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장. 인형
“음….”
숙취라는 걸 느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신라는 까마득한 신입생 시절을 되짚어 보며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듯 환한 햇살이 커튼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어?’
그런데 커튼의 색깔이 퍽 낯설었다. 더불어 누워 있는 베개의 느낌도, 천이라기보다 사람의 팔 같은….
‘뭐야!’
입을 틀어막은 그녀는 튕겨 오르듯이 상체를 일으켰다. 바로 옆에 상의를 탈의한 채 곤히 잠에 빠져 있는 남자가 있었다.
‘미쳤어, 유신라….’
이곳은 다름 아닌 신후의 집이었다.
“하아….”
“누가 보면 범죄라도 저지른 줄 알겠어.”
한껏 잠긴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신라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녀는 차마 신후의 얼굴을 돌아보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자초지종이요.”
“필름이 끊겼어?”
어제 콘테스트가 끝나고 고고학방 사람들끼리 뒤풀이를 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술자리에는 축제 준비에 큰 도움이 된 예진구와 서영도 함께 자리했다.
‘오랜만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술잔을 기울여서 그런지 술이 달게 느껴지긴 했어….’
그저께까지 학교에 어떤 위험한 인물이 다녀갔는지도 망각한 채 말이다. 신라는 다시 자괴감 어린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팔베개를 한 채 또렷해진 눈으로 신라의 의식의 흐름을 구경하던 신후가 목 뒤로 웃음을 삼켰다.
“위험한 시기에 방심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책하지 마. 그만큼 네가 우리를 믿었다는 뜻이니까.”
“…이 침대에서 널브러져 자고 있는 상황은요?”
“그나마 널 챙겨줄 수 있었던 박 조교도 적잖이 취해버렸거든.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고 다들 보내버렸으니, 혼자 사는 집에 그대로 두고 나올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자는 사이 속옷만 남기고 벗겨버리는 남자 집에서 안전하게 자고 있었던 거네요.”
“물론 어디보다도 안전했지.”
이미 벌어진 상황을 곱씹기보다 빨리 잊어버리기를 선택한 신라는, 고개를 저으며 침대에서 내려갔다. 하지만 한 걸음도 채 떼기 전에 손이 붙잡혀 다시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정확히는 신후의 품에 코를 박았다. 막 잠에서 깬 남자에게서 나는 짙은 체향이 그대로 느껴졌다.
“호랑이 굴에서 뻔뻔하게 걸어 나가려고 하는 토끼라….”
“숙취에 해로울 게 뻔하니까 도망치는 건데요.”
“내가 너에게 해로울 리가.”
“충분히 정신 건강에 해롭거든요.”
무방비한 근육질의 나체와 졸음에 젖은 몽롱한 눈빛은 왠지 나쁜 마음이 들게 했다. 신라는 붉어지는 뺨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상체를 일으켜 앉은 신후가 그녀의 고개를 다시 돌렸다.
“요력 안 쓸 테니까 이쪽 좀 봐.”
“…요력이 없어도 충분히 야해요, 당신.”
“숙취만 깨워줄게.”
“어떻게요?”
특별한 방법이 있나 싶어 호기심에 시선을 든 신라는, 본인의 순진함에 고개를 저었다. 숙취 해소 음료를 입에 머금은 신후가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적절한 각도로 고개를 틀어 입을 맞췄다. 입술을 통해 달짝지근한 음료가 넘어갔다. 신라는 그의 손에 턱이 붙잡힌 채 꼼짝없이 그것을 받아마셔야 했다.
“옛날 의원님들은 환자들을 이렇게 치료했나요?”
“내가 의원은 아니었지만, 아프다며 약을 먹여 달라고 조르는 뭇 여인네들이 있긴 있었지.”
“그래서 이렇게 해줬다는 소리예요?”
“어둑시니가 이토록 충성하는 건 단 한 여자뿐이야.”
“어떡하지, 조상님들 질투 다 받게 생겨서….”
