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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장. 가을 축제_上 (60/126)

59장. 가을 축제_上

똑똑.

막 신발을 신고 나가려던 차에 현관이 두드려졌다. 신라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바깥의 동태에 귀 기울였다.

“누구세요?”

긴장한 목소리에는 지난 밤 겪은 일에 대한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직 강 현에게 세게 붙들려 있었던 손목에는 아릿한 통증이 남았다.

- 나야.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윗집 남자였다. 그녀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한신후는 오늘도 모델과 같은 비주얼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신라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부러 비아냥조로 얘기했다.

“축제라고 들뜨셨나 봐요?”

“난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아, 그러시구나.”

“너야말로 뭔가 다른데, 오늘.”

축제 부스를 운영하는데 민낯으로 서 있을 수는 없으니 옅게나마 화장을 한 것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신후의 예리한 관찰력에 신라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뺨을 붉혔다.

“별로 다를 건 없는데요.”

“…마음에 안 드네.”

“네?”

신라가 잘못 들었다는 듯 묻자, 가볍게 고개를 저은 신후가 신라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나랑 데이트할 때도 화장은 안 하더니. 축제가 그렇게 대단한 건가 싶어서.”

“우리가 언제 데이트를 했는데요? 그리고. 언제는 축제보다 공부를 더 재미있어하는 걸 놀리시더니.”

“그거랑 이건 달라.”

“왜 달라요?”

“네가 들떠 있는 게 느껴지거든.”

“…제가요?”

신라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평소보다 긴장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학과를 대표해서 연구실 모두와 참여하게 된 처음이자 마지막 축젯날이니까. 실수 없이 잘 해내고 싶어서 귀가해서도 축제 계획을 짰을 정도였다.

신후는 신라를 조수석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그녀가 안전벨트를 맨 것을 확인하고 차를 출발시킨 그는 아까와 달리 미미하게 웃음을 머금은 채 얘기했다.

“사람들이 뜸해지면 지원 사격하러 갈 테니까 열심히 하고 있어.”

뜻밖의 격려를 받은 신라는 작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검은 세단이 매끄럽게 오피스텔 주차장을 미끄러져 나갔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널따란 캠퍼스 길, 6인 테이블 두 개 정도가 들어갈 만한 넓이의 부스 안에서 각 학과가 자신들만의 개성을 드러내며 행인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다트로 풍선 터뜨리기를 하거나, 정해진 칸 안에 동전 넣기를 하는 등 건전한 게임이 주를 이루었다.

사학과 부스는 기본적인 컨셉을 퀴즈로 잡았다. 역사 문제가 적힌 카드를 열 장 뒤집어 많이 맞히는 사람에게 상품을 주는 것이다. 원래 신후의 이름이 들어가 있던 상품의 이름은 살짝 바뀌어 있었다.

3위. 문화 상품권 1만 원권

2위. 문화 상품권 5만 원권(+얼짱 조교와의 티타임)

1위. 문화 상품권 10만 원권(+몸짱 조교와의 식사)

사학과 학생회 중 한 명이 큰맘 먹고 공수해 온 솜사탕 기계도 열심히 제 몫을 했다. 그러나 역사 퀴즈와 솜사탕만으로는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끌어모으기에 부족한 감이 있었다. 애초에 몸짱 조교와 얼짱 조교는 세미나에 참석하느라 얼굴도 비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니 말이다.

하얀 후드 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부스 근처에서 전단지를 돌리던 신라는, 멀리서 걸어오는 혜령을 발견하고 반갑게 미소 지었다.

“선배!”

“세상에. 사학과 부스에 그래도 제법 한두 명 앉아 있는 게 웬일인가 싶었더니, 호객 행위 하는 예쁜이가 있어서 그랬던 거구나?”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 아닌데~?”

“세미나는 끝났어요?”

“지루해서 먼저 나왔어~ 애초에 교수님이 우리 골탕 먹이려고 연 세미나거든. 어디 보자….”

혜령은 늘씬한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다른 학과 부스들을 찬찬히 훑어봤다. 보아하니 남학생들은 호객 행위를 하는 예쁜 여학생들을 보고 쫓아오고, 여학생들은 잘생긴 남자가 있는 부스에 몰려드는 것 같았다.

“정공법은 내 성미에 안 맞아. 신라, 우리 잠깐 어디 좀 다녀오자.”

“네…?”

어리둥절한 채 묻는 신라의 손을 낚아챈 혜령은 다짜고짜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리고 잠시 후, 스타일이 확 바뀐 신라가 어정쩡한 걸음으로 혜령에게 이끌려 돌아왔다. 운동화는 높은 힐 구두가 되었고, 흰 후드 티는 화려한 디자인의 블라우스, 화장 또한 가을에 맞게 분위기 있는 메이크업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검은 생머리에는 과하지 않은 웨이브를 넣어서,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모두 신라를 한 번씩 쳐다보고 지나갈 정도였다.

