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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장. 가을 축제_下 (62/126)

61장. 가을 축제_下

“병욱아, 제발 정신 차려…!”

무시무시한 힘으로 소파에 짓누르는 병욱을 떨쳐내지 못한 신라는 결국 귀신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변한 순간, 연구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가 병욱의 목덜미를 붙잡아 뒤쪽으로 내동댕이쳤다.

“윽!”

싸늘하게 표정을 굳힌 신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주먹을 꽉 움켜쥐며 병욱을 향해 걸어갔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신라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안 돼요!”

“놔. 안 죽여.”

“반 죽여 놓을 것 같아서 그래요!”

“……”

신라는 정곡을 찔린 그가 망설이는 틈을 타 쓰러져 있는 병욱에게 먼저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등을 세게 쳐 구슬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귀력의 매개체가 몸에서 빠져나오자, 병욱의 눈동자 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허억, 허억…. 뭐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이 한 짓을 되짚어 보던 병욱은, 눈앞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걸어온 한 교수가 살기마저 서린 눈빛으로 자신을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교…수님?”

신후는 그대로 발을 들어 올렸다. 병욱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지만, 그가 지르밟은 것은 아직 잡귀가 들어 있던 구슬이었다.

키기긱-

잡귀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져버렸다.

“내가…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허망하게 중얼거린 병욱은 신라의 다리를 애타게 붙들었다.

“신라… 신라, 내가 미안해. 잠깐 뭐에 씌었었나 봐!”

‘응, 맞아….’

신라는 차마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고 안쓰럽게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병욱은 자괴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눈물마저 쏟아냈다. 한숨을 내쉰 신후가 병욱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누가 주는 건 함부로 받아먹지 마.”

“흑, 예…?”

병욱은 눈물을 훔치며 기억을 떠올렸다. 시음 행사라고 누군가 건네준 음료수를 의심도 없이 들이켰던 것 같기도 했다.

“이번에는 실수로 봐줄 테지만, 다음은 없어. 명심해.”

“네….”

신후는 신라의 손을 붙잡아 연구실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어디서부터 얘기할지 고민했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형랑이 오늘 또 다녀갔고, 저는 이 위태로운 시기에 멋대로 혼자 행동하다가 또 위기를 맞은 거네요. 그렇죠?”

“…얄밉게 먼저 정답을 말하지 마.”

“죄송해요. 방심했나 봐요.”

“하아….”

신후는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을 한숨으로 토해내며 신라의 어깨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안한 마음이 든 그녀는 그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이번에도 강 현이 그런 걸까.’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그녀는 스스로 고개를 저어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 움직임을 느낀 신후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해?”

“강 현이 그랬을까, 싶어서요.”

“그놈을 떨어뜨려 생각하지 마. 그 패거리가 하는 짓이 모두 그놈의 의도이니까.”

“하지만….”

허리를 세운 신후가 표정 없는 얼굴로 신라를 응시했다. 질책의 의도가 담긴 시선이었다. 그에 고개를 숙인 신라가 힘없이 말했다.

“…맞아요. 떨어뜨려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네요.”

“그런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널 제때 지켜주지 못하는 내 탓을 해. 그편이 마음 편하겠어.”

“……”

동시에 기분이 가라앉은 두 사람은 천천히 부스로 돌아왔다. 우선과 동주가 테이블에 앉아 손님을 받으니 유독 여학생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대박, 한 교수님이야!”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부스를 지키고 있던 준비위원회가 신후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사학과 학부생인 그녀들은 손에 전단지 하나를 쥔 채 신후에게 달려왔다.

“교수님, 교수님! 여기 나가주시면 안 돼요? 1등 하는 학과 건물에 휴게실 만들어 준대요!”

“제발요~!”

대충 훑어보니 캠퍼스 최고의 킹카 퀸카를 뽑는 콘테스트 같았다. 제목은 ‘한국대 비주얼 콘테스트’. 교수부터 조교, 학부생까지 참가 자격에는 제한이 없었다.