나지막이 웃은 신후가 이번에는 아무것도 머금지 않은 입술로 신라에게 입 맞췄다. 신라는 처음에는 작게 찡그렸다가, 이윽고 단맛이 나는 그의 혀를 얌전히 받아들였다. 간간이 고개의 각도를 틀기 위해 입술을 뗄 때마다 오롯이 키스에만 집중하고 있는 섹시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이 세상에 여인은 눈앞에 있는 한 사람뿐이라는 듯, 그 어떤 다른 것도 안중에 없어 보였다.
입술 사이에 생겨난 은빛 실까지 머금은 신후는 고개를 떼지 않고 물었다.
“이제 괜찮아?”
“좀 어지러운 정도예요.”
“그래서 혼자 씻을 수 있겠어?”
“씻는 거야…”
신후는 대답이 느린 신라를 불시에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뭐 하는 거예요!”
“아직 어지럽다고 하니 씻겨주려고.”
“그게 무슨!”
신후는 함께 욕조로 들어가 샤워기로 따뜻한 물을 틀었다.
“앗!”
속옷이 젖어 들어가자 신라가 뒤쪽으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신후가 막아서고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 젖잖아요…!”
“괜찮아.”
신후는 신라의 브래지어부터 풀어주었다. 그녀가 부끄러움에 움츠러들며 가슴을 가리자, 단숨에 아래 속옷도 벗겨냈다.
“변태….”
“어디부터 닦아줄까. 말만 해.”
“필요 없…”
신후는 고개를 돌리며 소리치려는 신라의 턱을 쥐고 불시에 입을 맞춰버렸다.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기도 전에 입 안에서 미끄러지는 그의 혀 때문에 야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음…”
신후는 잠시 비틀거린 그녀를 똑바로 세워주었다. 따뜻한 물에 젖고 있는 그녀의 젖가슴부터 부드럽게 굴리듯 매만지고, 배꼽을 쓸며 내려가 음부를 찬찬히 지분거렸다.
“아아…!”
신라가 신후의 입술 안으로 신음을 흘렸다.
“여기가 기분 좋아?”
“아…읏…. 이상해….”
“이상하다는 게 뭘까. 좀 더 깨끗이 해줘야겠네.”
음부를 매만지는 손길이 집요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다시 점차 빨라지는 완급에 신라는 정신마저 몽롱해졌다.
“하읏… 그만…. 내가 닦을…”
“뜨거운 게 계속 흐르는데, 혼자 닦을 수 있겠어? 이렇게 혼자 서 있지도 못하면서.”
한 걸음 물러서자 기대고 있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그녀를 낚아챈 신후는 이제 유두를 혀로 유린하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좀 더 깊은 내부로 비집고 들어갔다.
“흣…!”
내부를 부드럽게 휘젓는 그의 긴 손가락에 신라가 몸서리쳤다. 쿡쿡 안쪽을 쑤실 때마다 배의 근육이 제멋대로 수축했다.
“그, 흑, 그만…!”
“유신라 양. 내 손을 이렇게 더럽히고 있으면서, 씻는 걸 그만두겠다고?”
“읏….”
정말로 샤워기 물보다 더 뜨거운 액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신라는 수치심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차, 차라리… 어서….”
“뭐라고?”
“넣어 줘…. 얼른….”
“무엇을?”
신라는 짓궂게 질문하는 신후에게 원망스럽게 소리쳤다.
“넣어달라고요, 당장! 교수님 걸!”
신후는 대답이 퍽 마음에 든다는 듯이 빙긋이 웃었다. 젖은 머리칼을 이마 위로 떨어뜨린 채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색정의 표본이었다.
쑤욱, 젖어 있는 입구로 그의 것이 미끄러져 들어와 꽉 들어찼다.
“하으윽…!”
신라는 환희에 차 고개를 내저었다. 만족감을 누릴 새도 없이 그가 성난 짐승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크기가 안쪽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간질거리던 감각은 온데간데없이, 거대한 욕정이 휘몰아쳤다. 온몸이 꿰뚫릴 것만 같은 강렬한 쾌감에 신라는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후으…. 신라….”
신후도 쾌감에 정신을 못 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라가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고 그녀가 느끼는 곳을 집중적으로 찔러 올렸다. 곧 울음과 함께 절정을 맞이한 신라가 파들파들 떨며 무너져내렸다.
