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장. 가까이에 있다
“헉….”
“교수님?”
놀란 신라가 자신의 쪽으로 숙여지는 신후의 몸을 받아냈다. 신후는 가슴팍을 움켜쥐며 거친 숨을 골랐다. 이미 뻥 뚫려 피가 나고 있는 심장에 불 화상마저 입은 듯한 소름 돋는 감각이 들고 있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이 돌아올 자리를 찾기도 전에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많이… 아픈 거예요? 괜찮아요?”
“점점 심해지는군….”
“소파에 누울래요?”
“아니…. 잠깐 이러고 있으면 괜찮을 거야. 태워다 줄 테니까 잠시만 이렇게….”
순식간에 식은땀에 젖어버린 남자의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믿기에 신라는 가만히 그를 지탱하고만 있었다.
이를 꽉 물고 통증을 견뎌내던 신후는 이내 신라의 어깨를 감싸며 기댔던 몸을 떼어냈다. 낯빛이 금세 파랗게 질려버린 그의 얼굴을 보고 신라는 많은 것을 묻고 싶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물어본다 해서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을 테니까.
대신 그녀는 그의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갔다. 신후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면허가 있어?”
“혹시 몰라서 따놨어요. 언제 빙의될지 몰라서 그 후로는 쭉 안 했지만.”
그는 피식 웃었다.
“장롱 면허인데, 자신 있어?”
“귀신들로부터 지켜주신다면, 도로에서 지켜드릴게요. 차의 외관까지 지켜드린다는 약속은 못 드리겠네요.”
“그건 걱정 마.”
“그걸로는 교수님 재산에 기별도 안 갈 테니까요. 그렇죠?”
“잘 아네.”
오래 운전을 안 한 것치고 신라는 운전석에서 꽤 안정적이었다. 기껏 따놓았는데 잊어버리는 게 아까워 가끔씩 교육 영상으로 복습을 했다고 했다. 덕분에 신후는 조수석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잠시 눈을 붙였다.
차창 밖에 단풍이 든 풍경이 펼쳐졌다. 차가 신호 대기 선에 멈추었을 때, 신후가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곧 축제 기간이지.”
신후가 학교 축제에 관심이 있을 줄 몰랐던 신라가 그를 잠깐 돌아봤다.
“네. 학기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서 한다고 들었어요.”
“어때, 대학 생활은. 연구실 밖에서는 어떤지 몰라서.”
“…똑같죠, 뭐.”
“뭐가 제일 즐거워? 공부하는 거? 그런 축제 같은 거?”
“굳이 고르자면 공부하는 게 재미있죠. 축제는 직접 참여하는 게 많아야 재미있는 거잖아요.”
“평범치 않다니까….”
신후가 웃는 것을 보고 신라는 그를 샐쭉 째려봤다.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그 부분에서 웃으면 안 되죠.”
“아니, 넌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죽는 것보다 배움이 끊기는 걸 두려워하던 녀석의 환생이니까.’
신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차가 신호를 받아 미끄러져 나갔다. 신라가 계속 염려하던 것을 물었다.
“건우 선배는 그러면 다 나을 때까지 우선 선배 집에서 지내는 건가요?”
“민 조교는 혼자 사니까. 눈치 보일 일이 없거든.”
“그나마 다행이네요.”
차가 오피스텔 주차장 안으로 진입했다. 신후는 눈을 뜨고 내릴 준비를 했다. 아직 주차는 서투른 신라 대신에 주차를 하고 나온 그는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액세서리 케이스를 꺼냈다.
“불사조는 아니지만, 인면조의 뼈를 가공해서 만든 귀걸이야.”
“…그건 그냥 했던 말인데요.”
신화 속에나 나올 법한 요괴의 가공품을 가져올 거냐고 농담 삼아 물었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로 이뤄내다니. 신라는 얼이 빠져서 그가 직접 귀에 귀걸이를 꽂고 갈 때까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사실은 엄청 값어치 있는 물건 아니에요?”
“맞아.”
그 말을 듣자마자 다시 귀걸이를 빼내려는 신라를 제지한 신후가 말을 이었다.
“귀신의 세계에서 말이지. 그들이 인간의 화폐가 쓸모없듯이, 우리도 그들의 보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한 그저 값어치 낮은 광물일 뿐이야.”
