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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장. 가을밤 소나타 (59/126)

58장. 가을밤 소나타

신후는 맞은편 소파에서 바짝 긴장한 채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건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미간에 그려졌던 내 천(川)자가 점차 옅어지고, 마지막에는 아무런 유감없는 고요한 눈빛이 되었다.

“상처 자리는 좀 어때?”

“에?”

잔소리가 쏟아질 줄 알았다가 의외의 질문을 받은 건우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이제. 가려운 정도예요.”

“트라우마였을 상황을 또 겪은 것치고 회복이 빠르군.”

“…그렇죠, 뭐.”

신후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교수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들어가 문을 닫기 전 말했다.

“군 대체 복무 자리는 이미 확보해 놨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말고 일에나 집중해.”

“…!”

문이 닫히자마자 건우가 입가를 가리며 벌떡 일어났다. 놀란 표정을 내 짓기는 다른 조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감격에 젖은 얼굴로 무릎을 꿇은 건우가 중얼거렸다.

“진짜 평생 죽을 때까지 충성해야지….”

함께했던 세월이 얼마인데 이제 와 충성을 운운하는 건우를 보고, 우선과 동주는 웃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린 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혜령도 신라와 눈을 마주치며 개구지게 웃었다.

연구실의 모두가 도와주기로 한 이상, 정말로 열심히 해보고픈 마음이 생긴 신라는 늦은 시간까지 과방에 남아 부스를 꾸미는 작업을 했다. 서영을 비롯한 다른 학부생들도 일손을 보태다가 모두 귀가한 뒤였다.

우우웅, 색지가 어질러진 탁자 위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문자를 확인한 그녀는 작게 웃었다.

「슬슬 졸리니까 끝나면 와서 깨워.」

먼저 가도 된다고 말해도, 늘 이렇게 자신을 데리고 귀가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이것만 마무리하고 가야겠다….”

그녀가 중얼거렸을 때, 과방 바깥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소리가 제법 묵직한 것을 보니 남자 구두 소리 같았다.

‘누구지?’

아홉 시가 넘은 시간에 사학과 건물을 돌아다닐 사람은 드물었다. 교수 중 한 명인가 싶어 그녀는 먼저 문을 열고 바깥 복도로 나가봤다.

“어?” 그러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센서 등은 켜져 있는데,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과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데, 아까까지 서 있던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서 있었다. 너무 이질적이어서 현실감조차 없게 만드는 남자가 자신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내 짓고 있었다.

“안녕, 신라 씨.”

신라는 놀라지도, 두려움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 그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다만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강… 현.”

신라가 이름을 불러준 것이 기쁜 모양인지 더 활짝 웃은 남자는 주머니에 한 손을 꽂은 채 책상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 신라가 작업하던 것들을 대충 뒤적거렸다.

“뭐 하고 있었어요? 축제 준비? 왜 혼자서?”

“당신이… 왜 여기에….”

그는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갑자기 만나고 싶어서.”

“……”

“잘 지냈어요?”

건물 바깥에서 귀뚜라미가 찌르르 찌르르 우는 소리가 났다.

강 현은 색지 쪼가리를 집어 들어 무의미하게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신라로서는 그와 그 어떤 무의미한 시간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의미가 있더라도 대면하기가 힘겨웠다.

“이번에는 날 붙잡아 가려고 온 건가요?”

“정말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거짓말 같아요?”

“……”

“눈빛을 보니 그런가 보네.”

덤덤하게 중얼거린 강 현이 책상 모서리에서 떨어져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신라는 뒷걸음질 칠 생각조차 못 하는 그녀의 다리를 원망했다.

손끝을 파르르 떨고 있으면서도 눈빛만큼은 흔들리지 않는 그녀를 보고 강 현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래. 눈까지 피했으면 꽤 상처받았을지도 몰라.”

“그만 다가와.”

“해치려고 온 게 아닌데,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요.”

겨우 바닥에서 떼어낸 발로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신라는 벽에 등이 닿아서야 멈췄다. 물리적인 거리를 둬봤자, 이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죽임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피하려고 하는 것은 그저 본능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강 현은 신라의 앞에 서서 가만히 그녀의 손을 쥐었다. 아직 떨리고 있는 손끝이 마음에 드는지 손톱 부분을 집요하게 매만졌다.

