부생들에게 평소보다 의욕 없는 모습으로 설명을 하고 돌려보냈다.
점심 이후에는 어디론가 사라지나 싶더니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건물 밖 벤치에 드러누워 낮잠에 빠져 있는 것을 신라가 발견했다.
“우선 선배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은가 봐요.”
근처로 다가온 동주에게 신라가 말했다. 우선의 가방까지 챙겨 나온 동주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우선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어깨를 슬슬 흔들어 깨웠다.
“우선아, 일어나. 집에 가야지.”
“응? 벌써 시간이 그렇게….”
“모르는 사람들 들러붙는 게 싫다고 물도 안 마시러 나가더니, 여기에서 사진만 백 장은 찍혔겠다.”
“끙….”
우선은 겨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가방을 건네받았다.
“선배, 괜찮아요?”
신라의 물음에 우선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전혀 괜찮은 모양새가 아닌데.’
동주는 속으로 생각하며 일단 우선을 집까지 바래다줬다.
주말이 되자 아니나 다를까 전화조차 받지 않는 우선을 보고 동주는 안 되겠다 싶어 그의 집에 찾아갔다. 도어락을 열고 들어가니,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아직 침대에 파묻혀 있는 우선의 모습이 보였다.
“민우선, 아직 자냐?”
그는 우선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우선은 미간만 찌푸릴 뿐 깨어나지 못했다.
“우선아, 일어나봐.”
“으….”
“우선아?”
통 깨어나지 못하는 우선을 보고 동주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우선의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가방 안에서 봉제 인형을 찾아 꺼냈다.
“어? 뭐야, 이거…. 원래 이런 모양이었나?”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민둥머리에 갈색 머리카락이 생겨 있는 것이다. 마치 우선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처럼. 순간 소름이 돋은 동주는 침대로 달려가 우선의 몸을 좀 더 거칠게 흔들었다.
“우선아, 정신 차려! 너 이 인형 때문에 그래?”
“…몰…라….”
“젠장!”
동주는 모두에게 급하게 연락을 넣었다. 반 시간이 채 안 돼 신후를 비롯한 연구실 사람들 모두가 우선의 집으로 모였다. 억지로 일으켜도 뺨을 때려도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우선을 보고, 신후는 봉제 인형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거기에서는 아무 수상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요.”
동주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건우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원거리 저주 중에, 상대방의 상징을 담은 저주 인형을 훼손시켜서 상처 입히는 금지된 주술이 있지. 그런 원리 같은데.”
신후가 그 말을 받았다.
“이 인형은 전달체일 뿐이야. 본체는 범인이 가지고, 전달체를 통해 상대방의 혼을 차근차근 빼내는 거지.”
“그럼, 우선이의 혼이 벌써 범인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말씀이세요?”
동주가 참담한 표정으로 묻자, 신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이었으면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식물인간처럼 변해버렸겠지만, 민 조교의 경우에는 다르지.”
“우리가 그 기운을 추적할 수 있으니까요.”
동주는 주먹을 꽉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우선의 혼을 구해내고 범인을 묵사발 내기 위해서.
* * *
“생각했던 대로 예쁘구나.”
소녀는 인형으로 가득한 방 안에 앉아 작은 인형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빗질했다. 갈색 머리칼을 가진 인형은 소녀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역부족이었다.
“내가 미끼로 보낸 인형은 인간의 ‘의지’를 먹는 아이야. 그렇게 천천히 영혼을 갉아먹어서 모든 의지를 ‘무(無)’로 만들어버리지.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나중에는 숨까지 쉬기 싫어져. 그 사이 영혼은 조금씩 이 쌍둥이 인형 쪽으로 넘어오게 돼. 네가 방심했던 게 아니니 자책할 거 없어.”
우선의 영혼이 든 인형이 버둥거리다 발로 소녀의 손등을 찼다.
“아야! 그러면 못 써. 역시 보통 혼이 아니라서 인형에 갇혔어도 힘이 세구나? 하지만 소용없어. 그 안에 들어 있으면 아무런 능력도 쓸 수 없거든.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되는지 미리 알려줘야겠구나?”
소녀가 우선이 갇힌 인형을 바닥에 짓누른 다음, 바늘을 꺼내 다리를 찔렀다.
- !!!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른 인형이 사지를 바르르 떨며 잠잠해졌다.
“고통스럽지? 또 나에게 거역하거나 도망치려고 하면 다리 한 짝 정도는 떼어버릴 수 있으니 명심해.”
- ……
“착하지.”
소녀는 그를 책상다리에 노끈으로 칭칭 감아놓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에서 나섰다.
‘곤란하게 됐네….’
인형의 고개가 힘없이 기울었다.
방 안 곳곳에 매달려 있는 다른 인형들에는 수많은 혼이 갇혀 있었다. 온통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들로 가득했다. 빨리 연구실 사람들이 이곳이 어디인지 찾아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 * *
건우의 소환견(犬)들이 신라의 능력을 통해 짙어진 우선의 냄새를 맡고 그를 찾아 나섰다. 한시라도 빨리 찾는 것이 중요했기에, 능력의 한계치까지 소환견들을 소환한 건우는 기진맥진해져 그대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해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소환견 한 마리가 인형의 집을 찾아냈다. 신호가 오자마자 동주가 운전하는 승합차가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조수석에는 신후가 탔고, 뒷좌석은 조교들과 신라가 자리를 채웠다. 화비가 가장 뒷자리에서 의식 없는 우선의 몸을 안전하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여기야.”