신후는 그녀를 안아 들고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깨끗이 씻겨주겠다는 말은 거짓이었던 양, 그녀의 몸 곳곳을 그의 타액으로 묻혔다.
“거짓말쟁이….”
머리칼을 움켜쥐고 흔드는 신라가 귀여워, 신후는 가만히 두었다. 대신 두 번째 정사를 시작했다. 살짝 부어 있지만, 이번에도 그녀의 입구는 기꺼이 그의 남근을 받아들였다. 애액으로 미끄러우면서도 부은 탓에 너비는 더 좁아졌다. 신후는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쾌감을 표출했다. 침대가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삐걱삐걱 흔들렸다.
“흐읍….”
또 한 차례 오르가슴에 접어들었는지 신라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침대보를 구겨 쥐었다. 비틀리는 나신이 꽤 색정적이라, 신후는 행위 도중 그녀의 젖은 가슴을 핥고 빨아당겨 자국을 남겼다.
신후는 신라를 번쩍 들어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 보며 위쪽으로 허벅지를 쳐올렸다. 더 깊은 곳을 찔린 신라가 압박감에 눈을 크게 뜨며 끊어지는 소리를 냈다. 거대한 절정의 고지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급하게 자세를 바꾸려던 그녀는 한 박자 늦고 말았다. 곧 눈앞이 새하얘지는 절정을 맞이해 그대로 경련에 접어들고 말았다.
“아으으….”
그녀는 신후를 꽉 끌어안으며 쾌감을 공유했다. 발가락 끝까지 떨리지 않는 곳이 없는 경련은 꽤 오래 지속됐다. 신후가 걱정스러움에 동작을 멈췄을 정도였다.
“어제 운 거 알아?”
그 말을 듣고 신라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제가…요?”
“그래. 한 명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서럽게 펑펑. 네가 우는 걸 보고 박 조교가 감동해서 술 조절을 못 한 거야.”
“……”
왠지 모르게 미안해진 신라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제 술버릇이 그런 줄 몰랐네요….”
“필름이 끊기는 게 더 문제야. 앞으로는 술자리에 되도록 빠지도록 해.”
“어차피 연구실 밖에서 마실 일도 없어요.”
“연구실 사람들끼리도, 나 없는 데선 안 돼.”
“네?”
신후는 혜령이 감동한 나머지 신라를 덮치려고까지 했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조금 진정된 그녀의 안에서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장감에 살짝 몸을 굳힌 신라는 금방 두 눈의 힘을 풀었다. 아직 그의 크기가 전혀 줄지 않은 것에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신후는 신라를 눕혀 양 허벅지를 벌리게 만들고, 신중하게 그녀가 느끼는 지점을 찾아 공략했다. 함께 절정을 맞을 계획이었다.
“으읏….”
그녀가 손가락을 깨물며 신음을 참으려 하자, 고개를 숙여 대신 본인의 입술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서서히 삽입질의 속도를 빠르게 했다.
“흐윽! 흣! 윽!”
“후으…. 같이 가자.”
쑥, 쑥,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감각이 점차 예민하게 느껴져, 신라는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강하게 조였다. 그의 허벅지와 부딪히는 엉덩이는 반대로 얼얼함에 점점 감각을 잃었다.
“가, 으, 갈 것 같아!”
“조금만 참아.”
“안 돼!”
신후는 미간을 구기며 삽입질의 속도를 더했다.
푹! 마지막으로 강하게 꽂아 넣었을 때, 신라가 숨을 헐떡이며 허벅지 안쪽을 바르르 떨었다. 신후는 가까스로 빠져나와 그녀의 배꼽 위로 사정액을 쏟아냈다.
“허억, 허억….”
“하아….”
신후는 나른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신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하도 깨물어 부르터 있는 입술을 핥아 간지럽혔다.
* * *
신라와 학교로 향하며, 신후는 어제 예진구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먼저 귀를 의심하게 만든 것은 강 현에게서도 운명의 굴레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미 비형랑임을 알고 있는데도 그 과거의 굴레 또한 보이지 않는다….
