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장. 방어 실패
신후는 바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향갑노리개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고려 말경 예 씨 집안에 자신의 증표로 맡겨뒀던 바로 그 노리개였다.
화비는 일단 그가 건네는 노리개를 받아 들어 이리저리 살펴봤다. 어둑시니와 닮았지만 좀 더 해묵은 것 같은 기운이 검은 매듭 부분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거기에 깃든 기운이 칠팔백 년 전 즈음의 내 기운이야. 혹시 이 기운과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영혼을 본 적이 있어?”
“…글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왜 그 영혼에서 당신 기운이 풍겨야 하는데?”
“내가 증표 비슷한 걸 남겨뒀거든. 그 사람의 전생에 말이야.”
“……”
미묘한 표정으로 노리개만 만지작거리던 화비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왜 이제 와서 그 사람을 찾아야 되는데? 네 지금 정인은 유신라 아니었어?”
“왜 그렇게 생각했지?”
“그야….”
난처하게 머리를 긁는 화비를 보고 신후가 피식 웃었다.
“난 아직 누구든 정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처지야.”
“아…. 비형랑에게 들은 적이 있어. 당신이 벌을 받아서, 인간으로 환생했지만, 아직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그것과 관련된 일이야?”
“그렇다고 해 두지.”
“……”
교수실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신후는 화비가 대답할 때까지 덤덤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열심히 고민하던 화비가 노리개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다시 신후와 시선을 마주쳤다.
“당신이 원하는 사람을 찾아볼게. 당신은 비비 님의 스승이니까, 엄밀히 따지면 내 대스승이기도 한 거지.”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화비가 노리개를 든 채 교수실을 나서고, 신후는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해가 천천히 저물면서 캠퍼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박복한 여인 같으니….”
그는 다시 지끈대기 시작한 심장 언저리를 손으로 누른 채 한숨과 같은 말을 뱉어냈다.
* * *
“이게 다 뭐지?”
신후가 사무 책상 위에 펼쳐진 색 도화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의 앞에 선 건우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교수실로 들어와 있던 신라가 대신 질문에 대답했다.
“축제… 준비요.”
“……”
색 도화지에는 게임의 상품으로 보이는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3위. 문화 상품권 1만 원권
2위. 문화 상품권 5만 원권(+한신후 교수와의 티타임)
1위. 문화 상품권 10만 원권(+한신후 교수와의 식사)
“다 좋은데 부상으로 왜 내가 끼어 있는 거지?”
신후가 팔짱을 끼며 다소 냉소적으로 물었다. 건우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변명을 시작했다.
“그- 남들이랑 비슷한 진부한 상품을 걸면 별로 주목을 못 받을 것 같아서요.”
“왜 주목을 받아야 하지?”
“이번 축제에 부스 1등을 차지하면 학과 명예가 좀 선다고 해서….”
“언제부터 사학과의 명예가 본인 자신의 명예가 된 거지? 조건우 조교?”
“그게….”
건우가 한숨을 쉬며 포기의 뜻을 비치는 것을 보고 초조해진 신라가 한 걸음 나서서 신후의 책상을 양손으로 짚었다.
“사학과가 재미없이 책만 파는 학과라는 인식이 있어서요, 이번 기회에 그 인식을 전환해보자는 게 학생회의 취지예요.”
“내가 알기로는 그 취지가 학생들이 아니라 교수들한테서 시작됐다던데.”
“그… 하지만 저희도….”
“정말로 1등을 차지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솔직하게 말해야 도와줄 마음이 나지.”
“솔직…하게요?”
고민하는 신라를 향해 건우가 다급한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신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학과장님이 이번에 부스 1등을 사학과에서 차지하면 그 보답으로 건우 선배의 군 대체 복무 자리를 알아봐 주신다고….”
건우는 망했다는 얼굴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의 표정 변화를 보고 신라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뒤늦게 신후의 눈치를 봤지만 이미 사악한 느낌의 미소를 내지은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틀에 편히 기대서고 있었다.
“조 조교. 내가 군대는 다녀와 보니 꽤 괜찮은 곳이라고 추천했던 것 같은데. 내 말을 믿지 않나 보지?”
“그게… 역시 군대는….”
“대한민국에서 성인 남자로서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을 살았으면 마땅히 의무를 질 때가 됐지?”