“신라 씨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더라고요. 내가 아직 당신한테 진심의 일면도 내비치지 않았다는 말.”

“…그게 어쨌는데요.”

“내 진심이 어떤지 더 깊이 알고 싶어요?”

입술을 깨문 신라는 그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먼저 파고들지 말라고 했던 게 누구인지 기억 안 나요? 나도 동의해요. 더이상 우리는 친구일 수 없으니까.”

“왜 친구일 수 없죠?”

“당신이 준호 오빠를…!”

순간 이성을 잃을 뻔한 신라가 주먹을 꽉 쥐며 시선을 억지로 틀었다. 이 남자에게 감정을 드러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준호…. 또 지국천왕 얘기인가.”

강 현의 눈매가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신라가 시선을 피하지 못하도록 턱을 쥐어 자신 쪽으로 고정시켰다. 두려움과 원망, 여러 감정이 뒤섞인 검은 눈동자를 보자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가학심이 속에서 치고 올라왔다.

“지국천왕이 없었으면, 당신이 내 편이 될 수도 있었을까?”

“설사 그렇게 됐다 하더라도, 당신의 그 추악한 내면을 알아챘다면 진작 도망치고도 남았을걸.”

“아니…. 도망 못 치지. 내 편이 된다는 건 내 적을 함께 미워한다는 소리니까. 저번에도 말했듯이, 전쟁에는 선악의 개념을 적용하는 게 아니에요. 누가 얼마나 더 이권을 쟁탈해 가느냐 그 결과의 차이지. 이긴 쪽이 자신들을 선이라고 부르는 건 단순히 전리품에 불과해요. 사학과니까 잘 알 테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해왔나요? 이기는 쪽이 정의가 되는 전쟁일 뿐이라고? 아무리 내가 요괴들의 세계를 모른다고 해도, 뭐가 옳고 그른지도 판단 못 하는 멍청이로 보였나 보죠?”

강 현의 미소가 다른 느낌으로 바뀌었다.

“어둑시니 그자가 하는 일은 뭐든 옳다고 생각해요?”

“……”

“죄 없는 요괴들도 두려움에 떨며 그를 피해 다녀야만 해요. 자칫 눈에 잘못 띄기라도 하는 날에는 가차 없이 제령을 당하거나 잡아 먹혀버리고 마니까. 그 남자가 요괴를 희생시켜 인간을 지킨다면, 난 인간의 육신을 빌려 요괴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 단지 그뿐이에요. 이 정도면 단순히 입장 차이 아닐까?”

과연 그 옛날 입담만으로 수많은 인간의 우두머리와 강한 요괴들을 구슬렸던 자다웠다.

아무런 대답이 없는 신라를 보고 편하게 눈웃음 지은 강 현은 신라의 턱을 놓고 그녀의 머리칼을 어깨 뒤로 쓸어 넘겨줬다.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더라…. 아아. 그때 나한테, 당신한테서 답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고 했었죠. 나를 위해서 더는 고민하지 않을 거라고.”

“……”

“그 말이 곱씹을수록 생각보다 섭섭해지더라고. 그래서 정정하러 왔어요. 앞으로 마음껏 나에 대해 파고들어도 좋아요. 당신이 뭘 묻든, 솔직하게 답해줄 생각이니까.”

생글거리며 얘기하는 남자의 모습은 흡사 비밀 털어놓기 게임을 하자고 조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관심… 없어졌다고 하면요?”

신라의 단호한 말에도 강 현의 눈가에서 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어째서?”

“……”

“나는 하루 중 꽤 많은 시간을 당신 생각에 할애하고 있는데.”

차분하게 가라앉는 신라의 눈빛을 보고 강 현의 웃음이 진정성을 잃었다. 결국 표정이 사라진 그는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벽을 짚고 허공을 응시했다. 하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는지 점차 호흡 소리가 거칠어졌다.

신라는 그 위태로운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그와 벽 사이에서 빠져나오려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반걸음도 못 가 그의 손에 팔이 붙들려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읏…!”

“가만히… 가만히 있어요. 지금 움직이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

눈에 가득 찬 살기는 미처 억누르지 못한 본성이지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닌 모양이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다, 허공을 노려보다, 홀로 무언가를 견뎌내던 그는 결국 한숨과 함께 살기를 지웠다.

‘실수했군….’