- 자라경에 모습이 비치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 인간의 몸으로 환생하기 위해 귀혼을 반으로 쪼개 숨겨놓았다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귀혼 쪽은 환생한 것이 아니게 되니 자라경이 그 본모습을 모를 리가 없지요.
- 반쪽의 혼만 환생을 했다…. 그런데 환생한 인간 쪽이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난 혼이라는 소리인가?- 예.
멋대로 환생할 수는 있어도 운명의 굴레마저 조작할 수 있는 힘은 비형랑에게 없었을 터. 신후는 신라와 강 현 사이에 만들어져 있는 공통점에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예진구에게 또 한 가지를 물었었다.
- 유신라의 전생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어.
- 그렇습니까?
- 굴레를 찾았으니, 직접 연결 짓는 것은 불가한가?
- 흐음…. 그것이야말로 신의 영역입니다. 어쩔 도리가 없군요.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천천히 두드리며 그는 계속 생각에 잠겨있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그를 보고, 신라는 방해하지 않기 위해 창가 바깥 경치만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를 목격한 그녀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세워주세요!”
마침 대기선에 다다라 브레이크를 밟은 신후가 그녀를 돌아봤다. 이미 조수석 문을 열고 뛰쳐나간 신라가 무단횡단을 하며 건너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유신라!”
그는 혀를 차며 함께 차에서 내렸다. 신라가 본 것은 차도에 떨어져 있는 인형을 줍기 위해 보도에서 걸어 내려온 어린 여자아이였다.
“위험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덤프트럭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보지 못한 운전기사는 브레이크를 밟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와줘!’
마음속으로 외친 신라는 아이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리고 꽉 끌어안았다. 한 걸음 늦은 신후가 자리에 멈춰 서서 그들을 지켜낼 어둠의 기운을 뿜어냈다.
하지만 신라의 몸에 빙의한 귀신이 먼저였다. 아이를 껴안은 신라의 몸이 마치 누군가에게 내던져진 것처럼 보도 쪽으로 날아가 굴렀다. 덤프트럭은 뒤늦게야 상황을 파악하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아, 하아….”
순간 귀력을 소진한 신라가 숨을 헐떡이며 품 안에 안겨 있는 여자아이를 내려다봤다.
“괜…찮니?”
“언니, 고마워요….”
초등학교는 들어갔나 싶은 어린 소녀였다. 빠르게 길을 건너온 신후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신라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안 다쳤어?”
“네….”
잔소리를 퍼부으려던 신후는 가장 놀란 게 본인일 걸 잘 알기에 한숨으로 답답한 마음을 억눌렀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다시 차로 돌아갔다.
“앞으로는 나부터 불러. 저 정도는 내 힘으로 해결 가능하니까.”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몸이 반사적으로….”
“아침부터 스펙타클하군….”
차가 출발하기 전, 신라는 건너편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소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소녀도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소녀가 껴안고 있는 인형의 팔다리가 만지지 않았는데도 움찔움찔 움직였다. 소녀는 고개를 숙여 인형의 머리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멋대로 달아나지 말라고 했지…. 하마터면 제대로 인사하기 전에 들킬 뻔했잖아.”
쿡쿡… 웃음 흘린 소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보도를 걸었다.
축제가 끝나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고고학방의 존재감이 사학과를 넘어서 캠퍼스 전체에까지 퍼졌다는 것이다. 다들 축제 때 본 미남 미녀들이 실존하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사학과 건물을 어슬렁거렸다. 일부 학생들은 간이 크게 직접 고고학방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간식까지 건네주고 갔다.
“목말라….”
우선이 책상에 엎드린 채 중얼거렸다.
“물 없어?”
옆자리에 있는 동주가 물으며 정수기 쪽을 확인했다. 아침에 갈아놓은 물이 점심때도 안 지났는데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왔다갔다거려서…. 긴장돼서 능력이 계속 새어 나왔나 봐.”
“자판기에 가서 뽑아올까?”
“나갈 때마다 대여섯 명씩 들러붙어서 못 나가겠어….”
“하아. 유명인의 삶은 귀찮구만.”