“그…렇죠.”
“저 상품 리스트에 내 이름을 올리자고 제안한 사람만 남고 나가봐.”
“……”
조용히 퇴장하는 사람을 별 감흥 없이 바라보던 신후는 문이 닫히자마자 신라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조금 붉어진 뺨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서 있었다. 창가에서 일어난 신후가 책상을 돌아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옆모서리에 걸터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유신라.”
“…네.”
“내가 아무리 너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입장이라지만, 이렇게 나도 모르는 새에 불특정 다수에게 팔려 갈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을 어떻게 그렇게…!”
발끈하는 신라를 보고 쿡쿡 웃은 신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내 말이 틀려?”
“파, 팔려 가는 게 아니고요, 교수님이 다른 학과에도 소문이 날 만큼 인기가 많으니까…”
“그러니까 넌 그렇게 인기 많은 내가 다른 여자랑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어도 좋다는 뜻이지?”
“꼭 여자일 리는….”
“그런 상품을 보고 어떤 사내놈이 좋다고 게임에 참가하겠어?”
“…그건 그러네요.”
“네가 하라면 그렇게 할게. 하지만 정말 그 앞에서 커피만 마시고 밥만 먹을 거야. 아, 어차피 걱정할 만한 감정은 애초에 가지고 있지를 않으니 이런 말 할 필요도 없…”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리는 신라의 얼굴을 보고 신후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자신이 한 행동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뒤늦게 자각한 신라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입을 가렸다.
“그… 그런 의도는 없었어요. 미안해요.”
“……”
농담으로 한 말에 끝도 없는 자괴감에 빠져버리는 여인을 보고 신후는 가슴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사랑이 없는 심장은 그것을 연민, 정으로 드러냈다.
“절대… 교수님 약점을 이용해서 편할 대로 부리려고 한 게 아니에요. 그냥 정말 건우 선배한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은데, 학과 1등을 차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이디어가 안 떠올라서…. 미안해요. 생각이 짧았어요.”
신후는 작게 웃어버리며 신라의 손을 다시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잠시 머리를 올려놨다.
“농담이야. 널 충격주려고 한 말이 아니니까 그만 자책해.”
“……”
신라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자신에게 기대오는 신후를 보고 더 짠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미안해요….”
“지금 내가 네 자책감을 이용해서 무슨 짓이든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 알면 안 미안할걸.”
“뭘… 하고 싶은데요?”
신후는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 쉬었다.
‘그렇게 정말 다 해줄 것 같이 말하면 내가….’
결국 참지 못한 그는 그녀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자마자 물러서지 못하도록 허리를 감싸 안고 입술을 부딪쳤다. 어떻게 해도 좋다는 허락 같은 그 말이 한순간 절제심을 잃게 만든 것이다.
“음…”
신라는 온 입안을 부드럽게 헤집어 오는 신후의 키스를 받으며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굶주린 짐승 같은 저돌적인 그 입맞춤에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잠시 새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마치 영역표시를 하듯이 치열 하나하나까지 혀로 건드리며 그곳에서 새어 나온 달콤한 타액까지 모조리 빨아들인다. 아무리 빠진 곳 없이 핥고 머금어도 평소보다 더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신후는 반대편 벽에 그녀의 등이 닿을 때까지 쉼 없이 몰아붙였다.
더 도망칠 곳이 없어진 신라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싶어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두 손은 하릴없이 붙잡혀 머리 위 벽에 눌러지고 말았다.
신후는 고개의 각도를 틀기 위해 잠시 떨어지며 열에 찬 눈으로 신라를 내려다봤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놓치기 직전인 흐트러진 모습의 여인이 시야에 꽉 들어찼다.
‘아아… 위험한데.’
건우가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억누르고 있던 신라를 향한 독점욕이 제어 장치를 잃고 날뛰는 것만 같았다. 강 현에게, 비형랑에게 잠깐이라도 노출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장에 그녀를 자신만이 아는 공간에 가두고 머리카락 한 올 내비치지 않게 만들어도 모자랐다.
‘꼴사납군….’
하지만 이 모든 감정은 결국 사랑을 모방하기 위해 발악하는 어린애 같은 독점욕, 시기심, 질투일 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손… 놔 줘요. 아파.”