“우와….”

부스를 운영하던 다른 사학과 학생들은 넋을 놓고 신라의 변신에 찬사를 보냈다. 갑자기 미모의 두 여인이 등장한 사학과 부스에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더 몰리기 시작했다. 물론 성비는 남학생이 우세했다.

“남정네들 말고 귀여운 여학생들은 안 오나~”

혜령의 중얼거림에 신라는 작게 웃을 뿐이었다.

그때 수업을 마치고 뒤늦게 부스로 돌아온 과대가 신라를 발견하자마자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그의 반응을 목격한 학생회가 웃음을 터뜨렸다.

“병욱이 형, 입 닫아요, 침 떨어져요!”

“신라가 꾸미면 예쁘긴 하지?”

머쓱하게 붉어진 뺨을 긁은 과대는 슬금슬금 신라의 근처로 가 가방을 내려놓고 셔츠 소매를 걷었다.

“잘… 하고 있었네?”

“응…. 혜령 선배가 도와주고 계신 덕분에.”

병욱은 혜령에게 눈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신라의 근처만 맴돌았다. 일부러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척하며 이것저것 신라에게 물어보는 병욱의 행동을 보고, 혜령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저번에 과 캠프 때는, 직접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했어.”

함께 테이블을 정리하던 병욱이 신라에게 말했다. 함께 금돼지와 맞닥뜨렸던 일에 대한 얘기이리라. 신라는 그때 금돼지에게 잡혀 동굴까지 끌려갔던 일이 떠올라 잠시 표정을 굳혔지만, 곧 입가를 당기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야. 그 정도로 큰 멧돼지를 만났는데, 혼자 도망치지 않은 게 용하지.”

“…그거 비꼬는 거 맞지?”

“아니! 설마.”

“넌 그 무서운 상황 속에서도 그 짐승의 주의를 끌려고 했잖아. 정말 멋있었어. 사내놈이 여자한테 이런 말 하는 게 좀 창피하긴 하지만, 진심이야.”

“…고마워.”

신라의 대답에 금세 표정이 펴진 병욱이 부스 밖을 둘러봤다. 사람이 좀 뜸해진 틈을 타 신라에게 산책을 제안하려는 속셈이었다.

“신라, 우리 잠깐….”

그때 주변의 공기 흐름이 묘하게 바뀌었다. 분위기를 바꾼 주인공을 가장 먼저 발견한 혜령이 피식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아, 이거 더 재미있어지겠는데.’

깔끔하게 빗어 올린 포마드 헤어에 캐주얼하면서도 시크한 테일러드 재킷, 그리고 밝은색 9부 바지를 멋스럽게 매치해 입은 남자는 누가 봐도 캠퍼스에서 화보를 찍고 있는 모델이었다. 강렬한 햇빛에 인상마저 살짝 찌푸리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들은 일단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을 정도였다.

“……”

신후는 부스 안에 있는 신라를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분명 아침에 학교로 태워다 줄 때는 저런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저러니까 엄한 날파리가 꼬이지….’

조금만 꾸며도 감춰져 있던 뇌쇄적인 미가 뿜어져 나올 거라는 걸 몰랐던 게 아니다. 자기 외에 아무도 모르길 바랐기에 신라가 서툴게라도 화장을 하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던 것이다. 신후의 짜증 서린 시선은 신라를 저렇게 만들어놓은 범인에게 향했다.

“이크.”

혜령은 모른 척 돌아서서 지나가는 학생들을 붙잡는 데 열중하는 척을 했다.

“교수님이 어쩐 일이세요?”

병욱이 달갑지 않아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스스로가 나름 사학과에서 셀레브리티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한신후 교수의 곁에만 서면 외모도, 스펙도 한없이 초라해졌기에 어쩔 수 없는 적대감이 들었다.

게다가 그는 신라의 지도교수이며, 미혼이었다. 돌싱도 아니고 미혼! 도대체 저 남자는 저 외모를 가지고 왜 여태껏 결혼을 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잘하나 보러.”

짤막하게 답한 신후는 부스 안으로 들어와 신라에게 가볍게 턱짓했다.

“나가자.”

“네?”

“한 바퀴 돌러.”

듣고 있던 병욱이 발끈하며 한 발 나섰다.

“저기 교수님, 죄송하지만 이제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몰릴 겁니다. 신라는 저와 같이 부스에서…”

“유신라를 대신할 존재만 앉혀놓고 가면 되는 거지?”

