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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장. 가을 축제_中 (61/126)

60장. 가을 축제_中

자연스럽게 테이블 의자에 앉은 남자를 보고 건우는 눈을 의심하며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옆에 있는 예진구는 어리둥절해서 건우의 앞에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가, 신라를 봤을 때처럼 예리한 눈빛이 되었다.

뒤늦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조교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일제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는-!”

동주가 바로 달려들려고 하는 걸 우선이 일단 막아 세웠다. 건우도 손을 들어 보이며 그들의 섣부른 행동을 막았다.

“관상을 보러 온 것뿐인데, 소란을 피울 생각은 아니죠?”

강 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펜을 쥔 건우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혜령은 예진구를 일으키고 자신이 대신 옆자리에 앉았다.

강 현의 웃음기 어린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닿아갔다.

“신라 씨를 보러 온 거지만,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이름.”

건우가 시선을 내린 채 짧게 말했다.

“얼굴을 안 보고 관상을 볼 수 있나?”

“이름!”

결국 참지 못한 건우가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부스에 줄을 서 있던 학생들이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쑥덕거리며 부스를 떠났다. 우선이 아직 어리둥절한 채 서 있는 병욱을 데리고 서둘러 부스 바깥으로 나갔다.

“강 현.”

“관상으로 뭘 보고 싶은 거지?”

“그냥, 보이는 것 전부. 네가 관상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간단하게 설명해주지. 넌 이번 생에 단명할 거야.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지은 죗값을 모두 치르고 슬퍼하는 이 하나 없는 상황 속에 외롭게 떠날 거다.”

“이번에는 영혼째로 신에게 팔아넘길 생각은 없나 보지?”

“그럴 필요 없어졌거든. 다시는 도망칠 수 없게 아예 영혼까지 소멸시킬 작정이니까.”

강 현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웃고 있기만 했다.

혜령은 테이블 아래에서 떨리는 건우의 손을 꼭 붙잡아주고 있었다. 마음만 같아선 건우에게 몹쓸 짓을 했던 이 남자를 당장 감옥에 처넣고 싶었지만, 이 남자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교수님을 불러야겠어.’

그녀는 조용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쥐었다. 하지만 액정에 손을 대기 전 갑작스런 통증이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앗!”

손을 꺼내 보니, 뼈가 어긋날 정도로 제멋대로 꼬인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동주의 눈이 뒤집히려는 찰나, 먼저 강 현의 뒤에 다가온 이가 그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나뭇조각을 들이밀었다.

“거기까지 해.”

병욱을 어딘가에 데려다 놓고 돌아온 우선이었다. 어느 때보다 살기가 서린 우선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그 나뭇조각을 강 현의 목에 박고도 남을 것 같았다.

“지금 당신을 죽여 버리고 감옥에 가도 난 아쉬울 것 없어. 어차피 영혼을 상대하는 게 우리에게 훨씬 유리하니까.”

“어둑시니가 재미있는 친구들을 동료로 모았네. 이거 부러워지려고 하는데.”

살짝 까진 목덜미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에 개의치 않은 강 현은 조교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건우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런 강 현을 주시했다. 그의 부러움은 곧 시기와 질투로 변질되고, 욕심이 되어 상대를 잡아먹어 버렸다. 본인이 가지지 못한다면 재기불능이 될 때까지 파멸시켜버리는 것을 오랜 시간 지켜봐 왔다.

“관상은 다 봤으니, 이만 조용히 꺼져주시죠.”

“새로운 친구들이 너에게 꽤나 소중한 존재가 되었나 봐. 질투 나게.”

아직 통증이 남은 손을 움켜쥔 혜령이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강 현을 비웃었다.

“조건우는 원래 천성이 그래. 안 그런 척해도 정이 많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긴다고. 네가 얼마나 사람 같지 않고 잔인하게 굴었으면 널 아직 괴물 보듯이 할까?”

강 현이 웃었다. 하지만 눈빛은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썩 듣기 좋지 않네. 우리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요괴였어. 그렇기에 가까워질 수 없었을 뿐이지.”

“이 녀석은 더이상 요괴가 아니야!”

“정신 차려, 아가씨.”