동주는 한적한 근교 마을에 승합차를 조용히 세웠다. 소환견들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새하얀 2층짜리 저택이었다.
“죄 없는 영혼들이 바글바글한 게 여기까지 느껴지네.”
화비가 중얼거리며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힘을 소진한 건우는 우선의 몸을 보호할 겸 승합차에 남기로 했다.
“저희가 먼저 들어갈 테니, 교수님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바깥을 지켜주세요.”
동주의 말에 신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라도 그의 곁에 남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저택에 잠입하는 것은 동주와 혜령, 화비가 됐다. 그들은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저택의 문을 통해 들어갔다.
1층은 조명 없이 새까맸다. 그나마 2층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덕에 시야가 확보되고 있었다. 가장 뒤에서 걸어오던 화비가 무언가를 밟고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윽, 뭐지?”
발에 걸리는 것을 붙잡아 눈앞으로 가져온 화비는,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기괴하게 생긴 인형의 얼굴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그 인형을 내던졌다. 벽에 부딪힌 인형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키기긱, 왜 던지고 그래!
- 침입자다! 침입자다-!
빛이 닿지 않는 칠흑 같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인형들이 절뚝거리며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귀기가 기분 나쁘게 일렁거리는 것이, 인형들 안에 갇힌 것은 인간이 아닌 귀신의 혼이 틀림없었다.
“역겨운걸.”
혜령이 먼저 활을 들어 전투태세를 취했다. 화살이 갈래머리 인형의 심장을 뚫고 지나간 것을 신호로, 모든 인형들이 그들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이것들이 귀찮게!”
동주는 몸에 달라붙는 인형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혔다. 실밥이 터지고 눈알이 날아가도 저주 인형들은 끈질기게 들러붙어 그들이 움직임을 방해했다. 혜령도 얼굴에 붙은 인형 때문에 활을 놓치고 말았다.
“허억….”
그때 그들이 동시에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갑자기 모든 의지를 잃은 것처럼 축 늘어져 버린 사지는 다시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환영해, 예쁜이들.”
사람 인영 하나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 인형들을 조종하는 자가 분명했다. 동주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어린 소녀를 눈에 담았다. 소녀의 손에는 우선을 닮은 인형이 들려 있었다.
“우…선아!”
“친구들이 찾아왔네? 인사해.”
소녀가 우선이 갇힌 인형의 머리를 억지로 숙이게 했다.
“이런, 말 안 들으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날카로운 바늘이 아까 찔렀던 다리를 또 한 번 뚫었다. 인형의 몸이 고통에 버둥거렸다. 그 시각 승합차에 태워져 있던 우선의 같은 쪽 다리도 함께 움찔거렸다.
“그만두지 못해!?”
동주가 고함을 쳤다. 귀를 틀어막으며 인상을 찌푸린 소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인간들이 싫어. 비형랑은 인간들이 멋대로 구는 걸 구경하기를 좋아하지만, 나는 반대라고. 다들 내 인형 속에 갇혀서 조용히 입 닥치고 노리개로 살아야 해.”
소녀가 손을 뻗자, 동주와 혜령의 몸이 아예 바닥으로 쓰러져버렸다.
소녀의 정체는 나태귀(懶怠鬼)였다. 딱히 인형을 매개체로 주술을 쓰지 않아도, 인간의 의지쯤 한순간에 묵살시켜 버릴 정도의 힘이 있는.
“그럼, 슬슬 너희들도 내 컬렉션에 담아볼까?”
나태귀가 새 인형들을 꺼내며 쓰러진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한 발자국 내디딘 바닥에서 파란 불씨가 피어나더니, 곧 커다란 불로 바뀌었다.
“꺅-!”
당황한 나태귀가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한 놈이 없잖아!’
인형들 사이에 숨어 있던 여우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주술이 요괴에게는 통하지 않나 봐?”
어느새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요괴로 돌아간 화비는, 여우 불을 써서 나태귀의 머리칼부터 태우기 시작했다.
“쳇!”
귀신 들린 인형들을 시켜 화비의 시야를 교란시킨 나태귀는 그 틈을 타 창문을 넘어 달아났다.
“어딜 도망쳐!”
그때 저주 인형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동주와 혜령의 몸을 짊어지고 저택 바깥으로 달아났다. 혀를 찬 화비는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휘익-!”
커다란 휘파람 소리를 듣고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신후와 신라가 달려왔다.
“범인은 나태귀야! 지금 뒤뜰 쪽으로 도망치고 있으니까 내가 쫓아갈게!”
“같이 가!”
신라가 화비와 함께 나태귀를 쫓았고, 신후는 동주와 혜령을 데려가는 인형들을 쫓았다. 저주 인형들은 킬킬거리며 동주와 혜령의 몸을 강가에 던져 넣기 위해 자갈밭을 달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시야가 깜깜해져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둠의 주인은 그 장막을 가볍게 걷어내며 그들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지금 알아서 도망치는 놈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주지.”
- 어둑시니다!
- 잔혹한 어둠의 자식이다!
몇몇 인형들이 혼비백산해서 달아났다. 신후는 입꼬리를 당기며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러자 달아나던 귀혼들이 검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모습을 감췄다.
“고통 없이 보내줬으니 자비를 베푼 거지.”
나머지 저주 인형들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하나둘 동주와 혜령에게서 떨어져 뒷걸음질을 쳤다.
- 사, 살려줘…!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저주 인형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신후는, 허공에 펼친 손을 한순간 움켜쥐었다. 그러자 바닥에 드리워졌던 인형의 그림자가 갈기갈기 찢어지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본보기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