“예?”

신후가 부스 밖을 쳐다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 흰 스트라이프 정장에 페도라를 쓴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예 씨 가문의 설계자, 예진구였다.

“안녕들 하십니까. 한국대 사학과 축제를 맞아 놀러 온 일일 사주풀이꾼, 예진구이올시다.”

화려한 패션에 안 어울리게 허리를 구십도로 숙이며 고리타분하게 인사하는 요상한 남자를 보고 사학과 학생들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신후는 그 틈을 타 신라의 손목을 붙잡고 부스 바깥으로 나섰다. 등 뒤에서 노골적으로 쏘아대는 못마땅한 시선을 느낀 신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교수님, 천천히 좀 걸어주세요.”

하이힐이 익숙지 않은 신라가 엉성한 걸음으로 걸으며 호소했다.

“그러게 누가 평소에 안 신던 거 신으래?”

“…교수님.”

“머리부터 화장까지 다 박 조교 취향으로 꾸며져서는.”

“그러는 교수님은요? 교수님도 오늘따라 패션에 힘 좀 주셨잖아요.”

“이건 다 널 지원 사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왜 지원사격은 안 하고 같이 도피하는 건데요?”

“그 정도 일했으면 됐잖아. 이제 나 좀 에스코트해 줘. 축제 구경은 처음이거든.”

“이것도 일일걸요? 엄연한 비즈니스.”

그 말에 신후가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신라를 돌아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신라는 순간 의도치 않게 심장이 세게 뛰는 것을 느끼며 그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이지, 저 얼굴로 작정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것은 반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미소를 목격한 학생들이 넋을 놓고 걷다가 서로 부딪히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신후는 그답지 않게 들뜬 기분을 마음껏 드러냈다.

“먹고 싶은 건 다 사 줄게. 그런데도 이게 비즈니스로 느껴진다면 어쩔 수 없지만.”

“……”

“넘어지지 않게 잘 붙잡아. 아, 너무 잘 걷지도 마. 지금 손목을 붙잡고 있는 명분이 널 부축하기 위한 거니까.”

결국 웃음을 흘린 신라는 못 말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지금 시간에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사학과 학생들은 드물었다. 그러니 이 순간만큼은 신후와의 걸음 하나하나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요란한 복장 차림의 사내가 부스에 앉아 있어 처음에는 경계하듯이 쳐다만 보고 지나치던 한국대 학생들은, 혜령과 병욱이 살갑게 미소 짓고 서 있는 것에 혹해 다시 하나둘 부스를 체험해보고자 발걸음을 멈췄다.

“이거, 귀인이 또 찾아오셨군요.”

예진구는 역술에 능통한 자였다. 또한 그를 넘어서 상대방 전생의 모습까지 어렴풋이 볼 줄 알았다. 그래서 신라를 처음 만났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녀를 예사롭지 않게 쳐다봤던 것이다.

그는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자신의 앞에 착석하는 학생들의 사주를 간단히 풀이해주고 전생의 모습을 크로키로 스케치해 주었다. 물론 백 프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학생들의 흥미를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오빠, 저는요? 저는 전생에 어땠어요?”

“저는요? 남자였어요, 여자였어요?”

사주풀이에 전생의 모습까지 봐준다는 입소문이 금세 퍼졌는지 사학과 부스에는 어느새 길게 줄이 생겼다.

“오늘 역할을 톡톡히 하네? 예 씨 오빠?”

혜령의 말에 예진구는 겸연쩍게 웃을 뿐이었다. 아직 혜령에게 팔이 꺾여 제압당했던 기억이 있어 그녀가 근처에 오면 긴장부터 됐다.

“여어, 우리가 올 필요가 없었잖아?”

그때 세미나가 끝났는지 건우를 비롯한 나머지 조교들이 부스로 들어왔다. 관상을 조금 볼 줄 아는 건우도 예진구의 옆자리에 앉아 한몫을 하기로 했다.

“상품들도 왔네. 너희는 옆 테이블에 앉아서 얼굴이나 팔고 있어.”

혜령은 우선과 동주를 자리에 앉히고 도망치지 못하게 퀴즈 코너의 진행을 맡겼다. 조교들이 오자 학부생 진행자들은 다음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

이제 부스에는 고고학방 조교들과 병욱, 그리고 예진구만 남았다.

“다음 사람, 앉으세요.”

건우는 관상을 봐줄 다음 사람을 불렀다. 학생의 옷차림이 아닌 남자가 조용히 건우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이름이…”

펜을 고쳐 쥐며 앞에 앉은 남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건우는 말을 멈추며 눈을 부릅떴다. 이곳에서 보이면 안 되는 사내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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