신라가 작게 말하자, 신후는 벽에 짓누르고 있던 그녀의 양손을 놓아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그 감정을 알아챈 신라는 말없이 다가가 그의 뺨을 매만졌다.
“좀 진정됐어요?”
“이래서야 사과받을 자격이 없군.”
“내가 물어본 거잖아요. 뭘 하고 싶냐고.”
“…앞으로 함부로 그런 거 물어보지 마.”
자조적으로 내뱉은 신후는 연구실로 통하는 문 쪽에서 기척을 느끼고 그쪽을 가만히 노려봤다. 기척을 숨기고 걸어가 불시에 문을 여니 문에 기대 있던 네 명이 모두 우르르 교수실 쪽으로 밀려들어 왔다.
“다들 연구실에서 시간이 남아도나 보지…?”
청천벽력 같은 물음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신후의 싸늘한 미소를 보니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세미나 기간이 지났다고 풀어져 있나 본데, 연구실 자체적으로 세미나를 한 번 열어볼까?”
“죄송합니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대답하며 연구실로 재빨리 들어갔다. 그때 연구실의 반대편 문이 열리고 학과장이 걸어 들어왔다.
“어머, 다들 모여 있었네요.”
마침 잘 됐다는 표정으로 뒤뚱거리며 걸어온 여인은 소파에 몸을 앉혔다.
“한 교수님, 얘기는 들으셨죠? 이번 사학과 축제 부스는 고고학방에서 맡기로 했어요.”
작게 한숨을 내쉰 신후는 신라를 지나쳐 연구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학과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주변으로 나머지 조교들도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저희 연구실에서 뭔가를 하기로 한다면, 그 결정권은 제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신후의 물음에 학과장이 과장된 웃음소리를 냈다.
“호호호! 어머, 정말 별거 아니에요. 딱 이틀만 조교들이 수고해주면 되는 거니까.”
“저희 방 조교들이 워낙에 바빠서 말이죠. 저도 마음대로 일을 시키지 못할 정도로요.”
차마 반박하지 못한 조교들은 서로 억울한 눈빛만 교환할 뿐이었다. 신후가 완고하게 나오자 당황한 학과장이 옆에 앉은 건우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조 조교가 말해봐~ 우리 사학과를 위해서 한번 열심히 해보기로 하지 않았어?”
“그…렇…”
대답하는 도중 신후가 한쪽 눈썹을 언짢게 들썩이는 것을 본 건우는 목덜미를 긁으며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던가요? 스읍, 제가 워낙 정신이 없어서 기억이 잘…”
“어머, 얘!”
“사학과에는 저희 아니어도 인재가 꽤 많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코 평수를 넓히고 씩씩거리던 학과장의 시야에 어느 순간 머쓱하게 서 있는 신라가 들어왔다.
“뭐, 좋아. 굳이 조교들이 애쓰지 않아도 사학과에는 머리 좋은 학부생들이 많지. 조교들이 바빠서 안 된다고 하니까, 신라라도 열심히 애써 줘야지, 뭐.”
신후의 미간이 좁혀졌다.
“거기에서 왜 신라가 나옵니까?”
“모르셨구나? 신라가 이번 축제 준비위원회로 자원했어요. 저번에 과 캠프에서 도중에 빠진 게 미안하다고. 얼마나 마음이 착해요~?”
“……”
보나 마나 학과장이 먼저 신라의 죄책감을 건드렸을 것이다. 안 봐도 뻔했다. 한숨을 푹 쉬며 이마를 매만지던 신후는 고개를 들고 조교들을 훑어봤다. 그 시선에는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아 방어할 기회도 놓쳐버렸으니 너희가 알아서 책임져’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우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고고학 방에서 신라 혼자 보내긴 좀 그러니, 저희가 오며 가며 부스 일을 돕겠습니다.”
그제야 만족스런 웃음을 내비친 학과장이 박수를 쳤다.
“그래~ 이런 훈남 훈녀들이 얼굴마담을 해줘야 부스가 확 살지!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요~?”
학과장이 종종걸음으로 연구실에서 나서고.
좀처럼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신후 때문에 조교들은 모두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기는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조건우.”
잠시 후 나지막이 불린 이름에 건우의 어깨가 바짝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