강 현이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가까이에 다가와 눈을 마주치는 강 현에, 혜령은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났어도, 귀력을 잃지 않은 이상 이 친구들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존재일 뿐이야. 부리기가 편하니까 신들이 인간의 껍데기를 주고 노예로 쓰고 있는 요괴일 뿐이라고. 괜히 끼어들었다가 또 소중한 것을 잃기 싫다면 빨리 이 싸움에서 빠지는 게 좋을걸.”

“그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 네놈과 싸우고 있는 거야.”

“나는 인간을 해칠 생각이 없어. 그저 바람을 들어줄 뿐.”

“그렇게 멋대로 사람 마음을 갖고 장난치고 영혼을 유린하는 게 해치는 게 아니고 뭔데?”

건우가 혜령을 저지하기 위해 어깨를 붙잡았다.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던 강 현이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무어라 속삭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걸 듣고 혜령의 얼굴색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이 자식-!”

동주가 참다못해 강 현의 멱살을 쥐어 올렸다. 주위의 시선이 그들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마침 부스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차 찾아왔던 학과장이 그 광경을 보고 놀라서 달려왔다.

“너희!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강 현은 옷깃에서 동주의 손을 떼어내고 그를 향해 안쓰럽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유유히 부스에서 빠져나갔다.

우선이 주먹을 꽉 쥔 채 바르르 떨고 있는 혜령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쥐었다.

“누나, 괜찮아요?”

“저 자식, 진짜 미쳤어. 미친놈이야.”

“몰랐던 거 아니잖아요.”

“뭐라는지 알아?”

잠시 심호흡을 한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장난치는 거 맞아. 이렇게 재미있게 만들어놨는데 인간이 장난감이 아닐 리가 없잖아.”

그때까지 심각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만 보던 예진구가 고개를 갸웃하며 석연찮은 한숨을 내뱉었다. 분함에 씩씩대고 있던 동주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래요?”

“저 남자가 비형랑이죠?”

“네.”

“신기하네요.”

“뭐가 말이에요?”

“보이지 않더군요.”

“네?”

예진구가 조교들을 향해 굳은 눈빛으로 말했다.

“저 남자도 전생과 후생의 연결된 끈이 보이지 않아요. 마치 신라 씨의 운명처럼.”

그 무렵, 신라와 신후는 캠퍼스 안 벤치에 앉아 테이크아웃 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물끄러미 축제를 구경하고 있는 신후를 보고 신라는 피식 웃었다. 웃음소리를 들은 신후가 그녀를 돌아봤다.

“왜 웃어?”

“안 어울려서요.”

“뭐가 안 어울려?”

“축제와 한신후 교수라니. 여태 왜 이런 걸 안 즐겼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신후는 묘한 미소를 띤 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물론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썩 좋아하진 않아. 하지만 멀리서 구경하는 건 나쁘지 않지.”

“그래요?”

“저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이 볼만하거든. 에너지 넘치고, 활기차고.”

신라도 그의 생각에 동의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늘상 혼자 다니던 그녀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퍽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적막함을 더 멀리하고 싶었다.

그녀는 다시 신후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편안한 얼굴로 축제 분위기를 느끼고 있는 남자는 역시나 귀신보다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훨씬 어울렸다. 무심결에 벤치에 올라와 있는 그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가, 깜짝 놀라 떼어냈다.

“미안해요.”

“뭐가?”

아무렇지 않게 물은 신후는 허공에 어색하게 떠도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벤치에 올리고 자신이 그 손등을 감쌌다. 그리고 달아나지 못하게 짓눌렀다. 얼굴이 달아오른 신라가 다급히 말했다.

“누가 보면-”

“사귀는구나, 싶겠지.”

“교수님!”

“귀찮은 날파리들이 알아서 떨어지니 더 좋고.”

“날파리요?”

신후는 옅게 웃다가 근처 건물의 모퉁이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두 사람을 몰래 지켜보던 인영이 급하게 몸을 숨겼다. 병욱은 자기도 모르게 죄지은 사람처럼 숨고서 짜증 서린 얼굴로 머리칼을 헤집었다.

“뭐야, 둘이 사귀어? 아니지. 상사이니까 성추행일 수도 있잖아?”

그는 긴가민가한 얼굴로 다시 모퉁이를 돌아 두 사람을 엿봤다. 때마침 신라가 손을 뻗어 신후의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를 떼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다정해서, 병욱의 눈빛이 절로 쓸쓸하게 가라앉았다.