신후는 뒤쪽에 서 있는 신라를 잠시 쳐다봤다. 열심히 준비한 축제 당일 한껏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에 퍽 신경이 쓰였다.

‘조금 혼을 낸 것도 후회스럽게 만드는군….’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아직까지 자신의 앞에서 눈빛을 빛내고 있는 사학과 여학생들에게 답했다.

“언제 하는 거지?”

“내일 밤이요!”

그가 관심을 보이자 조교들이 눈썹을 비틀며 설마 설마 하는 표정을 내지었다. 신후는 일부러 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가 보지, 뭔지는 자세히 몰라도.”

잡념에서 헤어 나온 신라가 귀를 의심하며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어디에 나가신다고요?”

“비주얼 콘테스트.”

신라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래, 사람의 관심을 먹고 사는 것이 어둑시니의 천성이니, 그런 콘테스트가 어쩌면 한신후의 성미에 맞을지도 모른다고.

그 생각을 그대로 읽어낸 신후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그는 신라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틀렸어.”

“네?”

“너 때문에 나가는 거야. 그러니까 기분 풀어.”

“……”

그제야 그의 의도를 이해한 신라는 작게 웃고 말았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난 나가서 서 있기만 할 거야.”

“인터뷰 같은 건요?”

“저 녀석들이 알아서 하겠지.”

신후는 조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에 불길함을 느낀 그들이 표정을 찌푸렸다. 동주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 그 말씀은 설마 저희더러….”

“내 밑으로는 다 참가해.”

“……”

비형랑이 다녀간 뒤로 무겁던 분위기가 덕분에 다른 의미로 전환됐다. 졸지에 부스를 넘어서 모든 캠퍼스 사람들에게 얼굴이 팔리게 된 우선은 웃는 얼굴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다.

콘테스트 신청서의 양식은 별거 없었다. 핸드폰 문자로 이름, 성별, 나이, 학과, 그리고 본인의 사진만 보내면 끝이었다. 마치 자수하는 범인처럼 죽상이 돼서 콘테스트 진행자에게 문자를 보내는 우선과 동주, 건우를 보고 혜령은 박장대소했다.

하지만 그녀가 방심한 틈을 타 건우가 사칭해서 문자를 한 통 더 보냈다. 참가 신청이 완료됐다는 답장을 받고서야 그 사실을 알아챈 혜령이 건우를 죽일 것처럼 쫓아다녔다.

“메이크업은 저한테 맡겨주세요!”

소식을 듣고 연구실로 찾아온 서영이 가방만 한 파우치를 풀어놨다. 첫 타자로 혜령이 메이크업을 받았다. 연구실 소파에 앉아 가만히 서영의 손길을 느끼고 있던 혜령이 장난스레 물었다.

“어때, 예뻐? 반하겠어?”

“너무 예뻐요, 조교님~”

“그래? 나 같은 얼굴이 서영이 취향?”

“네?”

서영이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자, 지켜보던 신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건우가 볼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신라는 콘테스트에 신청 안…”

“건우 형.”

“왜!”

말을 끊는 우선을 못마땅하게 돌아본 건우는, 그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신후를 발견하고 입을 쏙 다물었다. 그의 싸늘한 시선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신후를 제외한 모든 조교가 메이크업을 받았다. 마지막 타자는 동주였다. 그가 코앞에 앉아 눈을 감는 것을 보고 서영은 그만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말았다.

“어서 해줘. 난 우선이보다만 잘생기면 돼.”

“서, 선배도 잘생겼는데요…. 몸도 좋으시고.”

“하하. 말만으로도 고마워.”

동주를 제외한 모두가 상황을 눈치채고 서로 은근슬쩍 시선을 교환했다. 특히 혜령은 서영이 귀엽다는 듯 쿡쿡대며 웃었다.

“청춘이다~ 차동주~”

“에?”

그 말을 듣고 눈을 뜬 동주가 아이라이너에 눈을 찔려 펄쩍 뛰어올랐다.

“끄악!”

“어, 어떡해! 죄송해요, 선배!”

“아, 아니야…. 윽….”