그때 수업을 마친 신라가 연구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서너 개의 생수병을 보고 우선의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신라!”
“왠지 다들 숨어계실 것 같아서, 제가 물 좀 공수해 왔어요.”
“고마워.”
갈증에 허덕이던 우선은 생수병 하나를 통째로 비웠다. 핸드폰을 심각하게 들여다보던 건우가 갑작스레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솟구쳤다.
“도대체 다들 내 번호를 어떻게 안 거야! 그만 문자 보내라고!”
“오~ 조건우, 인기남인데?”
혜령이 회전의자에서 반 바퀴 돌며 휘파람을 불었다. 건우는 그 말에 더 혈압이 올라 모두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반이 넘게 민우선이나 차동주 전화번호 알려달라는 내용이거든? 박혜령 너도 포함해서?”
“저런~”
“다들 날 물로 보는 거야, 뭐야? 도깨비방망이로 확, 씨!”
교수실 문이 열리면서 신후가 서류를 손에 든 채 걸어 들어왔다. 업무적인 얘기일 거라고 짐작한 모두가 자발적으로 소파 쪽으로 모였다.
“오전부터 소란스럽군.”
“바깥 상황 아시잖아요.”
건우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저런 관심은 곧 잠잠해져. 저 틈에 적이 껴 있을 수 있으니까 더 긴장하고 경계해.”
“…예.”
“의뢰가 하나 들어왔어.”
그가 모두가 볼 수 있는 가운데에 내려놓은 것은 병원의 진료 기록 차트 같았다. 대여섯 명의 환자들을 관찰한 내용은 모두 비슷했다. 동주가 그 진료 내용을 대표로 소리 내어 읽었다.
“증상 초기, 심각한 무기력증이 찾아와 학교나 직장에 빈번히 빠지는 사태가 발생, 좀 더 진행되면 일상생활마저 혼자 힘으로 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름…. 호르몬 수치나 CT 결과상으로는 문제없음. 증상 말기, 누운 채로 호흡마저 제대로 하지 않아 산소호흡기가 필요…. 끝내 의식을 잃고 식물인간과 비슷한 상태가 됨.”
한 번에 감이 오지 않는지 다들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후가 차트 외에 있는 내용들을 덧붙였다.
“참고로 환자들의 공통점은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거야.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예쁘장하다’라는 말에 다들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안 그래도 외모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때에 그런 말을 들으니 위기감이 더 와닿는 느낌이었다.
“공통점을 더 찾아야겠네요. 단서가 너무 적어요. 사는 곳도 너무 제각각이고요.”
우선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먼저 환자가 발생한 다섯 가구에 각자 흩어져 방문해서 단서를 모으기로 했다. 편의상 병원에서 파견된 인력이라고 밝힌 그들은 환자들의 방 구석구석을 살피고 사진을 찍었다. 한동안 연구실에 두문불출했던 화비도 나타나 그들을 도왔다.
단체 메신저 창에 환자들 방의 사진이 하나둘 올라왔다.
「조건우 : 귀기는 안 느껴져. 별거 없네.」
「박혜령 : 이쪽도 마찬가지야.」
「차동주 : 이쪽도요.」
「화비 : 나도! 그런데 얘는 인형 광인가 봐. 방에 한가득 인형이네.」
「유신라 : 어, 이쪽도. 인형이 꽤 많아요.」
오후, 네 시쯤에야 모두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들은 각자 찍은 사진들을 현상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다녀온 집에 특이한 디자인의 인형이 있었는데, 다른 방에도 하나둘씩 있는 것 같아요.”
“어디?”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손바닥만 한 봉제 인형은 작은 단추와 실로 눈코입이 만들어져 있는 특이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다. 유명 브랜드의 인형이 아님에도 다섯 가구 모두에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공통점이라고 부를 만했다.
“느낌이 쎄한데.”
건우의 중얼거림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교수실에서 나와 지켜보고 있던 신후가 덧붙였다.
“어딘가에서 기분 나쁜 인형 놀이를 하고 있는 모양이군.”
홀로 소름이 돋은 화비는 양팔을 감싸 쥐며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