“생각보다… 더 좋아했나.”

병욱은 가만히 눈을 감고 신라의 손길을 받고 있는 신후를 굳은 표정으로 눈에 담고서야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그런 병욱의 모습을 엿보는 또 다른 인영이 있었다. 그는 킬킬거리며 웃고는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몸을 감췄다. 기괴하게 꺾인 다리로 절뚝거리는 모양새는 부러 숨어다니지 않는 이상 쉽게 눈에 띄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왜들 그러지?”

신후가 사학과 홍보 부스로 들어서며 물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던 조교들은 그의 뒤로 따라 들어오는 신라를 발견하고 말을 아꼈다.

“그냥, 손님이 없어서요.”

어색하게 대답하는 동주를 보고 신후는 무언가 낌새를 눈치챘다.

“조 조교, 나 좀 잠깐 보지.”

그는 일단 건우를 데리고 부스 밖으로 나갔다. 예진구도 조용히 일어서 그들을 따라 나갔다. 우선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장사 좀 재개해 볼까? 나도 역술은 좀 공부했으니까, 사 주는 내가 볼게.”

신라는 구석에 놓인 홍보 전단지를 집어 들었다.

“저도 다시 홍보지 나눠주고 올게요. 수고하세요!”

잠시 농땡이를 피우고 온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든 신라는 아까보다 더 열심히 홍보지를 배부했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데 하이힐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운동화로 다시 갈아신어야겠네….”

그녀는 아까 혜령과 옷을 갈아입었던 연구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자리에 가서 하이힐을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는데, 누군가 연구실의 문을 두드리고 조용히 들어왔다.

“신라, 여기서 뭐 해?”

기분이 조금 가라앉아 있는 병욱이었다.

“어, 구두가 불편해서 운동화로 갈아 신으려고. 같이 전단지 나눠주러 갈래?”

“아까 보니까 불청객이 와서 조교님들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것 같던데.”

“불청객? 누구?”

“이름이 뭐랬더라…. 강 현?”

고개 숙인 채 운동화 끈을 조이던 신라는 대번에 싸늘한 표정이 되어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누구…라고?”

“강 현. 너도 아나 봐?”

“그 남자가… 우리 축제 부스에 왔었어?”

“응.”

그녀는 방금 전 심상치 않았던 조교들의 표정을 뒤늦게 깨달았다.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던 우선의 노력도.

“미안한데, 나 먼저 가봐야겠어.”

병욱은 급하게 뛰어나가려는 신라의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밀어 닫았다.

“왜 그래?”

“할 말이 있어.”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정말 급한 일이라서….”

“아니, 내가 더 급해.”

다시 보니 병욱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신라는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하는 낯선 기운에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병욱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너… 괜찮아?”

“신라, 너 한신후 교수랑 사귀어?”

“뭐?”

“아니지? 교수와 제자가 연애라니…. 너무 불순하잖아. 안 그래?”

인상을 찡그린 채 물은 그는 한 걸음씩 신라를 향해 다가왔다. 희미했던 낯선 기운이 점차 뚜렷하게 형체를 잡아갔다.

‘구슬을 삼켰구나.’

병욱의 안에서 느껴지는 귀기(鬼氣)에 신라는 그렇게 짐작했다.

“왜 대답을 못 해? 더 수상하게….”

재빠르게 달려든 병욱이 신라의 양 손목을 붙들고 소파 위로 넘어뜨렸다. 속절없이 소파에 파묻힌 신라가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귀신에 들린 인간의 힘은 쉽게 떨쳐내기 힘든 것이었다.

“이거… 놔!”

“한신후, 남자가 봐도 멋지지. 그래서, 어디까지 갔어? 둘이 잤어?”

“너, 말조심 못 해!?”

“강 현이라는 남자도 잘생겼더라. 이제 보니 남자 후리는 재주가 있구나? 그래서 나 같은 건 눈에도 안 차?”

병욱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했다. 결국 마지막 이성을 놓은 그는 고개를 숙여 억지로 신라의 입술을 훔치려 했다.

그 시간 건우와 예진구에게 모든 얘기를 전해 들은 신후는 심각한 얼굴로 부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신라의 모습부터 찾았다.

“…신라는 어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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