“……”
그럼에도 계속 받기만 하는 게 부담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풀 죽은 신라의 얼굴을 보고 신후가 나지막이 웃었다.
“그냥 받아.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애초에 몇 없잖아.”
“하지만….”
“아아, 혹시 귀신의 보물이 아니라 지폐로 사는 보물이 받고 싶은 거라면-”
“감사히 잘 쓸게요.”
단칼에 말을 끊고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다시 웃음을 흘렸다. 왠지 모르게 약이 오른 신라가 그를 째려봤지만, 그 행동이 그의 웃음을 더 자극할 뿐이었다.
* * *
“좋은 아침.”
2주 뒤, 반가운 얼굴이 연구실에 나타났다. 우선의 집에서 회복을 마친 건우가 늦은 오전 즈음 출근한 것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답게 심드렁한 표정을 내 짓고 서 있는 것을 보고 혜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애틋하게 불렀다.
“조건우~!”
덤덤하던 건우의 얼굴이 단번에 사색이 됐다.
“뭐, 뭐야. 안 어울리게.”
“‘안 어울리게’라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걱정을 왜 해? 죽을병도 아니고.”
“걱정한 사람 생각은 쥐꼬리만큼도 안 한다 이거지…?”
“감사의 절이라도 올려야 되냐?”
“그래. 어디 고마움의 절 한 번 받아볼까?”
상큼하게 웃으며 건우에게 다가가는 혜령을 보고 우선이 급하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깐! 진정해요, 누나. 아직 폭력은 안 돼요.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내상이 완전히 낫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참을게.”
혜령이 시무룩하게 얘기한 순간, 연구실 문이 열리고 수업을 마친 신라가 들어왔다. 그녀는 연구실 안에 서 있는 건우를 발견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전공 서적을 놓쳐버렸다.
“거, 건우 선배!”
혜령은 그렇다 쳐도, 신라의 이 같은 열렬한 반응을 볼 줄은 몰랐던 건우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귓불을 붉게 물들였다.
“어, 어…. 안녕.”
“이제 괜찮으세요?”
“덕분에… 지금은 멀쩡해.”
“다행이다…. 제가 찾아가면 불편하실까 봐 병문안 가지도 못했어요.”
“너뿐만 아니라 다 오지 말라고 했는데, 뭐. 그리고 나 때문에 그놈 주의를 끄는 일을 했었다며. 고마웠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신라가 미안한 마음에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자 잠시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혜령이 건우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내가 걱정했다고 했을 때는 매몰차게 굴더니, 신라한테는 완전 껌뻑 죽는다, 너?”
“내, 내가 언제!”
“이 귀는 뭔데? 빨갛잖아!”
“내가 내 귀가 빨간지 어떻게 아는데!”
동주와 우선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혜령 덕분에 금세 분위기가 풀렸다. 뒤늦게 웃음 짓는 신라를 보고 건우도 따라서 웃고 말았다.
“신라야, 그건 뭐야?”
동주의 시선이 신라의 크로스백 지퍼를 뚫고 나와 있는 기다란 색 도화지 묶음에 닿고 있었다. 그러자 신라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별건 아니고요, 이번 축제 때 연구실마다 소개 글을 작성하라고 하셔서요.”
“학과장님이?”
“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호랑이보다는 살쾡이에 가까운 비주얼의 여인이 구두 소리를 울리며 연구실로 걸어 들어왔다.
“어머, 마침 다들 모여 있네. 건우는 몸이 안 좋다더니 괜찮아졌고?”
“아, 네….”
“한 교수님은 교양 수업 가셨지? 다들 잠시 소파에 모여보자.”
조교들과 신라는 서로 불길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연구실 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둘러앉았다. 가장 상석에 앉은 학과장이 팔짱을 낀 채로 서두를 꺼냈다.
“가을 축제 때마다 매년 여러 연구실들이 부스를 설치하는데, 우리 사학과 부스는 매번 파리만 날렸던 거 잘 알지?”
원체 관심이 없었던 조교들은 딴청만 피울 뿐이었다. 학과장은 못 본 척하고 말을 이었다.
“아직 뜬소문이라 믿을 수는 없지만, 이번에 부스들 중 가장 인기가 있는 학과에 재단 지원금을 더 얹어주겠다는 소리가 있더라고.”
동주가 웃으며 반박했다.