찔린 눈에 눈물이 잔뜩 고인 동주의 모습을 보고 결국 다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둑해진 저녁, 모두 준비를 마치고 연구실에서 몰려나갔다. 신후는 마지막으로 나가려는 신라를 붙잡아 다시 연구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왜 그러세요?”

“나도 메이크업 받아야지.”

“네? 그런데 왜….”

“너한테 받고 싶어서.”

무작정 소파에 앉는 그를 보고 신라는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저 화장에 소질 없는데….”

“몇 시간 동안 보고 배웠을 거 아니야. 대충이라도 해 줘.”

신라는 서영이 놓고 간 파우치를 열어, 그녀가 했던 대로 비슷하게 따라 했다. 쉐이딩 키트로 뚜렷한 이목구비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고, 짙은 눈썹을 정리했다. 입술에는 연한 색을 내는 립밤까지 바르니 모델을 넘어서 연예인에 버금가는 비주얼이 되어버렸다.

‘곤란하네….’

그녀는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애써 평정심을 붙잡고 있는 중이었다. 새삼 그의 외모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화장하는 내내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간질거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화장하는 부위에만 집중했다.

“…다 됐어요.”

신후는 일어나 연구실에 걸린 벽 거울로 다가가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옷에 딱히 신경 쓴 것은 아니지만, 허리까지 오는 브라운 계열 재킷에 길쭉한 다리를 부각시키는 블랙 진은 나이를 가늠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교수가 아니라 조교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감상하고 있는 신라를 눈치채고 신후는 묘하게 웃으며 그녀를 돌아봤다.

“나가지 말까?”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그는 신라의 앞으로 다시 걸어와 그녀의 손을 쥐어 들었다. 그리고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네가 내 주인이야. 난 네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결국 얼굴이 달아오르고 만 신라는 신후에게 약 오른 눈빛을 쏘았다.

“고작 학부생에게 주인이라니요. 직책을 망각하지 마세요, 교.수.님.”

“훗. 슬슬 나가볼까.”

콘테스트 참가자들은 의외로 쟁쟁한 인물들이 많았다. 신라와 서영은 함께 관중석에 앉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휴게실이 생기느냐 마느냐가 꽤 큰 이슈였기 때문에 제법 많은 관중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자기소개하는 참가자들을 보며 서영이 분한 얼굴로 외쳤다.

“연극영화과 애들이 저기 나오는 건 반칙 아니냐!”

“그러게….”

“하지만 우리 교수님과 조교님들도 꿀리지는 않으니까….”

고고학방 사람들에게 사회자의 마이크가 다다랐다. 인상을 푹 쓰고 있는 건우가 커다란 화면에 비치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봐도 억지로 끌려 나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사학과, 고고학 연구실, 스물여덟 살, 조건우.

- 대학원생이시군요?

- 교수님 때문에 다 같이 끌려 나왔습니다.

- 설마 교수님도 나오신 거예요? 여기에 도대체 누가….

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참가자들 중 교수로 보이는 사람은 도저히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화려한 차림의 혜령이 가능성 있는 인물로 지목되고 있었다. 그녀가 마이크를 빼앗아 욕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저 남자 뭐야? 우리 학교에 저런 비주얼이 있었어?”

“연극영화과 편입생 아니야? 쩐다….”

웅성거림의 주제가 점차 신후에 관한 추측들로 바뀌고 있었다. 마침 사회자의 마이크가 신후에게로 넘어왔다.

- 와아… 흠흠, 본인 소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앞서 인터뷰 당한 조교들을 훑어본 신후는,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 제 소개는 앞에서 이미 나왔습니다만.

- 예? 그, 그러면 설마 저 조교님들을 끌고 나오셨다는…

- 나 빼고 다 내려가.

증명이라도 하듯이 쾌재를 부르며 우르르 단상에서 몰려 내려가는 고고학 방 조교들이었다. 충격을 받은 관중석에서는 뒤늦게 환호가 터져 나왔다.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인터뷰는 묻히고도 남을 정도였다.

“휴게실 생기겠네….”

신라의 중얼거림에, 박장대소하던 서영이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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