최대한 다정하게 다가가려고 했건만, 이제 완전히 두려움에 질려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히려 아까보다 두려움이 지워진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겁줘서 미안하다고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아닌가 보네.”

“그게 당신 진짜 모습이니까.”

“안 두려워?”

신라는 곧은 시선으로 대신 답했다.

두근. 숨기고 싶던 본모습을 오히려 수용하고 있는 듯한 여인의 모습에 강 현의 가슴이 이유 없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홀린 듯한 눈빛으로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며 다가갔다. 그리고 뺨을 쥐어 그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 나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어?’

그는 천천히 고개를 틀어 키스할 듯이 다가갔다. 숨결이 닿을 거리가 되자 당연히 피하려고 하는 고개를 제법 애타게 붙들었다.

“읍-”

결국 입술끼리 맞물렸다. 집요함과 강제성을 감춘 부드러운 키스가 신라의 입술을 점령해나갔다. 강 현의 손은 어차피 피할 곳을 잃은 신라의 얼굴 대신 여린 두 손목을 붙잡아 벽에 짓눌렀다.

“으읍-!”

신라는 그에게서 빠져나오기 위해 열심히 바르작댔다. 하지만 월등한 힘 차이에 그와 벽 사이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치열 하나하나를 훑으며 그녀의 입 안 곳곳을 헤젓던 강 현이 어느 순간 움찔 동작을 멈추며 차분히 고개를 떼어냈다. 그의 아랫입술에 검붉은 피가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아프네….”

혀로 입술의 피를 핥아내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강 현에게 신라는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착각하지 마…. 인간같이도 안 느껴졌던 당신이 이제 좀 사람처럼 보였다는 소리이니까.”

“나한테 피를 보게 한 유일한 인간인 거 알아요?”

“관심 없어.”

“이제부터 가지도록 해요.”

“싫어!”

“생각대로 안 될걸.”

“그만해….”

“내가 당신에게 했던 위로, 격려들…. 모두 진심이었어. 맹세해.”

신라는 구겨진 표정으로 눈을 꾹 감고 고개 숙였다. 이 남자가 자신을 왜 이렇게 괴롭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분한 것은, 그 위로와 격려들에 큰 힘을 얻었던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나한테 왜 이래… 그만해, 제발. 당신이랑 더는 이런 얘기들 하고 싶지 않아.”

“당신이 괴로워하라고 하는 얘기 아니야.”

“아니… 괴롭히는 거 맞아. 처음부터 그러려고 접근한 거잖아.”

“처음에는 그랬지. 하지만 만날수록 생각이 바뀌었어. 당신이 괜히 이 싸움에 끼어들어 다치지 않고, 행복해지길 바라게 되더라고.”

신라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봤다.

“당신이 당장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게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야.”

“……”

표정 없는 얼굴로 신라와 시선을 마주치던 강 현이,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주변에 있는 자들이 모두 사라져버려도, 계속 날 밀어낼 수 있을까?”

“…!”

작은 웃음소리만을 남기고, 남자는 갑자기 흔적도 없이 코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신라가 주변을 다급히 둘러보고 있을 때, 과방의 문이 열리고 신후가 걸어 들어왔다. 가방을 멘 채 퇴근 준비를 하고 온 그는 벽에 붙어 서 있는 신라를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왜 거기에 서 있어?” “……”

어느새 이마에 맺혀 있던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렀다. 신라는 아무렇지 않은 척 벽에서 멀어지려 했지만 결국 무릎이 힘없이 꺾여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유신라…!”

빠르게 다가온 신후가 가방을 내던지고 그녀의 몸을 급히 지탱했다.

“괜찮…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잖아. 무슨 일 있었어?”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신후는 사실을 짐작하고 말았다.

“…왜 부르지 않았어? 귀걸이를 잊은 거야?”

“정말…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하나 보네요. 저 ‘신의 죄’ 뒤에 숨어 있으면.”

“그래. 하아…. 밤늦게까지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혼자 한다는 말은 없었잖아.”

“다들 간 지 얼마 안 됐어요. 그 틈을 타서 찾아올 줄은….”

“그만 얘기해도 돼. 널 탓하려는 게 아니니까. 일어날 수 있겠어?” “…네. 어서 집에 가요.”

신라의 상태를 다시 한번 살핀 신후는 그녀를 부축해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창가 쪽을 바라봤다.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놈이지만, 그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살기를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죽음을 재촉하지 마라, 비형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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