“에이, 그럴 리가요. 겨우 축제 때의 인기도로요?”
“아무튼! 요지는, 그래서 교수들끼리의 자존심 싸움이 장난 아니에요. 여러분이 잘해서 학부생들 인기를 끌어줘야 우리 모두의 체면이 서는 거야. 알겠니?”
혜령이 손을 들었다.
“질문 있어요, 교수님. 그러면 이번에 사학과 부스는 저희 고고학방에서 해야 한다는 소리신가요?”
“그래. 여태 한 번도 안 했다며?”
“정말로 인기도가 제일 높으면요? 저희한테 무슨 포상이 떨어지죠?”
“마, 말했잖니, 재단에서 지원금이…”
“그런 불확실한 것 말고요. 구체적인 동기 부여를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구에 대한 지원이야 이미 신후가 모자랄 것 없이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학과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도 눈높이가 그렇게 차이 나지 않는 것에 단순하게 놀란 건우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을 때, 학과장의 손가락이 정확히 건우를 콕 집었다.
“에?”
“이 방에서 유일하게 군대를 안 다녀온 게 건우였지?”
“아… 네, 그런데요.”
“듣기로는 대체 복무할 마땅할 곳을 찾지 못해서 군대를 다녀와야 할지도 모른다던데. 내가 인맥을 써서 군인 대신 연구원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알아봐 주지.”
꽤 그럴싸한 제안에 조교들의 표정이 묘하게 펴졌다. 신후도 마음만 먹으면 건우에게 대체 복무의 기회를 가져다줄 수도 있었지만, 언젠가 이렇게 말했었다.
‘다녀와 보니 나쁘지 않더라.’
그 말을 듣고 건우는 반 체념한 상태였다.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 다음 생에도 한국에서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 뻔한데, 누가 군대를 두 번 가고 싶겠는가? 그렇다고 여자로 태어나기에는 더더욱 싫었다.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교수님.”
건우가 비장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신라도 뒤따라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힘닿는 대로 도울게요, 선배!”
“그래. 고맙다, 신라야!”
비형랑에게서 빼내 줬을 때보다 더 고마워하는 건우의 모습을 보고 조교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똑똑.
늦은 저녁, 교수실의 문이 두드려졌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던 신후는 조용히 문가를 쳐다봤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한 화비가 걸어 들어왔다.
“시간 나면 들르라고 했던 게 누군데, 만나기 되게 어렵네.”
“마침 신라가 늦게까지 축제 준비를 한다고 해서 시간이 비었어. 거기 앉아.”
신후는 화비를 소파 쪽으로 부르고 자신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화비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신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신후가 작게 입꼬리를 당겼다.
“왜 긴장하지?”
“일단은… 나도 요괴이니까.”
인간으로 환생한 연구실 사람들과 달리 화비는 여우귀로 한평생을 살아온 요괴였다. 불문율을 어기는 요괴들을 가차 없이 제령시킨다는 어둑시니 일당의 얘기는 예전부터 멀찍이서 들어온 것이었다. 동주가 그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그는 피해야 할 1순위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설마 비비 님의 곁을 떠나라고 한다거나….”
“아니. 옛 인연이라고 하니 거기까지 건드릴 생각은 없었어. 우리 일에 곧잘 도움이 되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크흠. 뭐, 그러면 다행이고.”
“단순하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신후는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단순한 질문이 아닌 게 확실하군.’
화비는 속으로 짐작하며 혀를 찼다. 그런데 들려온 질문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빙의할 육신을 물색했을 때, 그 아이돌과 비슷한 많은 환자들을 봤겠지?”
“어? …어어.”
“얼마나 많이 찾아봤지?”
“큰 병원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의식을 잃은 지 오래된 환자들을 주로 봤어. 그러면 대부분 그 영혼들은 기억이 희미해져서 돌아올 의지가 강하지 않으니까.”
“비형랑은 그런 자들의 리스트를 모은 거였겠군.”
“그래. 내가 거기에 일조했지.”
화비는 고개를 숙이고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지난 과오는 이미 뼈저리게 뉘우치는 중이었다.
“널 탓하려고 부른 건 아니고. 오히려 부탁을 하려고 부른 거야.”
“부…탁? 당신이?”
고개를 갸웃한 화비의 표정이 요상하게 찌푸려졌다.